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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노동자로 여러 일을 경험했습니다. 편집자와 대리운전을 거쳐 현재 노동조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결국 노동조합이냐고요? 일 하는 사람들에게 왜 노조가 필요하고, 노조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해보려 합니다.[기자말]
"고용승계를 원하는 사람은 12월 26일 오전 10시까지 평가서류를 제출하고, 12월 27일 면접 평가에 응하기 바랍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을 앞둔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사용자로부터 저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회사에 계속 다니길 원하면 면접을 보라는 통보였습니다. 지난 2019년 7월 입사한 곳이었습니다. 하는 일이나 근무지가 변경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직장 이름도 그대로인데, 갑자기 면접을 보라 하니 당혹스러웠습니다.

입사 5년 차에 통보받은 재면접은 시한도 촉박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인 12월 26일 오전 10시까지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함께 면접을 통보받은 동료 중엔 연말 휴가나, 경조사 등 개인사정으로 이 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무슨 크리스마스 선물도 아니고,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자조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다시 쓴 직무기술서
 
한 구직자가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한 구직자가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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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 사용자가 '고용승계를 원하는 구성원'은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에 응하라 했으니,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기한 내 제출하지 않으면, '고용을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료들과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부랴부랴 평가서류를 작성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서류를 제출하고 저를 포함한 직원들은 그룹별로 면접을 봤습니다. 회사는 '고용승계를 위한 인사평가'를 실시해 사람을 추려낸다고 했습니다. 심사결과에 따라 현 인원 중 '80%를 재고용'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일한 동료를 상대로 일자리를 놓고, 살아남기 위한 경쟁 면접을 본다는 것 자체가 잔인하고 서글픈 일이었습니다.

이는 서울시 산하 한 민간위탁기관의 운영 주체가 바뀌는 과정에서 벌어진 풍경입니다. 이 민간위탁기관은 서울시가 전액 예산을 대고, 운영만 민간이 합니다. 플랫폼·이동노동자 등 취약노동자를 지원하는 기관으로 노동자 대상 교육 및 노무·법률상담, 노동정책 연구, 이동노동자쉼터 운영 등이 주요 사업입니다.

서울시는 지난해 이 기관을 비롯해 서울 지역 4개 노동 관련 민간위탁기관을 통폐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 서울시 산하의 3곳 취약노동자 지원센터가 이 기관으로 통합됩니다.

통폐합과 함께 이 기관의 운영주체도 바뀌었습니다. 민간위탁기관 운영주체들은 3년마다 운영권을 두고 서울시와 위·수탁계약을 다시 맺는데, 지난해 12월 변경된 겁니다. 일반적인 원·하청 구조에서 원청사(서울시)가 하청업체(수탁기관)를 교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영리사업이 아니기에 서울시의 공적 사무를 위탁하고, 사업비와 인건비 등 운영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서울시가 댑니다. 따라서 원청인 서울시가 자신들의 사업이나 정책 방향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운영기관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문제는 원·하청 간접고용 구조에서, 운영주체가 변경될 때 고용과 근로조건이 승계되지 않아 그때마다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사라진 연차와 퇴직금

A는 지난 2023년 8월 이 민간위탁기관에 입사했습니다. 그는 이 기관에서 취약노동자 법률상담 및 권리구제 업무를 합니다. 기간이 별도 언급되지 않은 '정규직'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한 그는, 출근 4개월 만에 자신의 근로계약이 해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다니는 기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해오던 일을 못 하게 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입사 4개월 만에 또 면접을 봐야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다닌 근속기간도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네요."

A가 토로했습니다. 그 역시 하는 일도, 근무지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산 및 관리감독 권한을 쥔 사실상 원청이 서울시인 것도 그대로입니다. 다만, 하청업체 사용자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서울시는 해당 기관 운영주체(하청업체)가 바뀌었으니, 기존 고용계약 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설정하라고 합니다. 결국 A는 입사 4개월 만에 재고용을 위한 심사를 받게 됐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1년도 안 돼 '재고용' 면접을 보게 된 것도 황당하지만, 재고용 되더라도 근속기간이 승계되지 않아 연차휴가나 퇴직금 등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습니다. 기존 적립한 퇴직(연)금도 날아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A는 노무법률 전문가인 노무사입니다.

IT서비스 기획자인 B는 이 민간위탁기관에 정보화사업 담당자로 지난 2020년 입사했습니다. 입사 4년 차인 그는 서울시 노동자 지원기관 정보제공 웹사이트 구축 및 통합관리시스템 개발 업무를 담당합니다.

B는 지난해 발병한 암으로 수술 등 치료를 위해 휴직했으나, 대체인력이 없어 휴직 기간에도 업무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복직 이후에도 항암치료 등 투병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노동자가 그렇듯 몸이 아프다고 해서 일을 그만둘 처지는 못 됩니다. 그는 병가와 연차휴가 등을 활용해 쉬는 날엔 항암치료를 받으며, 먹고살기 위한 노동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재고용이 되더라도 치료받으며 일을 병행하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서울시와 바뀐 하청 사용자가 이전 고용관계에서 발생한 잔여연차를 모두 소진(정산)한 후, 올해부턴 신입직원에게 적용되는 것과 같이 한 달에 1개씩 월차를 부여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근속기간을 승계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입사 1년이 지나면 근속기간에 따라 1년에 15일씩 연차가 생깁니다. 더불어 내부 취업규칙에 따라 3년 이상 근속한 직원은 최초 입사일로부터 2년마다 1일의 연차가 추가로 부여됩니다. 4년을 근속한 저의 경우엔 원래대로라면 17일의 연차휴가가 생기는 것이었죠. 이 연차휴가를 활용해 치료 계획을 세우고 병원에 다녔습니다. 투병하면서도 일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연차휴가와 근속기간 등 근로조건이 승계되지 않으면서,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없어 일상이 엉망이 됐습니다. 새 수탁기관에서 재고용이 되더라도, 이런 근로조건에선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C의 말입니다. 그는 감정노동자를 지원하는 센터에 다니다, 이 민간위탁기관으로 회사가 통폐합됐습니다. 사기업으로 치면, 다니던 회사가 관련 분야 대기업으로 인수합병돼 없어진 것이지요.

"서울시 방침에 따라 통폐합되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기존 근속기간도 인정해 주지 않고 연차휴가나 근로조건을 모두 리셋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일반 사기업에서도 인수합병이 되면 기존 근속기간을 승계해 주는데, 원청은 서울시이고 하청업체는 노동단체인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민간위탁기관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현실
 
입사 5년 차에 같은 회사에서 재면접을 보게 됐습니다.
 입사 5년 차에 같은 회사에서 재면접을 보게 됐습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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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및 근로조건이 노동자의 삶과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민간위탁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조건이 후퇴하며 여러 곤경에 처해있지만, 원/하청으로 나뉜 간접고용의 현실에선 법적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서울시의 지침('서울시 행정사무 민간위탁 관리지침')과 노동부 가이드라인('민간위탁 노동자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 등은 민간위탁기관 운용주체 변경 시 '80% 고용승계'를 명시해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호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 관련 규정은 아예 지켜지지 않거나, 오로지 '80%만 고용'식으로 협소하게 적용됩니다. 즉 A나 B가 처한 상황처럼, 근속기간을 인정하지 않거나 호봉·연차제도 등을 승계하지 않아 근로조건이 실질적으로 후퇴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자 개인의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재고용을 위해 근로조건 후퇴를 감수하던가, 아니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죠. 함께 일한 여러 동료가 금번 기관 통폐합 및 운영주체 변경 과정에서 스스로 회사를 떠났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과정은 노동자들이 만든 게 아닌데, 왜 그 피해는 항상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선택이든, 개인의 결정처럼 보이지만 이를 온전한 의미의 자발적 선택이라 부를 순 없습니다.

태그:#재입사, #민간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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