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랜75> 포스터 이미지

영화 <플랜75> 포스터 이미지 ⓒ 찬란

 
조너선 스위프트의 대표작 <걸리버 여행기>에서 우리는 대개 첫 번째 이야기인 소인국 릴리퍼트 에피소드만 기억하곤 한다. 가장 재미있기도 하고 2차 활용에서도 대개 해당 부분 위주로 각색되기 때문일 테다. 두 번째 거인국 이야기는 소인국 에피소드에 비한다면 확실히 아기자기한 재미가 좀 떨어지기도 하고,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사회비판 의도를 가장 명확히 심어놓은 네 번째 일화인 말들의 나라 '후이넘' 이야기는 못내 불편한 이들이 적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덜 인용되는 측면도 있겠다.

그리고 개별 에피소드로서 통합성보다는 다소 산만하게 걸리버의 여정이 이어지는 세 번째 이야기는 표제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잊힌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걸리버는 해적에게 붙잡혀 망망대해 무인도에 버려진다. 섬과 섬을 전전하지만 뾰족하게 구출될 가망이 없던 참에 멀리서 떠다니는 섬이 자신에게 다가온다. 바로 '라퓨타'란 이름의 당시로선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구사하는 공중왕국이다. 당대 영국에서 진흥되던 이상야릇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신랄한 조소가 가득한 해당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영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라퓨타를 떠나 아직 유럽인들에게는 신비에 싸인 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주유한다. 그렇게 라퓨타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러그낵'이라는 나라를 방문해 기이한 경험을 쌓게 된다.
 
러그낵 나라에는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이지만 노화는 피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다. '스트럴드브러그'라는 기이한 존재들은 말 그대로 자연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화로 인해 신체와 정신적 능력은 퇴보하게 된다. 이들로 인해 골치를 앓던 러그낵 정부는 80살이 되면 그들을 죽은 것과 동일한 존재처럼 행정적으로 처리한다. 시민이 누리던 법적 자격이 박탈되는 대신에 최소한도 연금만 지급하기에 빈곤에 떨어진 스트럴드브러그들은 구걸로 연명하게 된다. 그래서 외국에서 온 방문자 걸리버에게 우루루 몰려들어 동정을 베풀어달라 매달린다. 불사자들에게 세상의 지혜와 축적된 경험을 기대하던 걸리버는 자기 주변에 몰려든 이 불사자들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스트럴드브러그들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운명에 대한 공포로 성격이 뒤틀리고 그로 인해 사회에서 불길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100살이 넘어가면 이미 몇 세대가 바뀐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물론, 숫제 그들이 구사하는 말조차 구식화되어 다른 시민들과 의사소통조차 어려워진다. (판본에 따라서) 결국 러그낵 정부는 그들이 일정 나이가 되면 안락사를 조치하기에 이른다. <걸리버 여행기>가 1726년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사회가 겪는 고령화 문제 묘사의 선구적 고찰인 셈이다.
 
선행으로 선보였던 옴니버스 영화 속 단편 <플랜75>
 
 영화 <플랜 75> 스틸 이미지

영화 <플랜 75> 스틸 이미지 ⓒ 찬란

 
<플랜 75>를 연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2017년 당시 장편 버전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동아시아 영화인들이 연대해 연속 프로젝트로 기획 중이던 < 10년 > 시리즈의 일본판 제작 총괄을 맡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기획에 참여해 단편 버전을 먼저 선보이게 된다. 2018년 공개된 < 10년: 일본 >의 옴니버스 구성에서 <플랜75>는 맨 처음 꼭지를 맡아 호평을 얻는다.
 
장편으로 예정된 시나리오에서 5명의 주역 캐릭터 중 1명의 에피소드를 뽑아내 독자적인 작업으로 완성한 단편 버전은 장편과는 다른 간결한 호흡을 선보인다. (장편이 2시간에 육박하는 데 비해 단편은 15분여 남짓한 분량) 화면이 밝아지자마자 '당신의 선택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는 홍보광고 문구가 등장한다. 10년 후 근미래 일본에선 플랜75로 불리는 제도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정부가 조력사를 지원하는 것이다. 복지제도에 의존해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에겐 솔깃한 소식이다. 친절하게 상담에 응하는 인구관리국 공무원들과 오랜만에 말동무도 하고 일체의 장례비용도 국가가 부담해준다. 죽음 과정도 현대의학의 발달로 목에 스며드는 약으로 수면 중에 해결된다. 게다가 준비금으로 10만 엔의 용돈도 제공된다.
 
이쯤 되면 독거노인이나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이들에겐 선택지로 환영받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쯤, 인구관리국 공무원들의 내부 회의에선 '높으신 분'의 일장 훈시가 이어지는 중이다. 제도의 효율성을 예찬하던 관료는 본래 플랜75의 의도를 드러낸다. '고위층과 중산층은 감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을 써 주니까, 계속 소비하기 때문에 필요한 존재입니다.' 즉 플랜75는 이들을 타깃으로 삼을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플랜75가 노리는 대상은 누구일까? 관료의 발언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우리가 타깃으로 삼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지만 모두 묵묵히 그의 다음 발언을 기다릴 뿐이다. 남들이 꺼내지 못하는 정부의 목적이 마침내 공개된다. '저소득층, 몸이 불편한 사람. 즉 국가가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을 줄이는 게 플랜75의 내부 목표다.
 
그런 가운데 지방 소도시에서 플랜75 업무를 맡은 공무원은 치매에 걸린 장모를 플랜75 프로그램에 넣자는 아내의 제안에 고민한다. 아내도 몰인정해서 그런 건 아니다. 오랜 돌봄에 지치고 자녀가 탄생하는 시점에서 미래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묵묵히 업무 상담으로 노인들과 대면해 차례로 상담자들을 조력사로 인도한다. 대사와 극적 전개보다는 묵묵히 사회적 순환의 부조리함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 단편은 옴니버스 영화 속 단편들 중에서 가장 큰 화제를 불러왔다.
 
장편으로 완성된 <플랜75>가 선보이는 근미래 디스토피아의 풍경
 
어두컴컴한 교외의 어느 건물, 난장판이 난 채 망가져 있다.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건물 내 복도를 배회한다. 무엇인가를 어깨에 메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장총이다. 그는 처리할 일을 다 마쳤는지 사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입을 빌어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 (본인들이 의도한 건 아니라는 점을 알지만) 노인세대가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지우고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넋두리가 흘러나온다. 자신 같은 이들이 희생해서 사회문제 공론화가 이뤄지길 희망한다며 유서이자 선언문을 남긴 그 남자는 총으로 자살한다. 이미 그런 '증오범죄'가 한두 건이 아닌 듯하다. 마침내 격렬한 사회적 논란 끝에 범인의 바람처럼 '플랜75' 제도가 법제화된다.
 
78세 여성 '미치'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부로 일하며 독립생활 중이다. 동료 할머니들과 함께 일하고 나서 밥도 먹고 장도 보며 노후를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보내려 한다. 하지만 정년이 다가왔다. 일을 그만두자 당장 월세 내기도 빠듯하고 새로운 일자리 구하긴 바늘귀 격이다. 미치는 주거지원과 취업을 위해 노력하지만 일은 영 풀리지 않는다. 그가 구직활동을 위해 찾아다니는 공공기관마다 플랜75 홍보광고가 상큼하게 흘러나온다. 일체의 심사도, 건강검진 결과도, 심지어 의사나 가족 동의 같은 것 하나 필요 없다며. 보건소에서 건강검진을 해보려는 중에도 대기실에선 플랜75 선전이 사방에 가득하다.
 
젊은 공무원 '히로무'는 플랜75 상담업무를 맡고 있다. 찾아가는 서비스로 빈곤한 노인들이 오가는 동네 공원에서 이동상담소를 열고 무료급식을 얻으러 온 이들에게 상담을 권한다. 상담업무에 매진하던 그에게 찾아온 노인 얼굴이 낯이 익다. 20년간 연락이 끊겼던 삼촌이다. 규정상 일가친척을 플랜75 프로그램 관련 상담할 수 없기에 다른 동료에게 넘겼지만 마음이 쓰이던 히로무는 삼촌의 거처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미치는 그동안 자립생활을 고수해왔지만 아무리 일자리를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자존심을 낮춰 관공서에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해보려 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방문하니 이미 신청시간이 지난지 오래다. 하지만 플랜75 상담은 24시간 내내 친절하게 이뤄진다. 결국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플랜75 신청에 서명한다. 준비금이 주어지고 예정된 날짜 전까지 콜센터는 24시간 대기하며 상담원과 연결해 준다. 미치의 전담 상담원 '요코'는 친절하게 전화로 이야기를 '15분 동안' 들어준다. 외로움에 지친 미치는 요코와의 대화를 기다린다.
 
필리핀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어린 딸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일본에서 복지사로 일하지만 수술이 임박해 곤란을 겪는다. 주변의 소개로 보수가 더 좋은 정부기관의 일자리를 얻는데 플랜75로 조력사한 노인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유류품을 수거하는 임무다. 자국민들이 피하는 일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담당하기에 이곳에선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모든 게 기능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타국에서 알지 못하는 노인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마리아는 의문을 느낀다.
 
히로무는 삼촌과 교류하면서 플랜75 프로그램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알아보기 시작한다. 삼촌과 미치는 같은 날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다. 미치는 전날 밤 내내 자신이 기거하던 집 정리정돈을 묵묵히 수행한다. 가는 길에 흔적을 깨끗이 하고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태도다. 요코는 상담원 일에 지쳤다. 히로무는 업무 처리 과정에서 뭔가를 알아차린다. 그런 가운데 예정된 시간이 다가온다.
 
일본을 넘어 현대사회 전반에 던지는 근미래 묵시록적 풍경
 
 영화 <플랜 75> 스틸 이미지

영화 <플랜 75> 스틸 이미지 ⓒ 찬란

 
단편에 비해 대폭 확장된 분량 덕분에 장편 <플랜75>는 보다 다채로운 풍경과 여유로운 호흡을 통해 영화가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을 다양한 결로 풀어내는 데 성공한다. 도입부부터 근래 일본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실제 노인 대상 증오범죄 사례를 떠올리게 만드는 긴장감으로 가득 채운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 속에서 노인들이 딱히 민폐를 끼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증오범죄는 미디어의 요란한 편 가르기, 무능력한 노인 인구 증가로 경제가 망한다! 부류의 선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 아닌지 의문이 들게 하는 구성이다. 그런 고찰과 시선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로서 장편의 한결 여유 있는 상영시간이 활용된다. 감독과 제작진은 제도를 일선에서 실행하는 공무원 vs. 제도에 참여해 일생을 마치려는 노인의 기본 구도에 관찰자로서 임종 직전까지 대상자를 관리하는 상담원 + 사망 전후 절차를 처리하기 위한 3D 업종 종사자로서 이주노동자까지 4인 4색 캐릭터를 설정해 관찰자적 시선을 강화한다.
 
노인세대를 짐덩어리로 여기게 만드는 정부의 정책은 광범위하게 진행된다. 10여 년 전 서울역 대합실이나 공원 벤치에 노숙이 늘어난다는 이유로 구조물을 설치해 논란이 됐던 것처럼, 공원 벤치에 다양한 방해물을 부착하기 위한 조사가 영화 속에서 이뤄진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기대는 걸 효과적으로 방해하고 불편하게 만들까 머리를 맞대는 공무원들의 회의 장면을 보고 있자면 저렇게 무의미한 짓이 따로 없다. 그런 한편 공원 내 무료급식소에선 친절하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하지만 바로 옆에선 플랜75 상담이 진행된다. 그런데 급식소 줄에 선 건 노인 뿐이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전 세대에 걸쳐 양극화가 이뤄진 근미래 일본 사회 상황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미디어에선 플랜75 제도 실시 3년 만에 1조엔의 경제효과를 거뒀다며 자화자찬이 이어진다. 논란이 컸지만 실효성이 높다며 일본 정부는 10년 내로 플랜75 적용대상 연령을 65세로 하향 추진하겠다는 전망을 낸다.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의 사회문제 해결방법이 세계 각국을 선도할 거라며 말이다. 단편에선 고위 공무원이 일장 연설하는 장면으로 짧게 구현되던 플랜75 제도의 속내가 장편에 이르러선 공공연하게 언론과 방송을 통해 유포된다. 플랜75 프로그램은 친절하게 상담부터 사후 장례절차에 이르기까지 혜택을 제공하지만 대상자가 프로그램 참여를 거부한다면 미치의 사례처럼 고립되고 말 것이다. 일자리도 복지서비스 제공도 줄어드는 가운데 플랜75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묵시적 강요의 성격을 띠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결국 노인세대가 경제적 능력, 사회적 실용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란 '낙인' 아래 모든 사회문제 책임을 짊어진 희생양으로 추락하고만 것이다.
 
디스토피아 SF 영화의 고전으로 <소일렌트 그린> (1973.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 찰톤 헤스턴 주연)이 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환경오염으로 자연이 파괴된 종말론적 세계의 이야기다. 극소수를 제외한 인류는 초거대 기업 소일렌트 기업이 생산하는 크래커 형태의 인공식량으로 연명하는 중이다. 그중 획기적으로 먹을만한 신제품 '소일렌트 그린'이 인기를 끈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는 이 '그린'의 성분이 기업이 공개한 해양 플랑크톤 가공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식량자원이 고갈된 상황에서 무슨 재료로 만든다는 걸까? 인간의 존엄성이 소멸된 <소일렌트 그린>과 <플랜75>의 세계관은 어느 순간 통하고 만다.
 
플랜75 프로그램은 노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 창궐을 명분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제도가 시행되니 개인 차원의 범죄는 줄어들었을 테다. 대신 공권력에 의해 친절한 방식으로 '사회적 살인'이 대규모로 진행되는 세상이다. 노인들은 사회적 분위기에 떠밀려 오히려 체념하고 받아들이지만 노인세대가 아닌 이들도 해당 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해 분노하는 장면이 단편/장편 모두 등장한다. 누구나 노인이 될 테고, 해당 프로그램의 목표가 빈곤층의 효과적 '제거'에 있다는 걸 간파한 이들이 없을 리가. 단편에선 제도의 작동과정을 펼치는 데 집중했다면 장편화된 <플랜75>는 그런 부도덕한 제도의 한계와 함께 소극적 저항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간이 경제적 가치에 따라 폐기물 처리될 순 없지 않느냐는 소리없는 외침은 비록 화끈한 봉기나 시스템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수렴되지는 않지만 얼핏 매우 온건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선전되는 플랜75의 허점과 모순을 까발리기엔 모자라지 않다.
 
미래판 '고려장'은 결국 시스템의 직무유기에 불과하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스테디셀러 작가가 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 속에는 '황혼의 반란'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단편의 내용은 국적을 넘어 <플랜75>의 주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미래의 프랑스도 평균수명이 늘어난 바람에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지 오래다. 일본이나 프랑스나 별 다를 게 없는지 '노인은 일하지 않고 복지만 축낸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그 결과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유기하는 사례가 폭증한다. 프랑스 정부는 여론을 좇아 노인에 대한 복지정책을 축소하기 시작한다.
 
70세 이상이 된 노인에게는 의료비 지급과 공공장소 출입을 제한한다. 이후로는 5년 단위로 약값과 치료비 환급 불가 항목이 추가된다. 100세가 넘으면 무상의료 서비스 제공은 금지된다. 마침내 '노인 배척 법률'이 제정되고 새로운 법에 의해 노인들은 주사를 맞고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플랜75의 판박이 격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일본이 감언이설로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무'로 끌어들인다면 프랑스는 법제화한 차이뿐이다. 하지만 단편 속에서 일부 노인들이 산중에 숨어 반정부 투쟁을 개시한다. 다양한 사회경험을 축적한 노인들의 반군이 확대되자 진압에 애를 먹던 정부는 독감 바이러스를 노인 반란군의 근거지인 산악지대에 살포한다. 의료 서비스에서 고립된 노인 반군은 사실상 세균전에 몰살되고 반란이 진압된다는 내용이다.
 
세상일이란 게 통하게 마련이고 일본이나 프랑스나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속하는 국가들 살림살이가 다들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판박이로 상상력이 구체화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저 창작물을 흥미롭게 즐기기엔 한국의 사정도 다를 바 없는 게 문제다. 나날이 세대 간 갈등이 격화되면서 팽배한 적대감이 과연 실체가 있는지 혹은 정치의 실패와 갈등 해소 책임을 떠넘기려는 기득권 집단의 고의적 갈라치기 아닌지 냉정하게 짚어볼 시점이다.
 
플랜75 제도는 일본에서 중세 봉건시대에 실재했던 '고려장' 제도의 근미래 구현 격이다. 결국 디스토피아 SF 장르영화인 <플랜75>의 상상력은 역사적 실제 사례에서 착안된 셈이다. 노인을 산중에 버리지 못하게 되자 근대 일본에선 입을 줄이기 위해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고의로 죽이거나 버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중한 세금과 공역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선명해 보이는 극단적 정책의 배후에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공권력과 시스템의 직무유기가 바탕에 있다는 건 중세나 근미래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지독히 시의성이 돋보이는, 옆 나라 뿐 아니라 세대갈등으로 몸살을 앓는 2024년 한국사회에 유용한 토론주제가 될 만한 영화다.

<작품정보>
 
플랜 75 Plan 75
일본│2022│드라마
2024.02.07. 개봉│113분│15세 관람가
연출 하야카와 치에
출연 바이쇼 치에코(미치 역), 이소무라 하야토(히로무 역)
카와이 유미(요코 역), 스테파니 아리안(마리아 역)
수입/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
 
2022 75회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초청 /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
2023 95회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일본 출품작
2022 96회 키네마준보시상식 올해의 영화 TOP 10
2022 63회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브론즈알렉산더),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인권상
2023 37회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대상, 비평가상, 유스 심사위원상
2023 44회 요코하마영화제 신인감독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
플랜75 하야카와치에감독 바이쇼치에코 이소무라하야토 스테파니아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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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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