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31 17:21최종 업데이트 23.12.3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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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편집자말]

조지프 라이트, <코린토스의 처녀> 1782~1784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워싱턴국립미술관 ⓒ 조지프 라이트


그림은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됐을까? 영국의 화가 조지프 라이트(Joseph Wright, 1734~1797)가 그린 <코린토스의 처녀>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의 항구도시 코린토스. 젊은 연인이 밤을 지새우는 중이다.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울 것이다. 해가 뜨면 남성은 전쟁터로 가기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를 일. 이때 여성의 시선이 벽에 꽂혔다. 그곳에 호롱불 덕분에 생긴 남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녀는 연인의 자취라도 붙잡고 싶은 절실한 마음을 담아, 벽 위에 그림자 윤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바로, 백과사전의 시초라 할 <박물지>를 저술한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Plinius, 23/24~79)가 설명하는 '회화의 기원'이다.
 
이처럼 회화의 첫 시작에는 여성이 있었다. 하지만 의아한 일이다. 우리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유명하고 위대한 미술가의 이름을 지금 당장 떠올려보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네, 마네, 피카소, 미켈란젤로, 빈센트 반 고흐.... 자, 이들의 공통점이 보이는가? 그렇다. 바로 '여자가 아니다'.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의 반은 여성인데, 왜 이제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배워온 위대한 예술가는 왜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남자일까. 설마 여성 화가가 남성 화가들에 비해 열등하고 예술적 재능이 부족해서였을까?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공예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1971년 <아트뉴스> 잡지에 이 같은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노클린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여성에게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교육의 제약을 꼽고 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서양의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역사화를 최고의 장르로 쳤다. 미술 장르 중 가장 우월한 '그랜드 장르'로 일컬어진 것이다. 이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필수였고, 그러려면 인체의 형태를 해부학적으로 정확히 그리는 데 필요한 누드 드로잉 수업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여성은 누드 드로잉이라는 중요한 수업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됐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누드모델이 될 수는 있어도 누드모델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금지당했다. 즉 처음부터 남성과 동등한 미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던 셈이다.

결국 여성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랜드 장르'가 아닌 자수 같은 공예 분야에서만 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노클린이 찾아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의 답이었다.
 
그랬다. 오랫동안 공예는 '여성의 예술'이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방적, 직조, 바느질은 여성이 하는 가사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었다. 그리고 사회는 이를 적극 장려했다. 성경 잠언 3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훌륭한 아내는 양모와 아마를 구해다가 제 손으로 즐거이 일하고(...)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이탈리아의 품행 지침서는 아예 "자수가 귀족 여성들의 한가한 시간을 메워주고, 그럼으로써 순결을 지켜주고 여성스러움을 고양한다"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성'에게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역사화와 달리, 공예는 '진짜 예술'로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 서양 예술계는 미술의 형식을 고급 미술인 순수미술(Fine arts)과 저급 미술인 공예(Craft)로 뚜렷하게 나누었다.

이 미학적인 위계질서를 나눈 기준은 바로 실용성. 실용적 기능과 무관하며 그 자체가 목적인 순수미술이야말로 '진짜 예술'이고, 공방의 장인들과 여성이 만드는 공예는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것이라고 여겨온 것이다.
 
사실 18세기 사람인 조지프 라이트가 뜬금없이 '고릿적 얘기'인 <코린토스의 처녀>를 그리게 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이 그림은 영국의 대표적인 도자기 브랜드 '웨지우드'의 창업자인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 1730~1795)가 1778년에 '울분'을 담아 작정하고 특별 주문한 것. 이유가 있다.

웨지우드는 14살 도공으로 시작해 29살에 자신의 공장을 차리고 유명한 장식예술제조업자가 된 '도자계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그는 이 성공을 바탕으로 로버트 애덤 등 당대 최고의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가들에게 "건물 장식할 때 자신의 도자 기술을 써 보시라"고 자신만만하게 제안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바로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미국의 미술사학자 앤 버밍엄(Ann Bermingham)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건축가들의 거부는 '예술가'인 양하는 그들의 허세가 점점 심해진 것, 그리고 '그릇'을 제조하는 업자를 지지하면 신고전주의적 취미를 통속화하고 심지어 여성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경계심이 함께 커진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도자와 같은 공예는 여성적인 것이며, 예술도 아니었기에 함께 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웨지우드는 '건축 예술가들'에게 이 같은 수모를 당한 직후에 <코린토스의 처녀>를 주문했다. '회화의 기원'에는 중요한 뒷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도공이었던 코린토스 처녀의 아버지가 딸의 그림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테두리 안에 점토를 채운 뒤 불에 구워 테라코타 부조를 만들었다는 것.

웨지우드는 이 이야기를 통해 회화가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에 도자기를 만드는 수공예인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어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공예도 '예술'이며 공예가 역시 '예술가'라는 걸 주장했던 셈이다. 

대한제국 시절, 자수 병풍을 만든 남성
 

안제민, <화조도 10폭 자수 병풍> 20세기 초, 비단에 자수,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 안제민

 
웨지우드의 숙원은 재미있게도 한 세기가 지난 후, 그것도 멀리 떨어진 조선 땅에서 이뤄졌다. 20세기 초 조선의 평안도에서 제작된 <화조도 10폭 자수 병풍>을 보자.

단아한 중간색으로 염색한 뒤 꼬아 만든 실로 병풍 위에 꽃과 새를 수 놓은 '공예 작품'이다. 그런데 병풍 한 켠에 있는 낙관이 눈에 띈다. 패남수사안제민(浿南繡師安濟珉). '패남(평안남도)의 자수사 안제민'이라며 수 놓은 사람의 이름과 인장을 남긴 것이다.
 
화조도는 조선 시대 자수 병풍의 단골 소재로 오랫동안 많이 생산되어왔지만, 이제껏 자수 놓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경우는 없었다. 왜였을까. 사실 그전에는 자수를 놓는 사람보다 화가가 우월하다는 암묵적 위계가 있었다. 자수사는 한 명의 예술가라기보다는 기술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제민은 자신의 이름을 새김으로써 이 위계 밖으로 과감히 탈피했다. 자수장인들의 높아진 자의식과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상황이 갑자기 달라진 걸까.
 

<화조도 10폭 자수 병풍> 낙관 부분. ‘패남수사안제민’이라고 수 놓여져 있다. ⓒ 안제민

 
김수진 성균관대 교수는 책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실 조선 시대 민간과 왕실에서 자수는 주로 여성이 전담해왔으며, 그동안 안방 장식 등 여성의 공간을 꾸미는 데 자주 쓰였다. 즉 자수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동안 가치가 폄하되어왔던 것.

그런데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자수의 운명은 돌연 바뀌게 된다. 전제군주제 국가로 새로 출발하면서 나라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참신한 장식물이 필요했는데, 이때 회화가 아닌 자수 병풍이 새 장식물로 선택된 것이다. 마침 새로 생긴 철도를 이용해 경성의 황실은 평안도에서 제작된 자수를 비싼 값을 치르며 운반해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자수의 경제적 가치 역시 부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전에는 존재감이 희미했을 평안도의 평범한 자수사 안제민은,  <화조도 10폭 자수 병풍> 속에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레 적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으면서 그는 이처럼 귀중한 자수 병풍을 만드는 장인 역시 화가 못지않은 예술가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때,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안제민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것. 안제민이 활동했던 평안도 안주 지역의 자수장인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에 따르면 평안도 안주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길드, 중국 강소성의 소수, 호남성의 상수, 광동성의 월수, 사천성의 촉수 등에는 남성 장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자수 산업의 부흥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즉 "자수가 상품 경제성을 확보했던 시기만큼은 남녀의 젠더와 무관하게 혹은 남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사실 여성의 일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아졌을 때 갑자기 남성의 세계로 편입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마치 이제까지 세상 밥은 여자가 다 했는데, 남자가 요리를 하니 갑자기 '셰프'라는 권위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바늘을 들고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며 묵묵히 그 많던 태피스트리를 짜고, 퀼트 이불을 만들고, 병풍에 수를 놓았던 '이름 없는 여성들'을 떠올려본다. 그러므로 린다 노클린이 제기한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은 틀렸다. 역사에는 늘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있었다'.

이제 '그녀는 왜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는가'로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우리는 이것을 집요하게 캐물어야 할 것이다.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닌지를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위대한'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그걸 호명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린다 노클린 지음, 이주은 옮김, 아트북스, 2021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 김수진 외 지음, 혜화1117, 2023
<예술의 발명>, 래리 샤이너 지음, 조주연 옮김, 바다출판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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