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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닐 화장실이 누군가에게는 별 것이다. 특히 '공중'화장실을 쓰기 어려운 트랜스젠더에게 화장실은 너무나도 '별 것'이다. 오는 2월 27일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 3주기를 맞아 국내 대학 최초로 차별 없이 누구나 사용 가능한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을 다녀왔다.[편집자말]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 픽토그램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 픽토그램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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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성공회대 정문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 '새천년관'은 대부분의 강의가 진행되는 강의동이다. 이곳 새천년관 지하1층 학생식당(학식당) 옆에는 2022년 국내 대학 최초로 만들어진 성중립 화장실 '모두를 위한 화장실(모두의 화장실)'이 한 칸 있다. '모두의 화장실'은 성 정체성과 장애를 떠나 말 그대로 차별 없이 '모두가 쓸 수 있는 화장실'을 말한다.

지난 22일 오전 시간대 모두의 화장실 주 이용자는 학식당 조리노동자들이었다. 조리사 정순흥(62)씨는 '모두의 화장실'을 두고서 "학식당과 가깝고 편리해 전혀 불편함 없이 이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내 대학 최초 성중립 화장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실제 이용에서는 별다른 면이 없어 보였다. 정씨는 기자에게 "왜 여기가 국내 최초냐"고 묻기도 했다. 다른 한 조리노동자도 "사실 일반 화장실과 거의 똑같아서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라고 덧붙였다. 

성공회대 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신입생 가운데 '모두의 화장실'을 보고 성공회대에 지원을 결심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고작 단 한 칸의 화장실 때문에 대학 지원을 결심하다니? 얼핏 들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일까? 

'모두의 화장실'을 지키겠다는 학생들
 
'모두의 화장실' 내부
 '모두의 화장실' 내부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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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화장실 외부에는 여성, 간성, 남성, 장애인 등 픽토그램이 그려진 '모두의 화장실' 표시가 붙여져 있다. 화장실 내부에는 기저귀 교환대, 자동문,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각도 거울, 경비실로 연결되는 비상 통화 장치, 비데 장치, 샤워실 등이 구비돼있다. 공간이 넓어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활동지원사까지 모두 들어갈 수 있다. 비좁아서 문을 닫지 못하고 용무를 해결하는 기존 장애인 전용 화장실과도 대조된다. 

언뜻 보기에는 '기존 화장실에 비해 면적이 넓다'라는 걸 제외하면 크게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다만, 다른 화장실에 비해 설비가 많아 고장이 잦은 편이다. 학교 건물 내 화장실이니 학교에서 기본적인 관리를 하지만 독립적인 학생 기구인 인권위원회에서도 역할 분담을 통해 이곳을 관리한다. 인권위원회를 비롯한 학생자치기구에서는 각 건물 화장실마다 '비상시 사용하는 월경대·탐폰' 케이스를 수시로 채워두고 불법 촬영 카메라 설치 여부 등을 관리한다. 
 
화장실 내 비치된 '월경대·탐폰' 케이스.
 화장실 내 비치된 '월경대·탐폰' 케이스.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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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화장실'이 첫 설립 논의를 시작한 건 2017년이나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한 차례 좌초됐다. 그러다 2021년 4월부터 '모두의 화장실' 설치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21년 당시 학내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이훈(26)씨는 "성공회대에 트랜스젠더 학생이 10시간씩 화장실을 참으면서 수업을 듣다가 방광염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간 일이 결정적"이었다며, "더군다나 트랜스젠더 군인으로 군내 성소수자 차별과 맞서던 변희수 하사가 사망하면서 '모두의 화장실' 설치가 더이상 늦춰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논의가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훈씨는 "'학교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몇 명인데?'라는 물음을 끝없이 마주해야 했다. 그 몇 사람을 위해 '모두의 화장실' 설치 비용을 쓰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증명하라는 태도였다"라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인스타그램에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이라는 계정을 만들고 1인 시위, 기자회견, 시민단체 연서명, 신문사 기고, 문화제 '콸콸콸 물 내림제' 개최를 비롯해 1년 간 각종 홍보 활동을 진행했다. 활동이 차곡차곡 쌓여 학생, 교수, 교직원까지 학내 구성원이 모인 토론회가 열렸고, 미온적이던 학내 분위기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 2022년 3월 '모두의 화장실'이 생겼다.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은 치열한 논의 끝에 생겼다. 한국에서도 숙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사례가 돼준다. 
 
김태현 성공회대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이 휠체어 이용자도 사용할 수 있는 각도 거울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김태현 성공회대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이 휠체어 이용자도 사용할 수 있는 각도 거울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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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두의 화장실'이 설치되고도 난관은 이어졌다. 지난 2023년 6월 보수단체 학생학부모교사인권보호연대(학인연)는 구로구청에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을 폐쇄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기도 했다. 학인연 측은 '모두의 화장실'을 두고 "자연적인 성별 구분의 표지, 생리적 특수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성범죄와 성별에 따른 수치심을 야기할 수 있는 행위"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성공회대와 구로구청은 이같은 민원에도 불구하고 2023년 12월 최종적으로 '모두의 화장실'을 없애지 않기로 결정했다. 2023년 성공회대 인권위원장 탄소(22)씨는 "학생 사회에서도 '오랜 시간이 걸려 학생들이 직접 만든 화장실이니 지켜져야 한다'라는 분위기가 있었다"라며 "학교 측에서도 학생 사회의 반응이 있으니 민원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응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미국에서 벌어진 '화장실 전쟁' 

지난 2015년 4월 오바마 정부 당시 백악관 행정동 건물에 최초로 성중립 화장실이 설치돼 화제가 됐다. 당시 대통령수석 고문이 "중요한 진전"이라고 환영했지만 일부에서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지난 1월 국내 출간된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알렉산더 K. 데이비스가 쓴 <화장실 전쟁>에는 당시 논란을 잘 다루고 있다. 

2016년 3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의회는 생물학적 성별이 화장실 문에 표시한 성별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화장실을 쓸 수 있다고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글로벌 기업은 해당 지역으로의 사무실 확장 계획을 취소하면서 그 이유를 콕 집어 법안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유명한 가수나 예술가들도 지역서 예정된 공연을 취소하고 손실을 감수하면서 항의를 한다. 해당 지역의 맥주 양조장 소유주는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굴지 말자'는 이름의 새로운 맥주를 만들어 그 수익금 전액을 지역의 가장 큰 LGBTQ 인권단체에 기부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오히려 지역 주유소와 식료품점은 비판을 거들면서 매장 앞 유리창에 성중립 화장실을 제공한다는 광고를 붙이기 시작했다. 교육 기관에서도 가장 가까운 성중립 화장실의 위치를 학생과 교수진 등에게 공유했다.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혐오적 법안을 비판하고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어낸 대목은 성공회대 사례와도 닮았다. 

'화장실 전쟁'은 이제 시작됐다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은 학식당 옆에 위치해있다.
 성공회대 '모두의 화장실'은 학식당 옆에 위치해있다.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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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가 심은 '화장실 씨앗'은 곳곳으로 퍼지고 있다. 카이스트는 2023년 12월 캠퍼스 내 6개의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했다. 카이스트에서도 그간 '모두의 화장실' 관련 설치 요청이 꾸준히 있었고, 포용성위원회가 논의를 주도해 마침내 설치가 마무리됐다.

부산대·서울대·인하대 등 전국 대학에서도 성공회대를 모델 삼아 '모두의 화장실'을 추진하고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도 학내에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하기 위해 홍보 활동을 진행했다. 또한 대학뿐 아니라 경남 산청군의 대안학교 산청간디학교나 시민단체 '인권재단 사람' 등에서도 성공회대의 사례를 따라 '모두의 화장실'이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지고 있다.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김태현(21)씨는 최근 SNS를 통해 퍼지는 '모두의 화장실'과 관련된 '안전성' 논란에도 "'모두의 화장실'에 한 번이라도 방문한다면 우려하는 부분을 바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탄소씨 또한 "'모두의 화장실'이 만들어지기 전인 2021년에도 성공회대 에브리타임(재학생 대상 익명 커뮤니티)에서도 SNS에서 제기되는 '모두의 화장실'이 위험한 게 아니냐는 등의 의문이 오갔지만, 설치되고 학내 구성원들이 이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오히려 논란이 없다"라고 말했다. 

탄소씨는 "'모두의 화장실' 하나를 설치하는 데 5년이 걸렸는데, 앞으로 계속 설치를 이어가려면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라며 "민원에 대응하면서 특히 차별금지법이 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의 화장실'은 차별에 반대하면서 만들어졌고, 차별금지법에 근거해서 주장해볼 수 있지 않나"라고 언급했다. 

성공회대 인권위원회는 새터(새내기배움터)에서 '모두의 화장실'에 관해 더 자세히 홍보했다. 오는 3월 여러 단위와 함께 토론회를 열어 '모두의 화장실'을 둘러싼 논의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한국에서 벌어질 '화장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다. 
 

태그:#성공회대, #모두의화장실, #화장실전쟁, #트랜스젠더, #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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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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