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물가에 한 그루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송정(松汀)'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한 아이가 큰 울음을 터뜨리고 태어났다. 1949년 2월 25일 태어난 이 아이를 부모는 '나병식'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집짓는 목수였다. 아버지가 집을 지으면 온 가족이 함께 땀을 흘렸다. 자식들은 하루 종일 서까래를 깎았고, 벽돌을 찍었다. 어머니는 송정리 역전에서 김밥을 팔았다. 머리에 인 다라이가 좌판의 전부였다. 기차가 오면 줄달음을 쳐 과일을 팔기도 했다.

외갓집은 부자였다. 외가에 가면 소년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송정리에서 영산포까지 100리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숨이 차도록 먹어 어지러울 정도였다.

한 소년이 가만히 전봇대를 붙들고 서 있었다. 당시 송정리엔 무연탄을 실어 나르는 열차가 오고 갔다. 병식은 동네 아이들을 따라 무연탄을 훔쳤다. 아버지는 도둑놈 새끼를 키울 수 없다고 아들에게 매질을 하였다. 병식은 말없이 맞았다.

병식은 공부를 좋아했으나 호롱불 기름이 없어 책을 볼 수 없었다. 그러고도 서중학교에 합격했다. 중학생이 되고서부터 과외 선생을 했다. 재워주고 먹여주는 입주 과외였다. 어느 날, 병식은 밀가루 포대를 업고 집으로 왔다. 찐빵을 만들어 온 가족이 먹었다.

그 선생의 그 제자
 
1973년 10월 2일 데모로 구속됐다가 출소한 날. 정문화, 김병곤, 강영원 등과 함께.
 1973년 10월 2일 데모로 구속됐다가 출소한 날. 정문화, 김병곤, 강영원 등과 함께.
ⓒ 황광우

관련사진보기

 
광주일고에는 제자들과 영혼의 몸싸움을 하는 교사가 있었다. 김용근 선생. 독립운동으로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른 선생은 호통을 쳤다. "느그들은 학생탑을 쳐다 볼 자격도 없는 놈들이여." 학생탑의 비문은 김용근 선생의 외침만큼이나 나병식의 땅을 단단하게 다졌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의 장서는 가난한 소년에게 영혼의 궁전이었다.
  
책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행동하는 청년이었다. 거리로 나가 "독재정권 물러가라"를 외쳤다. 3년 내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교정 잔디밭에서 술자리가 벌어지면, 주조장에서 막걸리를 박스로 사 온 이가 병식이었다.

병식은 판검사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일로 아버지와 싸워야했다. 일신의 출세를 사절하고 시대의 요청에 젊음을 바친 김용근 선생, 그 선생의 그 제자였다.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교양 과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시했다. '후진국사회연구회'가 그의 대학이었다. 청계천 빈민의 실태를 조사했다. 여름이면 농촌활동을 하였고, 겨울에는 공장활동을 했다.

병식은 친구의 집에 갔다가 서재에 가득 찬 책들을 보고 놀랐다. "너는 뭐 이렇게 책이 많냐?" 서울 친구의 유복한 환경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나병식은 책에서 정신의 신세계를 발견했다.

마르쿠제의 <이성과 우상>에 열광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화려한 궁전을 처음 구경한 것이다. 부정의 사유, 변증법적 사유 등를 익혔다. 하지만 세계를 변혁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마르크스를 만나기 이전부터 심장에서 맥동쳤다. 병식은 오직 세상의 변화만을 꿈꾸었고, 잡스런 생각이 없는 청년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열흘 뒤 헌법을 바꾸었다. 독재자의 헌법 개정은 초가집 지붕 뜯는 것보다 쉬웠다. 유신헌법은 거대한 얼음이 돼 세상을 덮쳤다. 얼음장 아래에서 모두 흐느껴 울 뿐이었다.

투쟁에 나서지 못하면서 도리어 자신의 비겁을 정당화하는 자들이 있었다. 역량을 보존해야 한다느니, 장기적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느니 목전의 투쟁을 기피하는 쥐 같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사각거림은 나병식을 고립시켰다.

"나병식은 날뛰는 놈이니 조심해야 한다." 독재체제에 조그만 구멍이라도 내자고 주장했지만, 병식의 주장은 선배들로부터 치기어린 짓으로 치부되었다. 나병식은 굵은 눈물을 흘렸다.

불이야, 도서관에 불이났다
 
1973년,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1973년,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 황광우

관련사진보기

  
1973년 9월 초, 문리대 유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9월 12일 다시 모였다. 그 시절 데모는 투옥을 의미했다. 이때 겁 없는 2학년들이 나섰다. 이해찬과 정동영이었다. 동원을 맡겠다는 것이다.

4학년도 나섰다. 정문화와 이근성이었다. 그들은 선언문을 맡았다. 3학년도 나섰다. 도종수와 황인성이 나섰다. 시위 진행을 맡았다. 마침내 10·2 문리대 시위가 성사되었다.
    
"불이야, 도서관에 불이 났다"는 외침으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국의 비상함을 알리는 거짓말이었다. 이어 누군가 "모이자 4·19탑으로"를 외쳤다. 학생들은 우르르 모였다. 전교생이 다 쏟아져 나왔다.

"보라! 민중을 수탈하여 살찐 불의의 무리가 홀로 포식하며 오만 무례하게 거드럭거리고 있다." 정문화는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보라! 권력을 쥔 부정의 무리가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의 몸 위에 무시무시한 정보통치의 쇠사슬을 씌우고 있다." 명쾌한 고발이었고, 당당한 선언이었다.
     
일파만파(一波萬波)는 1973년 10·2 문리대 시위를 두고 만들어진 사자성어였을까? 서울대 법대생들이 시위에 들어갔다. 정의의 종을 난타하였다. 10월 4일 법대 데모에 이어, 5일엔 상대가 데모하였다. 한 달 후 11월 5일 경북대가 데모에 들어갔고, 11월 12일 이화여대생 4000명이 모였다.

치마를 잘라 검은 리본을 달았다. 10·2 문리대 시위의 일파는 12월 24일,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만파로 번졌다. 12월 29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로 권력을 유지한 그는 긴급조치로 죽었다.
 
4월19일, 교문을 나선 서울 문리대학생들이 동대문서앞 방어선에서 경찰과 대치해 있다.
 4월19일, 교문을 나선 서울 문리대학생들이 동대문서앞 방어선에서 경찰과 대치해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풀빛'처럼 살다 간 사람

2023년 11월 29일 오후 2시, 홍대 근처에서 <나병식평전>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청중들에게 넙죽 절을 하고선 마이크를 잡은 이가 있었다. 그는 나병식이 감옥 안에서 고기 수육을 먹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김재술이다. 교도관 김재술은 1976년 여름 서울구치소에서 나병식을 만난다. 나병식은 물었다. "담당님,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김재술은 답했다. "1949년생입니다." 나병식은 제안했다. "그래요. 우리 친구합시다." 그렇게 교도관과 죄수는 친구가 되었다.

옥중에서 나온 청년 나병식은 먹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다. 마늘장사, 수박장사, 튀김 장사,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1977년엔 와이셔츠 가게를 열었고, 1979년엔 풀빛출판사를 세웠다. 신혼의 아내 김순진과 함께 망원동 지하방에서 살았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 지하방에서 신랑과 신부는 원고를 교정하였다.

1987년 2월 12일, 나병식은 또 연행되었다. 그러니까 1월 14일 박종철을 죽인 그 정권이 한 달 후, 나병식을 연행한 것이다. 그들은 풀빛출판사가 발행한 <한국민중사>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구속하였다. 이리하여 나병식은 그가 흠모하는 박형규 목사님과 나란히 사성장군의 반열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형님, 풀빛입니다"라고 전화를 걸었던 나병식, 그는 왜 풀빛을 좋아했을까? "이 비 그치면/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고 어느 시인이 노래하였다. 나병식의 풀빛은 한 세상 '풀빛'처럼 살겠다는 그의 서원이지 않았을까?

"있잖아, 있잖아." 거구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서울 말투를 썼던 전라도 촌놈, 나병식은 끝내 자신의 한을 침묵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년이 지난 오늘에야 나는 그의 묵언을 새삼 발견한다.

언젠가 아들이 물었다. "아빠, 왜 그렇게 걸었어요?" "배가 고픈 걸 잊어버리려고 부지런히 걸었시야." 이게 무슨 역설인가? 힘들 때 나병식은 콧노래를 불렀다. 고난에 대한 나병식의 전략은 침묵 그리고 흥얼거림이었다. 가슴에 한이 깊은 자, 그는 민중이었다.

세 자녀 힘찬, 빛나, 슬기를 남기고 2013년 12월 20일, 영면에 들어갔다. "인간답게 살려면 출세욕을 버려야 한다. 인간은 용감한 행위를 하면서 용감해진다"고 말한 나병식, 그는 한 평생 독재정권과 싸우다 간 '20세기의 임꺽정'이 아닌가?  
 
<나병식평전> 출판기념회
 <나병식평전> 출판기념회
ⓒ 황광우

관련사진보기

 

태그:#나병식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