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평 작곡가의 공연 당시 사진

장태평 작곡가의 공연 당시 사진 ⓒ 장태평 제공

 
"사람을 담기 시작하면서 진실된 작품에 다가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19년 11월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진행된 '제11회 아르코 한국창작음악제(아래 '아창제')'에서 극찬을 받은 장태평(38) 작곡가는 당시 연주됐던 <너븐숭이>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장중한 분위기와 함께 한국적 선율을 극대화시킨 국악관현악곡으로 객석을 가득 메운 2000명의 박수세례를 한몸에 받은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에 장씨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사람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초연(2019년 공연 연상 보러가기) 당시에 혹자는 <너븐숭이>를 두고 '말없는 음악극' 또는 '삶을 치유하는 자장가'라는 수식어를 붙여 작품을 소개했다. 마치 한스 짐머의 대표적인 영화 OST를 연주하는 장면을 떠올리듯 음악을 듣고 있지만 눈앞에서 극이 살아 숨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너븐숭이>는 여섯 개의 작은 타이틀에 따라 물 흐르듯 연주한다. '수선화의 노래'로 시작해 '흔들리는 섬', '무당 자장가', '거대한 감옥', '붉은 섬', '애기돌무덤 앞에서'까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여 차마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의 한을 풀어주는 진혼곡 같은 이 작품은 콘서트홀을 극장으로 바꾸는 마법을 발휘한다. 여기에 11분 내내 여섯 번에 걸쳐 장면이 전환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짜임새가 탄탄해보인다. 이렇게 장엄한 분위기에서 한국현대사에 기반을 둔 시대정신까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너븐숭이>에 관하여 어느 평론가는 이렇게 소개했다.
 
"각 장은 나름대로 음악적 아이디어들이 밀도 있게 조합되어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로 이어진다. 표정이 많은 작품이어서 대사 한 마디 없는 음악극 같은 사실적인 표현의 악상들로 가득하다. 정제되지 못한 부분들이 군데군데 있는 듯 보이나, 매무새를 고쳐 잡고 꼼꼼하게 들여다 보면 모두가 제 나름의 고뇌들이 눅눅하게 배어나온다."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결실로 음악을 선택한 장태평 작곡가는 초지일관 사람을 담으려는 의지 아래 이번 작품에 몰두했다. 덧붙여 그는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작곡가로서) 진실된 작품으로, (지휘자로서) 진실된 무대에 오르고 싶은"는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을 담아서 위로하는 곡을 함께 연주하며, 청중과 함께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는 <너븐숭이>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돌무덤 주변에는 수선화가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무덤의 맡에는 인형과 장난감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장 작곡가는 5년 전에 초연으로 연주됐던 <너븐숭이>의 배경을 이렇게 소개했다.

돌무덤 주변에는 수선화가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무덤의 맡에는 인형과 장난감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장 작곡가는 5년 전에 초연으로 연주됐던 <너븐숭이>의 배경을 이렇게 소개했다. ⓒ 장태평

 
장태평 작곡가가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너븐숭이'를 알아보기에 앞서 우선 제목을 간략히 소개하려 한다. '너븐숭이'는 제주 올레길 19코스를 따라 육지방향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을 넘어 북촌리 마을에 인근에 위치한 이곳은 본래 '넓은 쉼터'라는 뜻을 갖고 있다. 제주도를 여행할 때 지역의 아픈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의 대표적인 장소인 '제주 4·3기념관'이 있다. 또한 제주 4·3사건이 소재인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1979)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여기에 가면 실제로 곳곳에 핀 수선화와 함께 애기돌무덤이 여럿 눈에 띈다. 해방 이후 제주 4·3사건으로 북촌리 주민 학살이 자행됐을 때, 어른들의 시신은 다른 곳에 안장됐으나, 아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20여 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는데 적어도 8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 아이들의 무덤이란다. 돌무덤 주변에는 수선화가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무덤의 맡에는 인형과 장난감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장 작곡가는 5년 전에 초연으로 연주됐던 <너븐숭이>의 배경을 이렇게 소개했다. 
 
"끔찍하고 처참한 역사의 현장에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교 인근 밭에서 총살당한 이기복자(여, 2세)에게 이 곡을 바칩니다."

<너븐숭이>는 장 작곡가가 제주 4·3사건 유적지를 돌아보며 느낀 감정을 토대로 작곡한 곡이다. 작품의 구성은 앞서 소개했듯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서사적인 묘사와 함께 희생당한 어린 영혼을 위한 자장가를 담아낸 진혼이 작품의 주된 특징이다. 여기에 장씨는 제주 무당자장가와 애기돌무덤 앞에서 떠오른 선율의 단편과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의 자진중판·자진석·군채가락 등을 변주했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15주년 맞는 아창제에서 엄선한 '국악관현악 베스트5'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창작음악제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창작음악제 '제15회 아르코 한국창작음악제'가 오는 2월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된다. (이번에 연주되는 부문은 국악이며, 양악은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이 축제는 서양의 고전음악이 주를 이루는 한국 음악시장에서 창작곡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취하려고 기획됐다. 또한 작곡가, 지휘자, 연주자들이 부담없이 창작관현악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2007년에 시작해 올해로 15회를 맞는다.

매년 국악과 양악부문의 관현악곡 작품을 공모를 통해 선정했는데, 지난 15년간 총 171작품을 발굴했다. 올해는 공모를 진행하지 않고, 그동안 발표됐던 작품들 중에서 부문별로 5작품씩, 총 10작품을 연주한다. 이 중 19일에 진행되는 국악 부문에는 장태평의 '너븐숭이'를 비롯해 손다혜의 25현 가야금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어린 꽃'(협연 문양숙), 이귀숙의 국악관현악을 위한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 그리고 2012', 이예진의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 '기우'(협연 김인수), 이정호의 수룡음 계락 주제에 의한 '폭포수 아래'가 함께 연주된다. 이에 공연을 며칠 앞두고 5년 전 초연 당시에 화제를 불러모았던 장태평 작곡가에게 사람을 담은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장태평 작곡가의 공연 당시 사진

장태평 작곡가의 공연 당시 사진 ⓒ 장태평

 
- 음악을 농악단에서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열 살에 어머니를 따라 장구와 판소리를 배웠고 열두 살엔 호남여성농악단의 마지막 상쇠인 유순자 명인에게 부포놀음 등을 배워서 우리 음악의 장단과, 춤, 소리를 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직접 땅을 밟고 춤추고 노래했던 모든 예술 행위들이 지금의 제 음악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활동할 당시에 '틀과 격을 깨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도한 것입니까?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는 2020년부터 원일 예술감독이 부임하면서 기존의 틀을 깨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명칭부터 경기도립국악단에서 국악관현악을 해체하고 새로운 창작 방식과 다양한 형태의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5월, 국립극장에서 연주된 '역의 음향'은 연주자 중심의 집단 창작을 통하여 새로운 관현악적 시나위를 선보였죠. 기악·성악·사물 등으로 구성된 80여 명의 관현악단이 원일·김도연의 '시나위 브리꼴라주', 이예진·송지윤의 '27개의 파랑', 장태평·지박의 '호호훗' 등 세 그룹으로 나뉘어 모두가 함께하는 집단 즉흥 무대를 가졌습니다. 기존의 작곡 방식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며 교감하는 음악이었죠. 지휘도 즉흥 방식으로 제가 직접 부포를 들고 쇠를 연주하는 등 예전에 없던 지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하하). 이처럼 기존의 서양 방식과 형태를 빌려왔던 작곡과 지휘의 개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소리와 몸짓에 맞는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 2019년 아창제 선정 이후 5년간 어떻게 활동해왔나요?
"2019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이듬해 서른다섯의 나이로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선정되면서 지휘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정길선가야금 창작음악시리즈 위촉 <귀환>(2021), 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 위촉한 새가락별곡을 위한 가야금협주곡 <바리>(2022), 서울시돈화문국악당 실내악축제 위촉 <거울>(2022),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위촉 관현악 <춤꽃>(2023) 등 개인 작품활동도 꾸준하게 이어왔습니다."

- 2019년 초연 당시의 심정은 어땠나요? 특별한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당시에 '나는 작곡가도, 지휘자도 무엇도 아니다. 진정한 내 이야기를 음악으로 말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때문에 아창제에 작품이 선정되어 예술의전당에서 연주가 되어 무대인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얼떨떨했습니다. 행사가 마무리되고 집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차에 앉아서 새벽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태평 작곡가는 "1949년 1월 17일 북촌교 인근 밭에서 총살 당함"이라고 적힌 이기복자(여, 2세)의 비문을 보고 한참을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그를 위한 곡을 쓰고겠노라 마음 먹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태평 작곡가는 "1949년 1월 17일 북촌교 인근 밭에서 총살 당함"이라고 적힌 이기복자(여, 2세)의 비문을 보고 한참을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그를 위한 곡을 쓰고겠노라 마음 먹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장태평

 
- 제주도 '너븐숭이'에 방문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현장에서 어떤 감정에 사로 잡혔나요?
"제주4·3 유적지에 처음 방문한 것은 2016년이며, 2019년 1월은 세 번째입니다.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을 통해 제주도에 재방문했고, '너븐숭이 4·3기념관'에 가서 애기돌무덤을 보았습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교 인근 밭에서 총살 당함"이라고 적힌 이기복자(여, 2세)의 비문을 보고 한참을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그를 위한 곡을 쓰고겠노라 마음 먹었습니다."

- 작품을 완성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제주 관광지들을 방문하여 고개를 돌려보면 제주4·3 유적지가 있습니다. '너븐숭이'에도 조천읍 북촌리의 아름다운 들판에 20여 기의 애기돌무덤이 있고, 주변에는 수선화가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한참 머무르며 한편의 선율을 노래하며 적어두었습니다. 두 달 뒤에 새로운 관현악곡을 스케치하면서 하고 싶었던 주제는 하나입니다. 작품을 위해 제주도의 여러 소리들을 조사하던 중에 '제주 무당자장가'를 듣게 되었고 곡조가 특별하게 다가와 채보하고 보니 애기돌무덤 앞에서 떠올렸던 선율과 음구조가 닮아있더라고요. 이에 어떤 비논리적 확신으로 두 가지 닮아있는 선율을 모티브로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 아창제 15주년 기념 무대에 작품을 올리는 소감이 어떠신가요? 
"창작관현악은 수십년 동안의 역사에서 여러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현악에 대한 인식부터 지원형태와 규모, 작품의 질적 향상 등 개선되고 확대되어야 하는 숙제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창제의 가치와 의미는 연주를 맡은 지휘자와 연주단체는 물론이며 관현악을 애정하는 청중을 비롯하여 모든 음악계가 주목하고 집중하는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무대이며 선정되는 작곡가에게는 더욱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특별한 연주회에 기억되고 싶은 작품이 선정되어서 대단히 감격스럽습니다. 마주하기 어려운 아픈 역사를 작품으로 함께 기억하며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맑게 웃는 내일을 희망할 수 있는 무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5년 전 무대와 달라진 점과 기대할 점이 있을까요?
"제11회 아창제에서 선정된 이후로 12회부터 14회까지 3회에 걸쳐 아창제 국악부문의 연주를 제가 부지휘자로 있던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에서 맡으면서 생생하게 현장을 함께 해왔습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새롭게 등단하는 작곡가들과 함께 음악적으로도 전에 없던 인상적인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아창제는 작곡가의 작품이 선정되며 주목받게 되지만 지휘자를 비롯하여 관현악의 모든 파트가 악보를 통하여 작품과 대화하고 무대에 오르기까지 치열한 연습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15주년 기념 특별 연주회는 제11회 아창제에서 <너븐숭이> 초연을 연주한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다시 맡아 김성국의 지휘로 함께 합니다. 김성국 지휘자는 2023년 6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2023 관현악시리즈 전통과 실험-풍물' 공연에서 위촉된 저의 관현악 작품 <춤꽃>의 지휘를 맡아 탁월한 해석과 뛰어난 완성도의 연주로 작곡가에게 감격스런 무대를 선사해 준 바 있습니다. 하나의 관현악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초연된 이후로 수십 번의 재연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하니 매번 높은 수준의 연주를 보여주는 김성국 지휘자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이번 연주는 초연 때와 또 다른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 2019년 이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셨는데, 앞으로의 활동도 궁금합니다.
"2020년부터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서 무대 안팎으로 치열하게 열과 성을 다하여 책임을 다해왔고 이제 저에게는 잠시 숨표가 주어졌습니다. 창작자는 작품을 통하여 죽음과 부활을 거듭하며 끊임없는 내면의 성찰과 탐험을 거듭합니다. 작곡가로서 더디더라도 보다 솔직하면서도 성숙한 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 이 곡을 들을 청중들에게 한 마디를 부탁드립니다.
"반전(反戰)과 평화를 노래하고 한국 근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도 같은 끔찍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작품으로, 희생된 어린 영혼들과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함께 위로하고자 하는 진혼(鎭魂)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던 해방공간 제주의 이야기와 희생 당한 어린 영혼을 잠시 마음에 담으며 감상해주세요."
 
 아르코 한국창작음악제 포스터

아르코 한국창작음악제 포스터 ⓒ 아르코 한국창작음악제

아창제 나븐숭이 장태평 아르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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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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