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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3일 일제 식민통치기구였던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 경찰들을 다수 사살하여 일제를 놀라게 했던 광복군총영의 '평남도청 투탄 의거'.

문일민, 오동진, 박태열, 장덕진, 안경신, 권기옥, 김예진, 여행렬, 표영준 등 국립서울현충원에는 당시 의거의 주역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거사에 참여했던 인원들 중 '유일하게' 우덕선 지사의 위패만이 모셔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봉안을 요청하여 올가을에야 비로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우덕선 지사의 위패가 모셔진 사실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관련 기사 : 드디어 현충원에 위패 봉안된 독립운동가... 기사 한 줄 없었다 https://omn.kr/25v57).

이로써 당시 거사에 가담했던 동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아뿔싸. 기사가 나간 직후 한 분이 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유성삼(劉成三)'입니다.

의용단원 유성삼

유성삼 지사는 평안남도 강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의용단(義勇團) 소속으로 광복군총영 평양 폭탄대와 함께 평남도청·평양부청·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평양 거사'에 참여했습니다.

의열단은 익숙하지만 의용단은 아마 많이들 생소하실 겁니다. 의용단은 1920년 초 안창호, 김구, 손정도, 김철, 김립, 윤현진, 김순애 등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 일부 인사들이 조직한 단체입니다.

일제와의 독립전쟁이 발발할 경우, 전투에 참가할 독립군의 '예비 전력' 확보 목적으로 조직됐으나, 평시에는 의열투쟁이나 군자금 모집과 같은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습니다.

<의용단 장정> 제2조에 의하면 "본 단은 조국의 광복에 희생의 정신으로 정부의 뜻에 따라 아래에 열기하는 운동에 진력하며 적과 전쟁행위를 할 때는 독립군으로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래에 열기하는 운동이란 다음 10가지를 말합니다.

1. 포고문 혹은 권설(勸說)로 국민을 고취하여 적개심을 격발시키며 지구력을 가지게 하는 것
2. 정부 기관을 보좌하여 재정 및 이외의 사무를 원조하는 것
3. 국민에게 개병주의와 개납주의를 고취하는 것
4. 권고 및 그 외의 방법에 의해 총독부에 속하는 관공리를 퇴직시키는 것
5. 적의 관청에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운동을 하는 것
6. 일본의 화저제(貨抵制)를 장려하는 것
7. 군무부에 연락을 취해 가능한 방법으로 군사상 실제 방편을 획책 또는 준비하는 것
8. 임시정부 공보 및 기관지의 전포(傳布)를 보편화하는 것
9. 본 단과 주의가 같은 다른 단체와 서로 협화, 원조하는 것
10. 정부의 명령 또는 지휘가 있을 때, 그 외의 광복운동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에 종사하는 것


의용단 창설 직후 총무 김석황은 평양에 잠입하여 국내 지부 조직을 추진합니다. 이때 미국인이 경영하던 기홀병원에 위장 입원한 뒤, 그곳을 아지트로 삼아 의용단 평양 지단을 조직하고 동지들의 규합에 나서게 됩니다. 23살의 청년 유성삼 역시 다른 대원들과 함께 평양 기홀병원에 모여 결사보국을 맹세하고 의용단원이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가 입수한 '의용단 취지서'
 일제가 입수한 '의용단 취지서'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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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단원 유성삼은 곧바로 중요한 작전에 투입됩니다. 그해 8월 미 의원단의 방한에 맞춰 광복군총영의 특공대(폭탄대)원들이 평양에 잠입하여 평남도청·평양경찰서 등에 대한 폭탄 투척을 시도할 때, 이를 보조하는 일을 맡게 된 겁니다.

거사 당일인 8월 3일. 유성삼은 평양 시내 곳곳에 동포들의 호응과 친일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을 살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또 문일민 등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을 때, 평양부청에도 폭탄을 던지려 했으나 이미 평남도청에 터진 폭발로 이목이 번다한 관계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복군총영 대원들이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성공시키고 탈출한 뒤에도, 유성삼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평양에 남아 '제2의 거사'를 준비합니다. 평남도청 제3부(경찰부) 소속 경찰관이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때, 차량을 습격해 그를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유성삼은 동지 표영준과 함께 곧바로 계획을 실천에 옮깁니다. 8월 9일 오후 9시경 잠복하고 있다가 목표물이 지나갈 때 각각 4발, 3발의 총탄을 발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당 차량은 경찰부 차량이 아닌 평안자동차상회 차량이었습니다. 운전자는 다행히 찰과상에 그쳤고, 거사에 실패한 유성삼은 현장에서 도주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주일 뒤 유성삼이 맞이한 허망한 최후입니다. 그는 16일 동지의 오인 사격에 의해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어떤 사유로 그가 오발탄을 맞게 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결국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사흘 만인 19일 숨을 거두고 맙니다. 향년 23세. 결사보국을 맹세하며 의용단에 입단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참으로 어이 없는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에 기록된 '유성삼'의 사망 사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에 기록된 '유성삼'의 사망 사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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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103년 만에 위패 봉안

그의 가족 관계 및 후손 존재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묘역이 어디에 있는지도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혹은 위패봉안관에라도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야 하는데, 우덕선 지사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누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국립서울현충원에 유성삼 지사의 위패 봉안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도 일사천리로 위패 봉안 심사가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현충원 측으로부터 "위패봉안관에 위패가 모셔졌으니 이제부터 참배가 가능하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위패 봉안 통보'
 국립서울현충원의 '위패 봉안 통보'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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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보도 이후의 긍정적인 변화라 생각합니다. 사실 우덕선 지사의 위패 봉안 당시 현충원 측으로부터 어떠한 통보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봉안이 완료되고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파악한 바 있습니다.

앞선 보도에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러한 의견을 수용한 것인지 이번에는 현충원 측에서 봉안 심사 결과부터 봉안 완료 사실까지 경과를 빠짐 없이 문자메시지로 알려왔습니다.

참배가 가능하다는 문자를 받고, 시간을 내어 현충원을 찾았습니다. 지사의 고향이 평안도이기에, 이번에도 평안도 지역의 전통주 '문배술'을 준비해 가서 한 잔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위패가 누락된 사실을 살피지 못한 데 대해,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대신 사죄드렸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모셔진 '애국지사 유성삼'의 위패. 대한민국 임시정부 배지와 광복군총사령부 배지를 나란히 놓고 지사의 넋을 기렸다.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모셔진 '애국지사 유성삼'의 위패. 대한민국 임시정부 배지와 광복군총사령부 배지를 나란히 놓고 지사의 넋을 기렸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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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제 문서에 등장하는 유성삼 지사의 또다른 이름은 '장비(張飛)'입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의 장비와 똑같은 이름입니다. 어쩌면 청년 유성삼은 장비처럼 덩치도 크고 성격도 괄괄한 사내대장부가 아니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유비, 관우를 도와 새로운 나라를 한 번 세워보려던 장비처럼,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싸웠던 또 다른 장비, 유성삼 지사의 명복을 빕니다.

※ 유성삼 지사 위패 봉안 위치: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48-8-172(판/명/위패번호)

태그:#유성삼, #문일민, #우덕선, #현충원, #의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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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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