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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원으로 사는 삶'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떠올렸다. 이내 불가능을 단언하며 가볍게 집어든 책이었다. 읽기 전에는 결코 몰랐다. 책 속에 이토록 놀라운 여정이 숨겨져 있을 줄은. 한 편의 드넓은 모험 서사가 펼쳐졌다.

0원살이 프로젝트의 시작

이야기의 처음은 지옥 같은 직장 생활이다. 워킹 홀리데이로 간 영국 런던에서 저자는 상사의 갑질을 참다못해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낸다. 하지만 돌아온 건 해고였다.

그는 살인적인 런던의 물가와 당장 갖고 있던 돈 300만 원을 떠올리며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돈이 다 떨어지면 자신의 삶도 끝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반문하게 된다.

'내 삶이, 인생이, 시간이, 나의 존재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쓰이는 것이 당연한 거야?'

돈의 유무에 따라 존재 자체가, 삶이 부정당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 저자는 돈을 쓰지 않고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0원살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장장 2년여의 시간에 걸쳐.

0원살이 시작 후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건 '우핑'이었다. 자원봉사자와 유기농 농장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였다. 농장의 호스트는 자급자족하며 자연에서 빌릴 수 있는 소똥과 같은 재료로 직접 집을 지었다. 하지만 저자에게 친환경 공동체 구축과 같은 말은 관심 밖이었고, 밭일은 따분했다. 그저 무료 숙식제공이란 말에 이끌려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채소에 물을 주거나 흙을 퍼 나르는 단순한 일을 했을 뿐인데 호스트는 늘 고맙다는 말을 한다. 어느 날 문득 저자는 이 고맙다는 말이 감격스러워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인간적 온기 없이 '사용'되었던 전 직장과 달리, 이곳에서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또한 행복을 조건 짓는 가장 강력한 욕구가 무어냐는 저자의 질문에, 호스트는 '사랑받는 것'이라 답하기도 했다.
 
<0원으로 사는 삶> 표지
 <0원으로 사는 삶> 표지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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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를 떠돌며 계속된 0원살이 여정에서 만난 많은 인연들도 저자에게 사랑을 베푼다. 이동에 필요한 자전거를 지원해주기도, 음식을 전하기도, 잘 곳을 내어주기도 했다. 도움을 사양하는 저자에게, 자신들 역시 과거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며 선행은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라 했다.

물론 길 위에서의 여정이 내내 사랑으로 가득 차기만 했을 리 없다. 추위, 더위, 어둠, 배고픔, 두려움 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하염없이 걷거나, 히치하이킹을 하던 도중 성적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운전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버려진 집에서 살기도 하고, 쓰레기통을 뒤져 쓸 만한 음식을 구하는 스킵 다이빙을 하던 도중 같은 한국인에게 냉대받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는 기적 같은 상황을 더 많이 만난다. 특히 다자사랑주의자들, 레인보우들, 히피 등을 만나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게 된다. 다자사랑주의자들의 참된 목적은 세상 모든 만물과 생명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품는 것이라 한다. 유목 인디언의 삶을 동경하는 레인보우들 또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 존재의 본질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 자연 등 모든 것들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어떤 존재든 사랑으로 품고, 자연스레 지구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산다. 직접 집을 짓고 땅에서 얻는 먹거리로 자급자족한다.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동식물이나 자연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는 신경 쓰지 않는 대량 생산 경제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사지 않는다. 환경, 기아 문제 등 수많은 사회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과잉 소비를 하지 않고 기꺼이 검소한 삶을 유지했다. 채식도 그들에겐 '가슴의 일'이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들 덕분에 저자는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연결'의 진리를 만나게 된다. 전쟁, 식량, 환경, 에너지 위기 등 세상의 모든 문제들 역시 '단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런 진리가 단숨에 구해지는 건 아니었다. 저자는 내내 회의하고 고뇌하고 질문하고 대화했다. 직접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면서도 '아무리 자연을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고된 환경에서 기꺼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다.

비건 공동체 내에서는 고기의 맛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육식을 정당화하는 각종 이유를 늘어놓기도 했다. 어느 즈음부터 소비욕구를 잠재웠다고 생각했지만 도시에 간 순간 탐욕과 갈망이 다시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단식하고 묵언하고 명상하며 홀로 자연에 머무르기도 했다.

저자의 이런 길고 긴 여정은 흡사 수행하고 참선하는 영적 수행자의 모습 같았다.
사실 이 같은 저자의 생생한 경험담이 없었다면 '무조건적인 사랑? 연결? 이게 웬 허무맹랑한 소리인가'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건, 나와 다름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 진리를 얻게 되는 과정에서의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 어떤 철학서나 환경서적, 연대의식을 담은 책들보다도 나에겐 더 인상 깊게 다가왔다.

0원살이 여정의 끝

저자는 이제 지리산 자락 오두막에서 산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채식뿐만 아니라 지구, 인간, 다른 생명에게 해를 입히는 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며 자급자족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는 사랑을 깨닫게 한 많은 인연들 덕분에,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세상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거에는 오로지 돈의 유무가 삶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었지만, 현재는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필요한 만큼의 돈만 벌며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돈'이라는 화두 자체가 사라져버렸다고 전한다.

시작은 단순히 돈을 쓰지 않는 무소비 여정이었지만, 이 여정 덕분에 물질 너머 더 높은 차원의 삶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0원으로 사는 삶'. 단순히 '0원'에 이끌려 집어든 이 책의 결말은, 결국엔 '삶'이었다. 책 속에는 히피들과 저자 사이의 이런 대화가 나온다.

"우리는! 너를! 사랑해!"
"나도! 너희를! 사랑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랑의 진리가 정말인지는 나 같은 범인이 결코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전체에 이 말이 울려 퍼지는 꿈같은 상상을 잠깐 해봤다.

"사랑해!"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글쓴이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0원으로 사는 삶 - 나의 작은 혁명 이야기, 2022년 한겨레 '올해의 책'

박정미 (지은이), 들녘(2022)


태그:#0원으로사는삶, #박정미, #자본주의, #연대의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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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여행하며 자주 글자를 적습니다. <그때, 거기, 당신>, <어쩜, 너야말로 꽃 같다> 란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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