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2020년 1월 5일 영화 <기생충>으로 77회 골든 글로브 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 소감으로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영화뿐일까. 자막 읽기 정도의 작은 불편과 낯섦은 예술 애호가라면 한 번은 넘어야 할 장벽이다.
 
스페인어 노래는 어떨까. 1950년대 쿠바 음악이라면? 70, 80살 뮤지션들이라면? 이 정도면 인치가 아니라 미터 단위의 꽤나 높은 장벽이다. 그런 앨범 한 장이 툭 튀어나와 장벽을 넘나드는 인기를 끈 바 있다. 세계적 인기는 한국에까지 넘어와 잠깐 '월드뮤직(동·서양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중동,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한 음악을 동시대에 맞게 바꾼 대중음악)' 붐을 끌었다.
 
1997년 발매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the Buena Vista Social Club)>이다. 이 앨범에 얽힌 사연은 여러모로 극적이다.
 
극적인 쿠바 뮤지션들과의 만남

1996년 영국 월드뮤직 음반사 월드 서킷(World Circuit)은 쿠바와 아프리카 음악을 섞는 작업을 진행했다. 프로듀서 닉 골드(Nick Gold)는 미국 슬라이드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 라이 쿠더(Ry Cooder)를 초빙했다. 쿠더가 아바나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온 골드는 "아프리카 연주자들이 도착하지 않았다"라고 난감해했다. 수년 뒤에야 그들이 비자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골드와 쿠더는 계획을 변경했다. 쿠바 음악을 녹음하자. 쿠바 음악은 퓨전(Fusion, 융합)이다. 스페인 등 유럽에서 건너간 이들의 음악과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이들의 다양한 음악이 합쳐져 있다.
 
연주자로 어쿠스틱 베이스에 올란도 로페즈(Orlando López), 코러스 지휘와 노래에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Juan de Marcos González),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Rubén González) 등이 확보돼 있었다. 이들은 전설적 쿠바 뮤지션을 더 모았다.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인 89세의 콤파이 세군도(Compay Segundo)를 수소문 끝에 시골에서 찾아냈다. 그는 젊어서 잘나가는 가수였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미국인 관광객을 주로 상대하던 클럽과 캬바레 등이 문을 닫았다. 세군도는 시가를 마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나이 들어 낮에는 이발사로, 밤에는 가수로 일했다.
 
이브라힘 페레르(Ibrahim Ferrer) 영입 과정도 극적이다. 후안이 가수를 찾아 나섰다. 몇 시간 만에 남루한 옷차림의 구두닦이 할아버지를 데려왔다. 그를 마이크 앞에 세우고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다. 얇고 투명한 테너 목소리로 '도스 가르데니아스(Dos Gardenias)'를 수줍게 불렀다. 라이 쿠더는 "듣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라고 회고했다.
 
녹음은 1996년 3월부터 4월까지 아바나 에그렘(Egrem) 스튜디오에서 진행했다. 과거 RCA 음반사 소유였다. 장비를 교체하지 않아 1950년대 아날로그 기기를 보유 중이었다. 모든 곡은 라이브로 녹음됐다. 요즘처럼 오버 더빙(녹음된 소리에 다른 소리를 덧입힘)을 하거나 디지털 기기로 한 소절씩 끊어서 작업했다면 생생함을 잃었을 수도 있다.
 
앨범에 수록한 14곡 중 쿠바의 대표적 음악 장르 손(Son)이 4곡으로 가장 많다. 이는 쿠바 동부 오리엔테 지방에서 발원했다. 스페인과 아프리카 음악이 합쳐진 리듬감 강한 민요 형식이다. 가장 유명한 손 노래는 '관타나메라(Guantanamera)'다. 볼레로(Bolero)도 3곡이 있다. 스페인 춤곡 볼레로와 이름만 같다. 사랑을 노래하는 느리고 서정적인 포크 음악이다. '베사메 무초(Besame mucho)'가 대표곡이다.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앨범 앞면. 가수 이브라힘 페레르가 담배를 피우며 거리를 걷고 있다.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앨범 앞면. 가수 이브라힘 페레르가 담배를 피우며 거리를 걷고 있다. ⓒ 최우규

 
앨범 첫 곡 '찬 찬(Chan Chan)'은 세군도가 1980년대 쓴 손 노래다. 50살 막내인 기타리스트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가 보컬을 주도한다. 세군도는 이름에 걸맞게 '두 번째' 보컬 역할을 하며 기타를 친다. 쿠바 음악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부드럽게 달래는 듯하다.
 
뒤를 잇는 '데 카미노 아 라 베레다(De Camino a la Vereda)', '엘 쿠아르토 데 툴라(El Cuarto de Tula)'도 손이다. '데 카미노…'는 페레르가 만들고 불렀다. 종교 색채가 짙은 가사이지만, 노래는 즐거워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엘 쿠아르토…'는 오초아가 주도하고 페레르, 마누엘 리세아(Manuel Licea)가 경쟁하듯 즉흥 노래를 보탠다. 쿠바식 잼 세션인 데스카르가(descarga) 형식이다.
 
볼레로 '이 투 퀘 아스 에초(¿Y Tú Qué Has Hecho?)'에서는 라이 쿠더와 세군도의 기타 이중주가 돋보인다. 마지막 볼레로 '베인테 아뇨스(Veinte Años)'는 홍일점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가 노래한다. 굵은 목소리로 감정을 깊숙하게 꽂아준다.

'파블로 누에보(Pablo Nuevo)'는 77살의 루벤이 피아노로 연주한다. 의사의 길을 접고 음악으로 방향을 튼 그는 쿠바 피아노계의 보물이다. 흥겨운 단손(Danzón, 유럽 궁중 춤과 음악, 아프리카 리듬이 혼합된 노래) 곡이다. '엘 카레테로(El Carretero)'는 과히라(Guajira, 전원과 농촌생활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민요)다.

타이틀 곡인 단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우연한 기회에 실렸다. 스튜디오 일과는 오전 11시에 시작했다. 루벤은 오전 9시쯤 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이런저런 곡을 연습했다. 라이 쿠더가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을 발견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그게 무슨 노래예요?"
"어떤 곡 말이야? 10곡을 연주했는데."
"여덟 번째 곡이요."
"그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야. 그 클럽의 마스코트 곡이지".
"그건 무슨 클럽인가요?"
"예전에 음악인들이 가는 회원제 클럽이었지."

 
쿠더와 일행은 클럽이 있던 곳을 찾아갔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곡명은 밴드 이름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이들은 스튜디오에서 7주 동안 어울려 노래하고 연주했다. 빈둥거리다가 오후 2시부터 럼주와 커피를 마셨다.
 
앨범은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전통 열대 라틴 앨범(Best Traditional Tropical Latin Album)' 상을 받았다. 2022년 기준으로 800만 장이 팔려, 기네스북의 '가장 많이 팔린 월드뮤직' 앨범 인증도 받았다. 영화 같은 일이다. 강퍅한 도시 생활에 지쳤다면, 약간 녹아내린 초콜릿 같은 이 앨범을 들어봄 직하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앨범 뒷면에는 클래식 자동차와 쇠락한 아바나 거리 모습이 담겨 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앨범 뒷면에는 클래식 자동차와 쇠락한 아바나 거리 모습이 담겨 있다. ⓒ 최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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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기자로 23년 일했다.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홍보기획, 연설기획비서관을 했다. 음반과 책을 모으다가 시간, 돈, 공간 등 역부족을 깨닫는 중이다. 2023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말과 글을 다룬 책 <대통령의 마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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