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어지는 땅> 포스터 이미지

영화 <이어지는 땅> 포스터 이미지 ⓒ 필름다빈

 
<이어지는 땅>은 '여행자'의 영화다. 영화는 한국인들이 출연하지만 처음부터 끝 장면까지 한국 땅은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런던과 밀라노를 배경으로 진행되며 베를린이 언급될 뿐이다. 주인공들은 학업이나 진로를 위해, 혹은 헤어진 연인에 대한 망향을 쫓아 대륙을 가로질러 유럽에 이르렀고 이들은 굳이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어 보인다.
 
또한 이 영화는 '산책자'의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이국의 거리를 산책한다. 그 산책은 우리가 동네를 거닐듯 일상적인 풍경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종종 길을 잃고 헤메거나 유랑하는 것 같은 질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갈팡질팡 혹은 빙빙 돌아나가서라도 그들은 어떤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아무튼 '책을 버리고 거리에 나가'야 뭐든 다음 상황으로 이행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전제를 두고 영화는 즉흥연주 잼 세션을 벌이듯 미끄러져 흘러간다.
 
런던의 공원, 버려진 캠코더, 어색한 만남의 끝은?
 
젊은 여성 호림(정회린 분)은 이국의 공원에 서 있다. 구체적 설명 없이는 그곳이 어디에 속한 땅인지 파악하긴 쉽지 않다. 그는 공원을 돌아다니다 벤치에 앉아있는 한 남성을 발견한다. 둘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다. 알고 보니 호림과 사귀었던 동환(감동환 분)이다. 런던에서 우연히 재회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지금 사귀는 새 애인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동환의 말에도 불구하고 호림은 동환의 바로 옆에 주저앉듯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자신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며 지인에게 문자를 보내야 하니 휴대전화를 빌려 달라 한다. 그리고 문자에 답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핑계로 동환의 곤혹스러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 동환의 여자친구 경서(김서경 분)가 도착했다. '누구냐'고 묻는 경서 앞에서 난감해하는 동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림은 천연덕스럽게 대한다. 상식적으론 이제 슬슬 눈치껏 자리를 비켜줘야 하건만 호림은 그럴 기미가 없다. 경서는 호림의 사정이 난처하니 함께 다녀도 되겠다며 친절하게 제안한다. 그렇게 호림은 동환과 경서 커플의 여정에 동행한다. 그들은 경서의 선배인 이원(공민정 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호림은 이원을 보고 놀란다. 분명히 둘은 첫 만남이지만 얼굴이 낯이 익다. 실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긴 하다. 공원에 들어서기 전 거리를 걷던 호림은 어느 집 곁에 버려진 물품 중 오래된 캠코더를 호기심에 켜보다 저장된 동영상에서 이원을 발견하고 그 캠코더를 가져나왔던 참이다. 참 기이한 인연이다. 경서와 동환의 집에서 넷은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관객들이 이미 짐작하고 누군가는 기대했음직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진다. 자꾸만 미련이 남아 집착을 드러내는 호림과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설파하는 동환의 차분하지만 선 긋는 대처가 이어진다.
 
불편한 상황이 이어지던 끝에 호림은 자리를 나와 이원의 거처로 함께 향한다. 호림은 자신의 진의를 고백하고 이원은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호림이 가져나온 캠코더 이야기에 깜짝 놀란다. 그 영상에는 사연이 가득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이원의 이야기로 영화는 환승한다.
 
매너리즘처럼 보이던 이야기가 흥미로운 롤러코스터로 변신하다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 이미지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이어지는 땅>은 전통적인 기승전결 서사를 대입해 보게 된다면 당혹스러움이 앞설 법한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면 잘 정돈된 공원의 원경이 펼쳐진다. 풍경이 근사하다. 그 화면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 끝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온다. 주인공이겠거니 하고 호기심 속에 점점 뚜렷해지는 윤곽을 지켜본다. 하지만 그 정체를 확인하고 나니 좀 당황스럽다. 그는 그저 공원을 산책하는 동네 주민일 뿐이다. 그 다음 두 번째로 화면에 등장하는 이 또한 그렇다. 좀 맥이 빠지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진짜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 호림의 행보는 초반에는 그저 근래 한국독립영화에서 숱하게 양산되는 자기연민 가득한 캐릭터에 불과해 보인다. 런던까지 대학원 유학을 왔다는데 그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전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스토커같은 집착만 보인다. 헤어진 지 2년 넘게 지난, 그것도 전 애인과의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의 귀책사유로 결별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는 미련을 보이며 집착한다. 짜증이 날 법한데도 꾹 참고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동환의 권유와 (이미 눈치를 챘을 게 뻔한) 현 애인 경서의 관대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호림은 맹목적이다.
 
솔직히 이쯤 되면 민폐 캐릭터로 보이기도 한다. 기성세대 시각으로 보자면 '사회성'은 결여된 채 자기중심적으로 주변에서 배려받기만 원하는, '요즘 세대'의 부정적인 모범사례 같은 꼴이다. 자기 기분에 따라 주변 사정이나 공적 역할은 외면하고 일이 커지면 숨어버리는 태도를 보면 동 세대라도 정이 뚝 떨어질 법하다. 다행히 호림은 결정적 파국까지는 치닫지 않은 채 자리를 뜬다. 이 순간에도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것인지 생면부지로 오늘 처음 만난 이에게 챙김을 받는다.
 
하지만 작은 반전이 하나 숨어 있다. 호림이 공원에서 동환을 만나기 전 우연히 집어든 캠코더 속에 감춰진 사연이다. 이원은 캠코더에 얽힌 사연을 호림에게 들려주지만 자신은 도저히 그 영상을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둘은 그렇게 터널을 통과하고, 카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비춘다. 터널을 지나자 화면에는 이원의 근 미래가 떠오른다. 관객은 이제 그의 과거가 밝혀질 것이라 기대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그 보물 상자를 열 계획이 없다. 이제 이원의 현재 일상이 조명된다. 그는 밀라노로 돌아와 본업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하지만 미래는 열려 있는 법이다. 열심히 산책을 하다 이원은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된다. 물론 순조롭지만은 않다.
 
'코스모폴리탄' 세대의 정서가 과감한 형식실험으로 구현되다
 
<이어지는 땅>은 거의 정확히 이등분된 분할 구성을 취한다. 전반부는 런던에서 호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후반부는 밀라노에서 이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두 주인공이 함께 밤길을 걷던 터널이 바통 터치 구간처럼 활용된다. 특별히 필터 효과를 넣지 않은 자연주의적 화면 사이에 터널 장면을 포함한 몇몇 순간은 의도적으로 표현된 빈티지한 질감을 통해 LP 음질처럼 스크래치 처리된 MP3, 혹은 낡은 필름이나 오래된 사진첩의 기운을 이식한다. 꾹꾹 눌러 담은 인장처럼 해당 장면들의 의미와 사용처를 감안하며 본다면 전반적으로 느리게 관조적으로 흘러가는 전개에 색다른 추가가 이뤄질 테다.
 
화림과 이원은 과거에 얽매인 채 정체된 자아를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길을 걸으며 전진해 다른 고지에 오르는 과정으로 이끄는 둘이되 하나와 같은 캐릭터로 기능한다. 거의 완벽히 전반부와 후반부를 분할해 분량을 점유하는 둘이지만 화림이 딱 한번 후반부에 등장하는데, 해당 장면에서 그가 독백하듯 관객에게 들려주는 대사를 통해 그런 캐릭터성이 확인되는 셈이다.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이국의 낯선 거리를 거닌다. 그들이 이동하는 동선 자체에 큰 의미나 명확한 목적지는 없어 보인다. 설령 명목상 존재하더라도 도착보다는 걷는 과정 자체가 무게감을 지니는 편이다.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자세히 잡기보다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움직임 자체를 조명하는 데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움직임의 동적 패턴이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표현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취하는 방법론처럼) 인물과 사건에 주목한다면 무척 '정적'으로 보일 영화는 움직임에 주목하는 순간 '동적' 흐름으로 기이한 변화를 거친다.
 
세대 담론으로 <이어지는 땅>을 조망한다면 몇 가지 흥미로운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이 싫어서'까지는 아니라도 굳이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 땅에 묶일 생각 같은 건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에게 맞는 곳, 혹은 지금 그들이 취하고 싶은 행태에 따라 머물 장소를 정할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런던과 밀라노라는, 국내파들에게는 한번쯤 여행 혹은 이민의 대상으로 동경할법한 장소를 배경으로 삼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엔 아주 무심하게 해당 지역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저 상황과 조건에 맞춰 머무는 장소일 뿐이라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심경을 대변하듯 말이다. <국제시장> 같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이 영화 속 세대의 정서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이 영화 곳곳에 묻어난다.
 
문제는 다른 토양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는 교훈극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 이미지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는 제작진이 확고한 결의로 도전한 형식 실험을 통해 차별화에 도전한다. 사건 중심의 명확한 전개방식 대신 이미지의 연속으로 인물들이 겪고 있는 상황과 변화를 표현하는 문법을 취한다. 전반부 호림의 에피소드만 떼어놓고 보면 식상할 지경인데 터널 장면을 경유해 이원의 에피소드로 전환된 이후, 개별 분할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무빙 이미지가 연결됨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부터 <이어지는 땅>은 갑자기 낯설고 흥미로워진다. 그리고 이원의 파트에서 그가 진로로 삼은 조경에 관한 철학을 통해 영화가 취하는 주제의식이 관객에게 전달되며 이야기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표명한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 행복은 결국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교훈이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 가까운 곳을 지리적 고향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 속 감춰진 곳에서 찾는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라 판단한 듯하다. 이원은 밀라노의 골목과 거리를 마치 위성이 모 행성 주위를 공전하듯 왕복한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진로를 찾고 있는 이 곳은 그저 찰나에 머무는 곳이 아니라 새롭게 고향으로 삼으려는 공간이라는 무언의 표시처럼 다가오는 순간이다. 반면에 그와 만나게 되는 누군가에겐 (이원에겐 익숙한) 그 공간이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처럼 다가온다. 계속 출구를 찾으려 하지만 있던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둘은 동일한 공간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거닐 수 있게 된 이원은 파트너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다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비밀의 입구를 발견한 듯 인상적인 (의도치 않았던) 목적지의 풍경이지만 정작 그들이 원래 의도했던 장소는 아니다. 무언의 교훈극이 관객에게 웅변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순간이다. 과거에 얽매여 고여 있는 채로 침잠하기보다 바깥에 펼쳐진 불확실한 세계와 마주할 때, 대면의 용기를 발휘하는 찰나에 일은 벌어지게 마련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한 걸음 두 걸음 불안하게 내딛지만 결국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처럼 그런 용기를 발휘해야만 운은 가까워지는 법이다.
 
처음엔 식상하거나 짜증이 날 것처럼 진행되던 영화가 점점 제작진이 준비해둔 장치들이 조립되면서 흥미로워지고 마지막에는 어떤 감흥에 닿는 체험의 영화다. 물론 아쉬운 지점이 없을 리 없다. 해외 로케이션 경비 본전이 생각나서인지 유럽의 그림 같은 명승지 장면이 관광홍보영상 마냥 늘어지곤 한다. 굳이 저렇게까지 오래 카메라로 잡을 필요 있나 싶을 때가 간혹 있었다. 반면에 처음엔 영문을 몰라 답답하던 골목길 빙빙 돌기는 참을성 갖고 쭉 지켜보면 그 의미와 용도가 뚜렷해진다. 관객도 매너리즘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제작진의 충고가 귓가에 들려오는 느낌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인장을 새겨낸 <이어지는 땅>은 점점 비슷해지는 요즘 한국독립영화 경향 가운데 이채로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작품정보>
 
이어지는 땅 The Continuing Land
2022|한국|드라마
2024.01,10 개봉|87분|12세 관람가
감독 조희영
출연 공민정(이원 역), 정회린(호림 역), 류세일(화진 역), 감동환(동환 역), 김서경(경서 역)
제작 5시55분
배급 필름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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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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