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코코슈카, <2인초상(올다와 코코슈카)>1966년, 캔버스에 유채, Oskar Kokoschka / ProLitteris, Zurich - SACK, Seoul, 2024
ProLitteris, Zurich - SACK, Seoul, 2024
이별의 후유증은 길고 오래갔다. 코코슈카는 제목 그대로 자신의 애끊는 심정을 담은 <코코슈카의 내장으로 실을 잣는 알마 말러>라는 그림을 그리고, 알마와 오스카라는 이름을 순서만 바꾼 <알로스 마카르(Allos Makar)>라는 시도 지었다. 심지어 알마와 똑닮은 실물 크기 인형을 주문해 극장에 동행하는 등 자나깨나 함께 하기도 했다. 드디어 코코슈카가 사랑 때문에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랬다. 코코슈카 스스로도 자신이 미친 사랑 속에서 산화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사랑과 계절의 공통점은 또 있다는 것. 바로 한 계절과 사랑이 지나가면, 새로운 계절과 사랑이 또 찾아온다는 점이다. 코코슈카에게도 새로운 계절이 왔다.
독일의 나치 정권에 항의하는데 열을 올렸던 코코슈카는 결국 나치에게 '퇴폐작가'로 찍혀 1934년에 체코 프라하로 이주하게 된다. 반 나치작가로 이미 프라하에서 유명했던 코코슈카는 어느 날 그의 예술을 흠모하던 변호사이자 예술 감정가인 팔코프스카에게서 저녁식사 초대를 받는다. 그렇게 흔쾌히 팔코프스카의 집에 갔다가, 그의 딸 올다 팔코프스카(Olda Palkovská)을 만나게 된다.
올다는 코코슈카보다 29살이나 어렸지만,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코코슈카를 오직 화가로서 존경했을 뿐 사윗감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팔코프스카 부부의 극심한 반대가 이어졌다.
아마 올가에게 코코슈카와 알마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말들도 쇄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코코슈카는 주저했지만, 올가의 사랑은 확고했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위험한 사랑에 맹목적으로 뛰어드는 올가에게서 코코슈카는 자신의 옛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둘의 사랑은 평화와 안정을 주었다. 나치의 핍박에 지쳐있던 코코슈카에게 올가는 푸딩과 초콜릿 파이를 정성껏 요리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둘은 매일 저녁 영화관으로 데이트를 나갔고, 함께 좋아하는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며 산책했다. 그렇게 사랑을 쌓아온 그들은 1941년 드디어 결혼한다.
코코슈카는 올가의 사랑 덕분에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랑이란 자신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뿐인 존재라 생각했는데, 그 사랑이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그 증거가 여기 있다. 코코슈카는 1966년 또다른 <2인 초상>을 그린다. 아내 올다와 함께 한 코코슈카의 모습이다. 알마와 함께 했던 <2인 초상>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두 손을 모은 채 흐뭇한 모습으로 아내를 본다. 원 없이 사랑해 본 사람 특유의 여유를,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서 엿봤다면 과한 말일까. 올다 역시 편안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그림이 완성된 1966년은 그들이 스위스 제네바 호수 옆에 평생 소망해왔던 집을 마련해 존경받으며 평화롭게 살았던 때였다. 그림에서도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자신감 덕분이었을까. 코코슈카는 성숙한 태도로 알마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낸다. "사랑하는 알마, 당신은 여전히 길들지 않은 나의 야생동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한 추신을 덧붙였다.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그러나 알마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코코슈카는 나와 헤어진 후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둘은 한때 공인된 연인이었지만, 사랑을 '제대로' 한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이원진의 노래를 다시 들으며 나는 이 노래의 제목이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아닌 것을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나는 항상 능동적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는 운명의 손에 붙잡혀 '시작되는' 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되는 사랑 앞에서 우리가 애써 '쿨함'을 연기하는 것도, 사실은 주체성을 찾기 위한 애처로운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사랑 앞에서 자주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능동적인 태도로 사랑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소설가 공지영이 말했던가.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라고. 비장하게 상처받기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랑이 내게 가할 수 있는 슬픔에 항복하듯 '수용'하는 것. 그리하여 코코슈카가 그랬듯, 사랑이 주는 고통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길어낼 수 있었던 단단함으로 생을 다시 한번 으스러지게 껴안아 보는 것. 그것이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 속 수수께끼 같던 가사가 전하는 해답일 것이다. "뜻 모를 그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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