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4년 1월 5일까지 한 달 반만 근무하면 42년 일했던 직장을 떠난다.
 24년 1월 5일까지 한 달 반만 근무하면 42년 일했던 직장을 떠난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며칠 전 내린 가을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가을에 내리는 비는 유난히 사람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11월 중순쯤이면 온산이 단풍으로 물들어 화려한 나들이가 한창일 때인데 올해는 나뭇잎에 물도 들기 전에 말라 떨어지고 색깔 또한 곱지 않다. 가을 풍경 감상할 틈도 없이 그동안 활짝 열어젖혔던 문이라는 문은 다 닫고 따뜻한 곳을 찾는 시기가 돼 버렸다. 옷장 문을 열어 미처 걸치지 못한 가을옷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 한쪽으로 밀쳤다. 겨울이 손에 잡힌다.

24년 1월 5일까지 한 달 반만 근무하면 42년 일했던 직장을 떠난다. 멀기만 한 일이라 여겼는데 세월은 한 치 오차도 없이 부지런히 달려 마지막 지점에 데려다 놓았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벌써'와 '어느새', '빨리'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오랫동안 일했던 곳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쉬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한시라도 빨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내게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는데도 이제는 홀가분해지고 싶다. 그 오랜 시간도 용케 견뎠으면서 역설적이게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을 참지 못하고 조급해한다.

쉰다섯이 넘으니 학교에 내 또래 교사가 별로 남지 않았다. 다들 명예퇴직하고 구성원 대부분이 젊은 친구들뿐이었다. 옮기는 곳마다 마음을 나눌 동료가 없어 혼자 외로웠다. 수업 시간 애들과 말한 것이 전부인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혼자 있는 게 익숙해졌다.

지금 학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내 아들딸 나이대인 30대 초반부터 40대로 세대차가 많이 난다. 교장인 친구가 없었으면 마지막 근무지에서도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같이 놀 친구가 없어 학교를 그만둔다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다. 후배들도 다들 깍듯이 잘하지만 세대 간 거리를 좁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내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사사로운 것에서 자유롭고 싶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세월... 내 할 일은 모두 끝난다

10월 말, 24년 2월 퇴직 교원 재직 기간을 산정해 보내라는 공문이 왔다. 훈장 때문인 모양이다. 후배 교감 선생님이 40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는 황조근정훈장을 준다며 명예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동안은 그냥 구리로 만든 메달 하나 준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이 퇴직 때 받은 것도 눈여겨보지 않고 서랍에 넣어 두었다. 나처럼 40년 넘게 근무한 사람이 많지 않다며 다른 어떤 것보다 값진 훈장이니 소중히 간직하라고 해 웃고 말았다.

훈장이 궁금해 자료를 검색했더니 의외로 의외로 종류가 많았다. 그중 공무원에게 주는 근정훈장은 재직 연수를 기준으로 1등급에서 5등급으로 나뉘었다. 특히 교육공무원은 계급을 정하지 않고 근속 연수에 따라 2~5등급으로 훈격을 결정해 청조(교육 공무원은 해당 없음), 황조(40년 이상 근무), 홍조(39~38년), 녹조(37~36년), 옥조(35~33년) 순으로 정해져 있었다. 긴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나가든지 아니면 사건에 휘말려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교실에 혼자 앉아 지나온 시간을 돌아봤다. 힘들었던 일들이 먼저 스친다. 아기 맡길 곳이 없어 절망스러웠던 일,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두고 눈물 흘리며 출근했던 일(예전에는 조퇴나 연가를 쓸 생각도 못 함), 통근 버스 놓치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20분 거리를 죽어라 뛰던 일, 밤새 아이 돌보느라 잠이 부족해 학교에 가서 졸던 일 등 그저 동동거리며 살았던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픈 세월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서 빨리 시간이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웃으며 과거를 돌아보는 때가 오긴 한다. 어쨌든 42년 세월에는 내 억척스러운 땀방울과 우리 세 아이의 갈증, 외로움이 배어 있다 생각하니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것이 울컥하고 올라온다. 가벼운 메달이 아니라 젊은 날 고독이 덕지덕지 붙은 영광의 훈장이다. 그래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 도움이 없었으면 이런 일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이제 서서히 얼마 남지 않은 정년을 준비하려 한다. 그래도 아직은 수업도 남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글쓰기 동아리 아이들 문집과 1학년 여학생 한글 지도도 마무리해야 한다. 원고는 다 받았으니 교정해서 출판사에 넘기면 되고, 1학년 아이도 이제 받침을 배우고 있으니 겨울방학 들어가기 전까지 웬만한 글자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 할 일은 모두 끝난다. 24년 2월 고독한 훈장 받을 일만 남았다. 그날을 기대한다.

태그:#정년퇴직, #아쉬움, #훈장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초등학교 수석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사연을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