MBC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MBC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 MBC

 
매년, 어쩌면 그보다 더 짧게 몇 달 주기로 빠르게 바뀌는 가요계의 지형도에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영역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여성 솔로 뮤지션 시장이다. 현아와 2010년대 중후반 선미, 청하 등 댄스 계열의 약진, 혜성과도 같았던 볼빨간사춘기의 등장 등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2010년대 이후 아이유와 태연이 이루던 솔로 보컬리스트 생태계는 굉장히 공고했다. 이 체제는 지금도 유지되는 중이다. 당장 2023년 말에는 태연의 'To. X'가, 올해 초에는 아이유의 'Love wins all'이 차례로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끼어들었다. 바로 알앤비 싱어송라이터 비비(BIBI)가 발표한 신곡 '밤양갱'이다. SBS의 프로그램 <더 팬>에서 처음 이름을 알린 그는 미국 내 아시아계 뮤지션 전담 레이블인 88라이징과의 협업 등을 거쳐 최근에는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적잖은 인지도를 갖춘 아티스트다. 그렇지만 비비가 음원 차트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번 '밤양갱'이 사실상 처음이다.
 
더욱 눈길이 가는 지점은 기존 비비의 커리어가 나아가던 노선과 '밤양갱' 간의 간극이다. 기본적으로 특별한 장르에 치우치지 않는 음악을 발표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뿌리를 내린 것은 얼터너티브 알앤비 쪽이었다. '밤양갱'은 이런 비비 세계관의 울타리를 아득히 벗어나는 곡이다. 시각적인 요소만 봐도 확실하다. 새까만 옷을 입고 멍한 표정으로 화면 밖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앨범 < Lowlife Princess: Noir > 속 비비는 온데간데없다. 화려한 색감의 뮤직비디오 썸네일은 언뜻 보면 비비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조차 힘들 정도다.
 
'어둠의 아이유' 비비의 변신
 
 MBC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MBC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 MBC

 
물론 비비가 늘 거친 스타일의 음악만 선보인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어조를 유지하긴 했지만 직전 싱글이었던 '홍대 R&B'는 꽤 차분한 편이었고, '한강공원'에서는 우수에 젖은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밤양갱'에서의 변신은 상당히 단절적이다. 4분의 3박자 왈츠 박자에 맞춘 사뿐사뿐한 드럼과 그 못지않게 조심스러운 가사 전달력, 간소화된 사운드 구성은 비비의 과거와의 연결성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인디 팝 감성이라고 불리는 이미지와 더 많은 접점을 지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노래는 비비가 가창을 제외하면 제작을 타인에게 전적으로 위임한 곡이다. 그 주인공은 장기하. 작곡과 작사, 편곡 크레딧 란을 보면 그의 이름만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장기하 음악의 요상한 센스가 마땅히 존재하지도 않는다. 악뮤(AKMU)의 이수현이나 백예린 등의 목소리를 씌운 AI 커버 영상이 쏟아지는 상황이 시사하듯, 노래는 다분히 범대중적이다. 매끈한 멜로디와 마치 1960년대 한국 가요처럼 모두를 끌어안는 포근한 복고적인 분위기, 심지어 가사도 소박하다. 흔하지만 자주 손에 잡히지는 않는 밤양갱을 소재로 연인 간의 현실적인 이별과 그 후의 감정을 술술 드러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밤양갱'과 접해 있는 또 다른 대상은 바로 아이유다. 전반적인 무드나 가사를 풀어내는 방식은 아이유의 음악을 일부 연상케 한다. 이러한 레퍼런스의 요소가 재밌는 것은 비비를 향한 수식어 때문이다. 가수로서 스스럼없이 자기 이야기를 던지며 스크린에도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공통 분모, 반면 추구하는 이미지가 극단적인 차이에서 착안한 '어둠의 아이유'라는 별명이 얼마 전부터 비비에게 붙었다. 약간의 유머를 곁들인 이러한 타이틀이 그의 캐릭터를 강화하던 시점에서, 그 원본의 대상인 아이유의 느낌을 옅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입소문의 기폭제가 되기 충분했다.
 
이외에도 뜯어볼 요소는 많다. 홍보를 위해 장기하와 함께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사실도 곡의 전파에 힘을 많이 실었다. 그리고 이별 후 마녀 같은 모습으로 밤양갱을 직접 제조하는 뮤직비디오 속 비비의 모습은 마치 최근 국내 개봉 후 좋은 관객 호응도를 얻은 티모시 샬라메 주연 영화 <웡카>의 마술적이고 동화적인 풍경을 생각나게도 한다. 그리고 마침 연말연초 여성 솔로 뮤지션의 음원 차트 상위권 점령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도움을 줬을 것이다.
 
폭발적인 음원 차트 성적이 일부 신경 쓰이는 측면도 있다. K팝 내에서 꾸준히 강한 이미지를 어필한 르세라핌의 현재 최고 히트곡이 기존 중추에 있던 라틴 팝과는 아예 다른 장르의 'Perfect Night'인 것처럼, 마치 돌연변이 같은 '밤양갱'의 이미지가 비비의 향후 방향성을 결정짓는 데에 큰 힘을 미칠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지켜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도 앞으로 많은 고민이 있으리라는 예측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직 여러 걱정을 하기에는 시기상조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기억될 히트곡이 탄생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그리고 비비의 음악인 것과 별개로 '밤양갱'은 "좋은 가요"로 제격인 곡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편히 들을 수 있고 가볍게 즐기기 충분한 그런 노래를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니 그저 달디단 밤양갱을 한입 베어 물자. 벌써부터 바라는 게 너무 많으면 피곤하니까.
 
 MBC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MBC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 MBC

비비 아이유 밤양갱 장기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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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웹진 이즘(IZM)에서 활동하고 있는 필자 한성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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