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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터 입구에 함평천지전통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평일에는 열리지 않고 오일장(2일과 7일)에만 장이 열립니다.
▲ 함평천지 장터 입구  장터 입구에 함평천지전통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평일에는 열리지 않고 오일장(2일과 7일)에만 장이 열립니다.
ⓒ 박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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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따라 함평장터 구경 온 날 / 박세원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光州) 고향을 보랴하고
제주(濟州)어선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갈 때
흥양(興陽)에 돋은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에 아침안개, 영암(靈岩)에 둘러있다.
~(하략)
 
호남가의 첫 소절은 내 고향 함평천지로 시작한다. 기산봉을 중심으로 여인네 치맛자락 펼쳐 휘감는 듯 영산강 하류 영수천이 감싸 안고 흘러간다. 동쪽에는 평야 서쪽에는 바다가 있는 함평은 예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았고 시장이 발달하였다. 특히 함평 우시장은 전국 5대 우시장으로 꼽혔다. '함평의 큰 소 장이 전라남도의 소 값을 좌우한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설 명절을 앞두고 지난달 중순에 함평 오일장(매월 2일과 7일)을 찾았다. 함평 우시장의 긴 역사만큼 유명한 맛집, 시장 안쪽으로 즐비한 한우 생고기 비빔밥집이 바로 그곳이다. 대부분 2세들이 대를 이어 비빔밥집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 집만의 맛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비빔밥은 하얀 쌀밥 위에 각종 채소와 육회를 얹어 비빈다. 이때 하얀 비계를 채 썰어 고명으로 얹고 이 집만의 비법인 고추장이 들어가면 맛집 비빔밥이 완성된다. 친정에 오면 고소한 한우 육회 비빔밥이 생각나 자주 찾는 곳이다. 가격도 한 그릇에 1만 원이라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와서 먹어도 가격이 부담이 없다. 비빔밥으로 배를 채운 다음 장 구경에 나섰다.

함평은 예부터 우시장과 더불어 서해안 갯벌 바다를 해안선으로 두고 먹거리가 풍부했다. 장터 난 전에는 각종 채소들도 가득했다. 마트에서 금값이라 하던 사과도, 대파도 소쿠리에 담겨 싱싱한 몸값을 자랑하고 있었다. 갯벌에서 나고 자란 파란 감태, 바위에 붙어 피어난다는 석화(굴), 세발낙지는 바다 내음을 품고 있었다. 이곳 해산물은 도시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한 몸, 싱싱하면서도 저렴하여 도시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함평장날의 꽃이다.

"난 40년째 닭장사를 하고 있어라우"
 
어려서 보던 풍경이 그대로 살아 있어 정겨운 장면이다. 토끼와 닭들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폴더폰을 들고 손녀와 대화하고 있다. 닭파는 할머니가 물건을 싣고 오느라 버스기사와 실랑이를 벌인 이야기가 구수하다.
▲ 닭파는 할머니 어려서 보던 풍경이 그대로 살아 있어 정겨운 장면이다. 토끼와 닭들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폴더폰을 들고 손녀와 대화하고 있다. 닭파는 할머니가 물건을 싣고 오느라 버스기사와 실랑이를 벌인 이야기가 구수하다.
ⓒ 박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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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도로를 지나는데 문득 익숙하게 보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닭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에 고향 언덕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할머니, 많이 팔았나요? 사진 찍어도 돼요?'라고 묻는 우리들의 차림새로 보아 닭을 사갈 것 같지 않은 듯, 달갑지 않게 시큰둥 대답했다.

"난 40년째 닭장사를 하고 있어라우, 이 닭 팔아서 우리 새끼들 대학공부까지 시켰구먼. 인자 허리 아프고 무릎 수술까지혀서 더 못 키우고 쬐끔만 키워서 팔러 나오제."

묻지도 않은 당신의 고달픈 인생사를 쭈욱 늘어놓으셨다.

할머니는 어제부터 닭들과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느라 잠도 설쳤고 아침 첫 버스에 닭들을 싣고 나오셨다고 했다. 버스를 탄 후 냄새 난다고 코를 막는 승객들 눈치 살피랴, 버스비 한 푼 더 내라는 기사에게 굽신거리며 실랑이 끝에 도착하셨다고 했다.

닭장 안의 암탉은 오히려 낯선 도시 이방인들이 신기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장터를 구경했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지나가는 구경꾼들도 욕심낼 만한 암탉들이었다. 말하는 동안 햇빛에 바랜 깊은 주름 사이로 할머니의 오래된 장날들이 스쳐 지나가고 두손 꼭 쥔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등 위로 겨울바람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추억의 장터를 지키기 위해 
 
함평 갯벌 바닷가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해물을 파는 장터와 구수한 장터 먹거리를 판패하는 장날 모습입니다.
▲ 함평주포 바닷가에서 생산한 싱싱한 해산물과 구수한 장터먹거리 함평 갯벌 바닷가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해물을 파는 장터와 구수한 장터 먹거리를 판패하는 장날 모습입니다.
ⓒ 박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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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는 마트처럼 정해진 가격도 없고 유통구조가 복잡하지도 않다. 필요한 만큼만 팔면 된다는 상인들과 싱싱한 산지 물건을 직접 사려는 소비자들 간에 흥정이 오고가며 가장 합리적인 가격이 정해진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멋지게 포장을 하지 않아도 상품의 질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감태 한 타래를 사도 담아 주는 할머니의 손에는 정량보다 더 많은 덤이 따라온다. 물건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 '정(情)'까지 덤으로 주니 가히 인심이 상량인 장터다.

지금의 함평장이 예전의 명성만큼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따스한 온기를 나눠주는 고향 장터를 둘러보며 우시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를 졸래졸래 따라왔던 여덟 살짜리 내 모습도 떠올렸다. 국밥 한 그릇 얻어먹는 재미가 그렇게도 좋았었다. 뻥튀기 아저씨의 호루라기 소리에 귀를 막는 사람들의 모습들과 하얗게 피어나던 구름을 휘젖던 어린 손이 생각나 허공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며칠 있으면 설 명절이다. 도시는 물론이고 농촌까지도 마트들이 지배한 세상에서 전통의 오일장이 면면히 제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이동거리와 물건진열에 다소 불편하더라도 전통시장을 비롯한 지역장터를 애용해야 한다. 참고로 얼마 전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의 옆 동네인 서천시장 화재로 인해 상인들과 지역경제에 큰 피해가 있어서 마음 아팠다. 부디 빠른 회복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있길 소망한다.

태그:#함평장날, #함평우시장, #육회비빔밥, #신선한해산물, #덤으로따라오는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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