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2월, 설입니다. 가족과 친지를 만나 정을 나누어도 모자랄 시간이지만, 올해는 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경기는 어렵고 들려오는 뉴스도 팍팍한 소식 뿐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라앉아 있을 필요는 없겠죠? 안팎으로 지친 당신에게 단비가 될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몇 년 새 참 힘들었다. 팬데믹 3년 동안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더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여파가 들이닥쳤다. 연일 고물가 행진으로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상 기온 현상은 잦아져 전 세계 곳곳에서 폭설, 폭염, 쓰나미, 지진, 홍수, 지진 등으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좀처럼 희망적인 소식을 들리지 않고 있다. 스스로라도 작은 행복에 만족감을 느끼며 위안을 삼아야 한다. 점점 각박해져가니, 현실을 떠나 영화 속 세상으로 눈 돌리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만이라도 그 세상에서 살고 싶어진다.
 
그래서 준비 봤다. 짧은 설 명절 동안 텁텁한 현실을 떠나 판타지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탄탄한 이야기와 세밀한 심리묘사로 소설과 영화 모두 웰메이드인 세 편을 모아봤다.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부디 2024년은 희망찬 일들이 찾아오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4개월 동안 먹지 않고도 여전히 살아 있는 소녀의 비밀
  
 영화 <더 원더> 스틸컷

영화 <더 원더> 스틸컷 ⓒ IMDB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원더>는 <룸>의 원작자 '엠마 도노휴'의 동명 원작을 토대로 한 슬프고도 미스터리한 소녀의 이야기다. 1862년 아일랜드의 한마을. 한 소녀가 4개월 전부터 성수 말고는 먹지 않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기적의 소녀라며 추앙하기 시작했고, 소문은 빠르게 퍼져 성지순례지로 인기를 끌었다. 마치 부활한 예수, 성인을 대하듯 사람들은 열광했고 기부물품이나 금액도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건을 조사하러 온 영국의 간호사 립(플로렌스 퓨)과 취재하러 온 기자 윌(톰 버크)은 애나(킬라 로드 캐시디)를 지켜보기 시작한다. 먹지 않고도 건강에 이상이 없는 애나를 관찰하며 의심은 커졌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자, 더 이상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 수 없었다. 결국 모든 비밀을 알게 되지만 직업적 소명과 개인적 측은지심이 대립한다. 진실을 밝혀야 할지, 죽어가는 애나를 두고 봐야 할지 갈등에 빠진다.
 
영화는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던 아일랜드에 전염병이 퍼져 수백만 명이 아사했던 일이 있었다. 때문에 오랜 기간 음식을 먹지 않고 생존한 사람은 신성시되었다. 기적을 간절히 바랐던 암울한 시대, 스스로 기적이 되어야만 했던 가혹한 시대상이 아련함을 남긴다. 
 
애나와 립은 공통점이 많았다. 립은 많은 전쟁 부상자를 살렸지만 정작 아기를 3주 만에 잃었고, 애나는 죽은 오빠를 대신해 빈자리를 채워야 했었. 둘은 상처를 보듬으며 미래를 공유한다.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안타까운 개인의 사연과 섬뜩한 종교의 이면이 교차하며 날 선 스릴과 비판을 섬세하게 펼쳐냈다.
 
습지에 버림받은 소녀가 자연에서 배운 것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 소니픽처스코리아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야생동물 연구가 겸 과학자인 '델리아 오언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가정 폭력이 일상인 아빠, 이를 견디다 못해 집 나간 엄마, 언니와 오빠도 아빠를 피해 도망쳤다. 결국 아빠마저도 떠나버려 혼자가 된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야행에 적응해야만 했다.
 
혼자가 된 카야를 두고 사람들은 늪지 쓰레기, 버림받은 아이로 낙인찍어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다행히 소꿉친구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의 도움으로 글을 배워 책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습지를 관찰하며 자연과 삶의 이치를 깨달았고 그림을 그리며 무한한 상상력을 기록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테이트가 도시로 떠나자 또다시 버림받은 실망감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카야. 그 틈을 벌려 훅 들어온 체이스(해리스 딕킨슨)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온갖 거짓말로 카야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집착이 사랑이라 착각한 카야는 더욱 심해지는 데이트 폭력에 견딜 수 없게 된다. 결국 체이스와 크게 다툰 날, 그가 다음 날 습지에서 시체로 발견되면서 일급 용의자로 지목된다.
 
영화는 야생에서 여성 혼자 자립하는 고난과 성장, 짜릿함과 반전 결말까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유년 시절의 상처와 고립, 외로움, 굶주림의 절망 키워드를 자립, 희망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고무적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며 생존 방식을 터득하는 과정만으로도 흥미롭다. 가냘픈 외형 속에 꿈틀거리는 강인한 생명력은 카야의 발걸음을 쫓아갈 이유가 된다.
 
영화는 성장, 로맨스, 서스펜스, 스릴, 치정, 자연 다큐멘터리, 법정물 등 멀티 장르를 표방한다. 파란만장했던 한 여성의 일생에 미스터리한 사건을 끼워 재미를 더했다. 현재의 법정과 과거 서사가 교차편집되며 이해와 공감을 더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카메라에 담아 마음마저 풍성해진다. 특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마저 발칙해 놀라웠던 영화다.
 
사랑이란 단어로 담을 수 없는 수많은 관계
  
 영화 <유랑의 달> 스틸컷

영화 <유랑의 달> 스틸컷 ⓒ (주)왓챠, ㈜영화특별시SMC

 
<유랑의 달>은 '나기라 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결핍으로 고립된 두 사람이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재일 한국인 3세 이상일 감독과 할리우드에 진출한 홍경표 촬영감독이 만나 빼어난 미장센을 자랑한다. 원작의 심리 묘사를 영화는 이미지로 시각화해 상징화했다. 그 부분이 호불호일 수 있겠으나 두 배우의 연기력이 상호보완하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남부럽지 않은 부부의 아들이었던 후미(마츠자카 토리)는 기대가 많은 어머니 때문에 평생 움츠러들어 살게 된다. 어머니는 곁을 내주기는커녕 냉랭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때 받았던 충격은 큰 트라우마를 안겼고,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후미는 성인이 되었지만 성인 여성에게 사랑의 감정이나 욕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여자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오히려 편했다. 자신을 편견 없이 봐주었고 귀엽기도 했으니까. 남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사라사(히로세 스즈)를 만나고 확신하게 된다.
 
사라사는 후미와 정반대 성격의 아이였다. 활달할뿐더러 자유로운 모습에 후미도 조금씩 고무되어 갔다. 사라사는 부모님과 성인 영화를 함께 보기도 하고, 때로는 낮술도 마시는 자유분방한 집에서 컸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서 행복하게 지냈지만 아빠가 죽자 모든 게 달라졌다. 엄마는 사라사를 이모 집에 맡기고 무책임하게 떠나 버렸다. ​
 
그날 이후 사촌 오빠의 추행에 밤마다 시달렸고 가출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와 행복하던 때가 그리웠지만 만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비 오는 날 놀이터에서 후미를 만난다.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진 걸까. 무해한 어른과 며칠을 보내며 잊고 지낸 따뜻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세상은 둘 사이를 순수하게 봐주지 않았다. 결국, 후미는 소아성애자, 아동 납치범이 되어 죗값을 치른다. 15년 후 우연히 다시 만난 둘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겉으로만 봐서는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충격적인 비밀을 품은 슬픈 분위기가 오랜 잔상을 남긴다. 사람들은 19살과 9살 남녀를 색안경 끼고 바라봤다. 로리콘(로리타), 스톡홀름 콤플렉스라며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그때마다 숨을 곳을 찾아 유랑하는 기묘한 분위기가 151분 동안 잔잔하게 흘러간다.

두 사람을 오롯이 지켜보게 만드는 매력만으로도 충분한 이끌림이다. 사랑, 의지, 신뢰, 우정, 유대 등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둘의 관계는 무엇이라 단정할 수 없어 더 가치 있어 보인다. 그밖에 데이트 폭력, 디지털 타투(온라인 흔적) 등 무거운 소재까지도 유려하게 담았다. 결핍을 포근히 안아 주는 태도, 조금 다른 시선을 원한다면 추천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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