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형' 신태용에게도, '벤버지' 벤투에게도 아시안컵의 벽은 높았다. 두 전임 한국대표팀 감독이 나란히 16강에서 탈락하며 옛 제자인 태극전사들의 재회는 불발됐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는 1월 28일(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자심 빈 하마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전에서 강호 호주에게 0-4로 완패를 당했다. 벤투의 UAE는 29일 카타르 알라이얀의 아흐메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타지키스탄을 상대로 연장까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3-5로 석패하며 탈락했다.
 
신태용과 벤투는 지난 두 번의 월드컵에서 각각 한국 축구 대표팀을 지휘했던 전임 사령탑들이며, 이번 아시안컵은 모두 두 번째 도전이었다. 신태용 감독은 2015년 호주 아시안컵 당시 울리 슈틸리케(독일)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활약하며 결승진출에 기여했다.
 
당시 준우승은 1988년 이후 한국축구가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고, 훗날 신태용이 전술운용 및 선수단 관리에서 사실상 감독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신태용은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슈틸리케의 후임으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월드컵 본선진출과 조별리그 독일전 승리(카잔의 기적) 등의 업적을 남겼다.
 
신태용의 후임으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포르투갈 출신 파울루 벤투 감독은 2019년 UAE 아시안컵을 통하여 메이저대회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벤투호는 8강에서 카타르에서 0-1로 덜미를 잡히며 아쉬운 성적에 그쳤다. 하지만 이후 벤투 감독은 한국 축구 최장수 사령탑으로 장기집권하며 지난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12년 만의 원정 16강 진출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국내 축구팬들은 신태용과 벤투가 각기 다른 팀을 맡아 아시안컵에 출전하게 되면서 이들의 성과와 한국과의 재회 가능성에 주목했다. 만일 인도네시아와 UAE가 상위 라운드로 진출했다면 토너먼트에서 한국과는 각각 8강-4강전에서 만날 수도 있었다. 평가전이나 예선전을 제외하면 메이저대회 토너먼트 사상 최초로 전임 대표팀 감독을 적으로 만나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으나, 아쉽게도 두 팀의 동반 탈락으로 무산됐다.
 
나란히 16강이라는 결과는 똑같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신태용은 피파(국제축구연맹)랭킹 146위로 아시아에서도 축구변방으로 꼽히던 인도네시아에 사상 첫 조별리그 통과와 17년 만의 1승이라는 새 역사를 선물했다.
 
인도네시아는 신태용 감독이 지휘봉을 잡기 전까지는 아시안컵 본선에 통산 4번 출전했으나 한 번도 조별리그를 통과해 본 적이 없다. 2010년대 이후 최근 3번의 대회에서는 아예 본선조차 밟지 못했다.
 
하지만 신태용호는 조별리그 2차전에서 동남아 라이벌 베트남을 상대로 1대 0 승리를 거두며 값진 승점 3점을 따냈다. D조 3위를 차지한 인도네시아는 오만과 중국을 제치고 조 3위 상위 4개팀까지 주어지는 16강 막차 티켓을 따내는 행운이 따랐다. 한국대표팀 감독 시절, 2018 러시아월드컵 강호 독일을 잡는 이변을 연출했던 '카잔의 기적'을 잇는 '도하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16강이 확정되자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공식 축전까지 보내며 신태용 감독과 대표팀 선수들의 업적을 극찬했다.
 
내친김에 8강에서 한국과의 재회를 소망했던 신태용의 질주를 가로막은 것은,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호주였다. 피파랭킹 25위의 호주는 아시안컵의 우승후보이자, 신태용이 한국대표팀 수석코치 시절이던 2015년 대회에서도 결승에서 만나 연장 끝에 1-2로 석패했을 만큼 강팀이다. 인도네시아의 전력으로는 넘보기는 어려운 상대였다. 예상대로 비록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 하고 4골 차로 완패했지만 인도네시아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호주와 당당하게 맞섰다.
 
신태용 감독은 2019년 부임 이후 4년 넘게 인도네시아 A팀과 연령대별 대표팀을 겸임하며 인도네시아 축구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시안컵에서 일본, 호주, 이라크 등 아시아의 강호들과 경험을 쌓으며 자신감을 얻은 인도네시아는 이제 다가오는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 집중해야 한다. 인도네시아는 F조에 이라크, 베트남, 필리핀과 묶여 있으며 현재 1무 1패(1점)로 꼴찌에 그치고 있지만, 아시안컵에서 얻은 자신감을 이어간다면 아직 이변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반면 벤투는 아시안컵에서만 2회 연속으로 '언더독 돌풍의 희생양'이 되는 망신을 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벤투의 UAE는 아시안컵 C조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경기력은 실망스러웠다. 최약체 홍콩에게만 3-1로 이겼지만 내용 면에서는 골결정력 부족과 상대의 역습에 꽤나 고전했고, 2차전 팔레스타인전에서는 퇴장으로 인한 수적열세 속에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1-1로 간신히 무승부에 그첬다.
 
공교롭게도 벤투는 2차전 경기 후 심판 판정에 극대노하여 항의하다가 또다시 퇴장을 당했는데, 이는 1년여 전 한국대표팀 시절 카타르월드컵 2차전 가나전 퇴장 사태의 재현이 되어버렸다. 벤투는 월드컵 포르투갈전 때처럼, 이란과의 아시안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도 벤치에 앉지 못하여 코치들이 경기를 대신 운영해야 했다. UAE는 이란에 패배하며 월드컵같은 기적은 없었지만, 팔레스타인에 골득실로 앞서서 조 2위는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16강전에서도 전력상 한 수 아래로 꼽히던 타지키스탄을 상대로도 선제골을 내주며 내내 졸전을 면치 못했다.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골을 넣으며 간신히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갔지만, 승부차기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고배를 마시며 끝내 아시안컵과의 악연을 극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타지키스탄의 피파랭킹은 106위로 UAE(64위)에는 무려 42계단 뒤진다. UAE가 우승후보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우승 경력도 1회 있고 나름 다크호스로 꼽혔던 팀인데 비하여, 타지키스탄은 아시안컵 본선 진출조차 이번 대회가 처음이었다. 타지키스탄은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 극장골로 레바논에 2-1로 역전승을 거두며 극적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했고, 16강에서는 벤투의 UAE마저 잡아내며 첫 출전에 8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완성했다.
 
벤투는 한국대표팀 감독 시절이던 2019년 UAE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서 카타르에 덜미를 잡힌 바 있다. 당시 한국의 피파랭킹은 53위, 카타르는 93위였다. 한국을 꺾은 카타르는 상승세를 이어가며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까지 차지하는 역사를 세웠다. 벤투가 두 대회 연속으로 아시안컵 최대의 이변에 제물이 되어준 셈이다.
 
물론 당시의 한국이나 현재의 UAE 모두 팀을 맡은 지 얼마되지 않아 약 반 년 만에 아시안컵에 나서야 했기에 벤투의 축구가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니었다는 변명거리는 있다. 하지만 평가전에서는 좋은 경기력을 보이다가 막상 대회에서는 상대팀들에게 전력이 분석 당하고도 고집스러운 전술과 경기운영의 유연성 부족, 고질적인 골결정력 난조, 약팀에게 졸전 끝에 업셋이라는 패턴을 판박이처럼 반복했다는 것은, 또 한번 벤투 축구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다.
 
최근 클린스만호의 아시안컵 부진으로 일각에서는 잠시 벤투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하여 벤투의 UAE 역시 클린스만호 못지 않은 심각한 졸전을 보여주면서 더이상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전임 대표팀 감독들과의 재회가 무산된 한국은 16강에서 로베르토 만치니가 이끄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다. 한국이 8강에 오른다면 사커루 호주와, 4강에서는 타지키스탄 혹은 이라크-요르단전 승자와 맞붙게 된다. 결승에서는 일본 혹은 이란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만일 우승에 실패한다면 클린스만 체제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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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벤투 타지키스탄 아시안컵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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