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4일간의 임시휴전에 합의한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당한 가자지구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이날 양측에 억류된 인질과 수감자들을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일시 휴전에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4일간의 임시휴전에 합의한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당한 가자지구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이날 양측에 억류된 인질과 수감자들을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일시 휴전에 들어갔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2023년 한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필자의 뇌리에 남는 2023년의 기억은 국내 문제를 제외한다면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 이스라엘간의 중동 전쟁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의 변화와 또 한편으로 챗지피티로 대변되는 기술의 변화이다. 어떻게 보면, 한쪽이 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면, 또 한편은 인류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다. 공교롭게도 국내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긍정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호모사피엔스>(2011)의 문구가 새삼 떠오른다. 인류는 이제 과학기술로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다고 했던가? 안타깝게도 기술 유토피아를 꿈꾼 학자의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필자가 어려서 즐겨본 무협만화 세계관에서도 인류는 무공만 터득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손가락을 튕겨 벽을 뚫거나 주먹 한번 휘둘러 수만 명을 살상하며, 무슨 무공인가만 터득하면 오늘날의 드론이나 핵기술에 버금가는 능력을 인간이 보유할 수 있다. 그런데 무협만화 세계관에서 무공만 익히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데도 무협만화 세계관의 인류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의 인류가 과학기술만을 외치며 이를 갈고 닦듯이 무협만화 세계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으라고 무슨 무공이나 검법을 갈고 닦는다. 필자가 실제로 이 무협만화 세계관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면, 필자는 우선 그들에게 검법이나 무공을 갈고 닦을 시간에 좀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인류가 과학기술 앞에 무한 경배를 바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서구의 경우는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신이 그 권능을 대폭 과학기술에 이양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어서가 아니라 과학이기 때문이라고 생각 한다. 대략 100년 전쯤에 공산주의자는 인류에게 지상낙원을 약속하였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본주의자 또는 일명 자유 진영도 뒤질세라 지상낙원을 약속하였다. 양측이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이들은 공통으로 과학과 기술에 역사 발전의 중임을 맡겼다. 양자 모두 유럽의 중세와는 초격차가 나는 새로운 '모더니티(modernity, 근대 또는 현대로 번역 됨)'를 기획하였고 그 주요 방법론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꾼 지 얼추 100년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100년이 흐른 지금 챗지피티나 생명공학이 인간을 넘어 신의 경지에 이른 듯이 자화자찬함에도 챗지피티나 생명공학은 우크라이나에서 중동으로 이어지는 전쟁에 치료책이든 해결책이든 이렇다할 묘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첨단생명공학 기술, 드론, 휴대전화, 인터넷이 참혹한 전쟁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더니티'의 정밀한 군사기술로 정교한 타격을 한다지만, 이 두 전쟁에서 여전히 힘없는 어린아이와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100년 동안의 야만성: 돼지 꼬리 달린 인간
  
지금은 잊힌 소설이지만 콜롬비아에는 <백년 동안의 고독>(1963)이라는 재미있는 소설이 있었다. 이 풍자 가득한 소설은 마콘도(Macondo)라는 마을에서 과학과 문명을 추구하던 한 집안이 100년 만에 돼지 꼬리 달린 아이를 낳음으로써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는다. 대체로 문학 비평가들은 이 소설의 작가가 라틴아메리카, 또는 콜롬비아의 역사, 왜곡된 현대사를 꼬집는다고 지적한다. 마꼰도 마을의 부엔디아(Buendía) 가문의 무기력함이 코로나 팬데믹, 2022년, 2023년 우크라이나, 중동전쟁을 맞는 인류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콜롬비아나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돼지 꼬리 달린 인간의 탄생으로 비꼬는 작가의 시선은 받아들이고자 한다. 마꼰도의 온 마을을 들뜨게 했던 자석, 망원경, 돋보기, 인공얼음으로 대변되는 과학 문명은 마꼰도 마을의 몰락과 돼지 꼬리 달린 아이의 탄생을 막지 못하였다.
 
얼마 전에 KBS 교양 프로그램 <이슈 PICK 쌤과 함께>에서 기후 경제학자가 나와 결국 SMR과 같은 기술이 기후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내다 보았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기술 낙관론이 주춤하더니 코로나가 꺾이자 은근슬쩍 기술 낙관론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여기에 정계의 입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여야는 물론이고 국민 모두, 필자 자신도, 힘 안 들이고 기후 위기와 우리 시대의 모든 위기를 기술로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923년부터 2023년까지의 100 년 간의 인류 역사를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면 인류가 스스로 눈부시다고 믿는 업적들 외에 치명적인 수많은 과오들이 보인다. 특히 국제 정세는 계속 열약해서 '원시적', '야만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모 TV 광고에서 저글링 장면을 보여주면서 저글링을 저 단계까지 하기를 위한 노력과 시간을 다른 데 투자했으면 그 사람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광고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류가 과학기술에 투자한 노력과 시간을 국제 정세 개선에 조금이라도 투자했다면 인류나 지구의 모습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물론 필자가 국제 정세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 제일 먼저 머리를 가로저을 사람들은 국제 정치를 하는 학자들일 것이다. 필자는 국제정치학자가 아니어서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에서 'Nothing is impossible'을 선언한 인류가 국제 정세의 해결에서는 'impossible'을 단언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신유물론자이자 환경론자인 브루노 라투르는 작고하기 전 <녹색 계급의 출현>(2022) 이란 책을 내었다. 쉽게 말해 녹색 계급이 투쟁하여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다. 환경론자가 오죽이나 급했으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을 끄집어냈는가 하는 생각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러나 100여 년 전에 성립된 약육강식의 '야만적' 국제질서를 21세기에도 끌고 가는 한, 기후 위기는 물론 국제 정치, 경제, 그리고 거기에 맞물려 있는 국내 정치, 경제, 그리고 거기에 맞물려 있는 개인의 행복은 요원하다. 다행히 국내의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또는 전 세계의 진보, 보수, 이슬람 국가, 기타 정파든 종파든, 국제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데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물론 국제 정치의 바른 해결은 인류가 챗지피티와 생명공학을 합쳐 새로운 인공 인류를 창조하는 것보다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가 100년 동안의 '야만성'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으로 인공 인류를 창조해 보아야 그 인공 인류에게도 돼지 꼬리가 달려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저마다 전설의 마법사 멀린도 놀라 자빠질 장비를 하나씩 차고 다니면서 살기 어렵다고 외치는 인류에게 정작 결여된 것은 기술보다는 양심이나 의지일게다.

덧붙이는 글 | 한국경제법률신문에도 실릴예정입니다.


태그:#중동전쟁, #쳇지피티, #백년동안의고독, #우크라이나, #러시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멕시코 국립대 중남미 지역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상기 대학 스페인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