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는 일본이 대한제국(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사건이다. 이로써 한민족은 35년간 일제의 통치를 받으며 고난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여 한일병합을 이루기까지는 약 40여 년에 걸친 치밀한 준비 기간이 있었다. 무려 518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조선왕조는 어떻게 일본에 그토록 허무하게 멸망하게 되었던 것일까.
 
12월 27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88회에서는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은 X파일, 조선은 어떻게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나'편을 통하여 일제의 조선 침탈 과정을 조명했다.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까지는 6번의 결정적 사건들이 있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1894년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이어진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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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까지 조선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관계를 유지해왔다. 양국은 조선 초기부터 지속된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험악하게 적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수평적인 교린관계를 지켜왔다. 하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관과 외교적 구도가 깨지게 된 것은, 근대화 이후 일본의 급격한 국력 신장과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제국주의의 등장이었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며 자국 군함을 동원하여 조선의 영해에 불법 침입하여 무력 시위를 벌였고, 이를 빌미 삼아 이듬해 조선과 불평등 외교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맺는다.
 
이 조약에는 개항을 명분으로 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을 위한 사전 포석이 곳곳에 깔려있다. 1조에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에는 조선이 오랫동안 사대관계를 맺어온 중국(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속셈이 숨어있다. 또한 4조에서 부산, 인천, 원산 등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의 통상 허가를 보장한 조항은 유사시 일본의 군대가 조선의 수도 한양까지 빠르게 침공할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독소조항은 10조에 '일본 국민이 조선의 항구에서 조선 국민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일본 관리가 심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외국인 일본인이 조선에게 치외법권을 보장받는다는 것으로, 1조에 한일 양국 서로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과도 정면으로 모순되는 조항이었다.

조선은 왜 그토록 얕잡아보던 일본과 이렇게 터무니없이 불평등한 조약을 수락했을까. 조선은 오랜 세월 동안 중국과의 사대교린을 제외하면 외교 경험이 전무했고, 철저한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당시 조선측 협상단에서는 일본이 요구하는 '조약(條約, Treaty, 국제적 합의)'의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오히려 일본 대표에게 되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만큼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이 다루기 쉬운 만만한 상대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노회한 협상전략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원래 조일수호조규의 초안에는 일본의 자국의 천황을 '황제'로 높인 반면 조선의 군주를 '국왕'으로 낮추어 칭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조선이 이를 문제삼아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본은 순순히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문구를 각각 '대일본'과 '대조선국'이라는 용어로 호칭만 수정한다. 이는 조선에게 일본은 언제든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상대라는 오판을 유도했고, 정작 일본은 그틈에 조선에 치명적인 독소조항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불평등한 조약을 성사시켰다.
 
당시 조선은 이 조약이 몰고올 위험성과 복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심지어 임금인 고종은 '나라의 위기를 잘 넘기고 국가의 위신을 지켰다'고 협상단을 칭찬했을 정도니, 조선이 얼마나 외교에 무지하고 무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엄밀히 말해 조일수호조규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강요에 굴복하여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속셈에 조선이 속아넘어간 조약'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후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여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상황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진다. 조선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여 일본 교관에게 근대식 군사훈련을 받은 신식군대를 창설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인들과의 차별대우와 군납비리에 폭발하여 난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임오군란이 남긴 가장 큰 영향은, 외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주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난을 진압한 능력이 없었던 고종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일본 역시 자국민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당시 조선은 조일수호조규의 영향으로 자국의 쌀이 일본에 싼값으로 수출되면서 물가폭등과 생활고가 발생했다. 이는 임오군란 당시 반일감정이 쌓여있던 구식군대가 일본 공사관까지 공격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 임오군란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청나라와 경쟁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일본의 계략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2년 후에는 갑신정변이 발생한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우호적인 온건개화파와, 일본을 모델로 하려는 급진개화파(친일개화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곧바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조선의 한복판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정면으로 대치하는 구도가 벌어진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지원을 철회하며 발을 뺐고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김옥균과 정변세력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은 조선 정부가 요구한 김옥균과 정변세력의 송환을 거부했다. 또한 오히려 갑신정변으로 발생한 일본인과 일본 공사관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적반하장의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10년 후인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다. 무너지는 조선의 지배체제에 반기를 든 농민들은 반외세-반봉건을 기치로 내걸고 혁명을 일으켰다. 갑신정변 이후 합의하에 한동안 조선에서 철군했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이 사건으로 또다시 나란히 조선에 들어오는 빌미가 된다.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거하고 고종의 신병을 확보했다. 일본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방해한 청나라를 물리치고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정의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는 논리로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한 명분을 세웠다.
 
약 9개월간 벌어진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 대륙까지 진출하려는 야욕을 드러냈으나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독일)'으로 유럽 열강 등이 개입하면서 일단 한 발 물러서야 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의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청나라가 쇠퇴한 이후 조선에서 일본을 견제할 대항마로 떠오른 것은 러시아였다.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을 통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인하자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 노선을 통하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위협을 느낀 일본은 조선의 친러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본보기로 명성황후를 암살하여 국면을 전환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은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명성황후의 시해가 자신들이 아닌 조선 내부의 알력다툼으로 벌어진 일로 포장하려는 교활한 술책을 꾸몄다.이를 위하여 명성황후의 최대 정적이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포섭하여 시해 현장에 데려가서 주동자로 몰고가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의도를 눈치챈 대원군도 강력하게 저항하며 시간이 지체됐다. 또한 당시 영국 영사 힐리어 보고서 등을 통하여 현장을 목격한 서양의 외교관들에 의하여 을미사변의 잔혹한 진실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4개월 후,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다. 이후 고종은 1년 뒤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자주국을 선포하여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고종의 근대화 개혁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마저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물러나면서 일본의 위협은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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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승리로 기세등등해진 일본은 '우리가 대신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의 독립을 지켜줬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고종을 협박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 을사늑약을 맺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에 모든 교섭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이제 국제사회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바람앞의 등불 신세로 전락하며, 사실상 이때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2년 뒤인 1907년에는 고종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당했다. 그 뒤를 이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재위 3년 만인 1910년 8월 22일 일본과 친일파 세력의 강요에 못이겨 '한일병합조약' 문서에 서명한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518년 역사가 끝나고 일제강점기의 암흑기로 접어드는 경술국치의 순간이었다.
 
한일병합은 체결된 지 1주일 만인 29일에야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일본이 굳이 조약을 늦게 발표한 데는 5년 전 을사늑약 당시 조선인들의 거센 저항을 겪어본 학습효과에서 비롯됐다. 일본은 한일병합 소식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전에 수도 한양에 대규모의 경찰과 헌병을 포진시켰고 항일인사로 거론된 인물 수천명을 사전에 체포하여 혹시 모를 반발을 철저히 차단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조선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나라를 빼앗기는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당시 일본인 기자조차 한일병합 직후 침묵에 휩싸인 한양의 거리 풍경을 지켜보며 '기이한 느낌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의 도쿄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고 일본의 천황은 "한일병합은 일본 제국 최고의 성과이며 일생일대의 업적"이라며 자화자찬하여 대조를 이뤘다.
 
조일수호조규에서 시작되어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어버리기까지의 시간은 불과 34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한민족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까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의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물론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리는 치욕을 당하게 된 데에는 우리 스스로부터 제대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고 준비하지 못하여 자초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침략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픈 역사를 힘들어도 계속해서 똑바로 마주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벌거벗은한국사 경술국치 조일수호조규 을미사변 한일병합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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