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채소년> 스틸컷

영화 <사채소년> 스틸컷 ⓒ (주)영화사 빅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고2쯤 되면 학교에서 대강 자기 위치 파악되지 않냐? 친구끼리 서로서로 돕고 해야지."

고등학생 강진(유선호 분)은 지금 막다른 곳에 내몰려 있다. 학교에서는 남영(유인수 분) 무리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그들의 숙제를 대신해야 하는 것은 기본. 하교 후에는 집까지 몰려와 난장판을 만들고 떠나지만 그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채업자 랑(윤병희 분)이 찾아온다. 강진의 부모는 사채로 빚을 쓰고는 제대로 갚지도 못한 채 집을 떠났다. 부모 대신 자신의 돈을 갚으라는 사채업자 앞에서 그는 또 한 번 무력하다. 이번에는 경고로 끝났지만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강진 역시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눈이 가릴 정도로 길게 늘어진 앞머리만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럼 보인다. 잠시라도 이 현실을 마주하지 않고 피하고 싶다는 듯한 머리칼이다.

영화 <사채소년>에는 어른들의 보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단순한 학교 폭력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른들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한 불안한 청소년들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 그 기반이 되는 것은 역시 돈이다. 아이들의 위치와 계급은 부모가 갖고 있는 부와 명예로 나뉘고, 그 위치와 계급은 다시 또 한 번 폭력의 근거가 된다. 돈이 없이는 친구가 될 수 없고, 어른들의 관심과 보호 또한 받을 수 없다. 영화가 그 서열의 꼬리칸에 놓여 있던 강진에게 힘을 쥐어주는 이유다. 이 자리로 되돌아올지언정, 적어도 한 번은 높은 곳의 공기를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급격히 변하는 인생에 문제가 전혀 없을 리는 없다. 그 방법이 다른 사람의 고혈을 쥐어짜 배를 불리는 사채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도 학교에서, 학생이.

02.
강진의 운명은 자신의 돈봉투를 찾아 학교 안까지 밀고 들어온 사채업자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단순히 현재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던 강진의 거짓말로 인해 자신의 돈봉투가 남영의 무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랑이 채무자인 그에게 솔깃한 제안을 해오면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채업. 돈의 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랑으로서는 또 한 번의 큰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다. 물론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같은 또래인 강진이 대리인이 되어 돈을 빌려주고 수금하는 형태다.

현재의 상태로는 부모의 재산도 백도 남영의 무리를 절대 넘어설 수 없는 강진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기회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유일한 기회 앞에서 이것저것 따져볼 수 없는 입장의 절박한 그가 결국 이 도움 역시 부모의 빚을 얻어내고 자신의 돈을 되찾기 위함이라는 사실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다. 여기에 수익의 일정 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챙겨주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빚을 갚을 돈을 구해오겠다며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부모를 기다릴 바에 그의 밑에서 더럽고 나쁜 일을 조금 해서라도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랑의 도움으로 시작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고리대금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린다. 돈이 필요한 아이들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까지 소식을 듣고 돈을 빌리러 찾아온다. 약속한 대로 수익금의 일부를 나눠 받은 강진은 또래가 갖기 힘든 돈을 순식간에 벌어들이며 남영이 속한 골드 클럽에까지 손을 뻗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위치까지 다다른다. 부모의 빽도 재력도 아닌, 순수한 자신의 재력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품이 가진 힘이 드러난다. 사채라는 지연된 책임과 즉각적 보상의 요소, 그런 속성에 쉽게 빠지고 길들여지는 청소년의 성향을 잘 교합시킨 부분이다.
 
 영화 <사채소년> 스틸컷

영화 <사채소년> 스틸컷 ⓒ (주)영화사 빅


03.
한편, 영화는 강진의 이야기 이면에 다영(강미나 분)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또 하나의 축으로 삼아 전개시켜 나간다. 영화의 시작부터 나이 많은 아저씨와 함께 모텔로 향하는, 원조 교제가 의심되는 아이다.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돈이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비싼 화장품도 사야 하고, 자신의 집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어필해야만 한다. 권력의 역학 관계는 여자 무리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아서, 조금만 흠이 생기면 금방 내쳐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남영과 만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짝사랑하는 신지(신수현 분)가 때때로 의심의 시선을 던져온다.

그런 그녀가 타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랑의 돈봉투 분실 사건으로 인해 강진의 도움을 받게 되면 서다. 중학교 때 집이 망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고 늘 돈이 필요했다고 말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을 만나는 것은 진짜 원조 교제를 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만들어 돈을 훔치기 위해서라고도 솔직히 밝힌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다영이라는 인물은 강진의 유약한 면을 끊임없이 건드려오는 인물이다. 어려운 가정 상황이라는 유사성 때문에, 강진이 짝사랑하고 있다는 연모의 부분 때문에, 또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고 있는 외로움의 동질감 때문에 말이다. 때마다 반복되는 두 사람의 만남과 연결성은 강진으로 하여금 사채업에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04.
자신에게 가해졌던 폭력적이고 무기력하기만 한 상황에 맞서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했으나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 올린 탑은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지고 만다. 거대해진 강진의 자금력과 위치에 잠시 흔들리던 남영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다시 도전을 해온다. 밖에서는 사채를 빌려 쓴 아이들에게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선동을 하고, 안으로는 강진을 도와 수금을 해오던 만수(이일준 분)를 이간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다영을 과거의 착한 학생의 자리로 되돌리고자 하는 희원(서혜원 분)이 신지 무리에게 약점을 잡히는 문제가 더해지고 만다.

밖에서의 공격과 안에서의 배신, 지키고자 했던 존재의 위기까지. 심지어 수금이 어려워지자 일순 태도를 바꾸며 압력을 가해오는 사채업자 랑의 모습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속에서 강진은 단번에 추락하고 만다. 하룻밤의 꿈을 지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것 같지만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었던 과거와는 이제 많은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 앞서 강진과 다영의 관계를 여러 지점에서 강하게 묶어두었던 설정은 여기에서 제 역할을 해낸다. 강진의 추락으로 인해 다영 또한 한동안 멀리 할 수 있었던 어른들의 추악한 욕정으로부터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시작이 살아남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큰 문제였는지 들여다보게 된다. 아이들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은 어른들의 무관심과 어두운 욕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끝을 향해 나아가버린 아이들의 미성숙함과 탐욕 사이에서 말이다. 이는 오늘에 가로막힌 강진과 다영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치 세상이 자신의 발아래에 놓인 것처럼 굴던 남영과 기영(이찬영 분) 무리의 가치관과 태도 역시 그릇된 어른들의 가르침과 행동 아래에 있다.
 
 영화 <사채소년> 스틸컷

영화 <사채소년> 스틸컷 ⓒ (주)영화사 빅


05.
일종의 하이틴 무비로 학원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 이 작품을 처음 만나면 다소 가볍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안정적인 연출을 위한 일부 클리셰가 존재하기는 한다. 다만 다양한 인물의 내러티브를 쥐고 있으면서도 늘어지지 않는 극의 흐름은 군더더기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의 속도감을 이끌어내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무엇보다 시각적인 자극을 위해 폭력을 전사하지 않는다는 점과 아이들의 태도를 옹호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영리하고 긍정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황동석 감독은 '좋은 어른,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는 말로 이 작품의 연출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영화의 곳곳에 그렇지 못한 어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런 울타리 밖의 아이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보고자 발버둥 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에 감독과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적어도 자신의 몫을 다 해낸 것 같다.
영화 사채소년 황동석 유선호 강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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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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