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라스푸틴'으로 불리는 신돈(辛旽,13세기 초-1371년)은 고려 말 승려 출신 정치인이다. 평범한 승려에서 국왕의 신임을 얻어 일약 엄청난 권력을 움켜쥐었고 백성들 사이에는 한때 '고려의 성인'으로까지 불린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버림받아 사지가 찢겨죽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허무하게 역사에서 사라졌고, 심지어 후세에는 '나라를 망친 요승'이라는 오명으로 기록됐다. 신돈의 파란만장하고 수수께끼같은 인생은, 지금도 고려사의 최대 미스터리중 하나로 꼽힌다.
 
11월 22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83회에는 '공민왕의 스승 신돈은 왜 사지가 찢겨 죽었나' 편을 통하여 신돈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신돈의 일대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tvN

 
신돈은 1300년대 초반 고려 계성현(현 경남 창녕)에 위치한 옥천사에서 출생했다. 신돈이 사찰에서 출생한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옥천사의 노비였기 때문이다. 신돈의 어머니는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온 신씨 성의 유지와 사랑에 빠져 신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돈은 옥천사에서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승려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명은 '편조(遍照)'로 무한한 빛이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고려는 불교 국가였기에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았다. 본래라면 신돈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될 운명이었다. 사가들은 신돈이 승려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부유했던 신돈의 부친이 돈을 주고 아들을 노비에서 해방시켰거나, 혹은 신돈이 절에서 잡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승려 행세를 해왔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신분이 비천했던 신돈은 같은 승려들에게 무시받고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신돈은 시신을 매장하는 일을 하는 매골승이 되어 일반 승려들이 기피하는 궂은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성인이 된 신돈은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고려의 현실을 목격했다. 당시 고려는 권력을 장악한 친원세력과 권문세족(權門勢族)의 횡포로 백성들은 고통받고 나라의 국운은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면서 신돈은 부조리한 세상을 개혁해야한겠다는 포부를 갖게 됐다. 
 
수도 개경에 올라온 신돈은 당시 고려의 국왕이던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을 만나게 된다. <고려사>에는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까지 신돈의 구체적인 행적들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일개 승려에 불과하던 신돈은 어떻게 국왕을 만날수 있었을까. 사가들은 신돈이 공민왕의 측근이던 권신 김원명에게 접근하여 공민왕을 소개받았다는 설, 공민왕이 절을 찾았다가 우연히 신돈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한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어느날 꿈에서 자객을 만났는데 일촉즉발의 순간에 한 승려가 나타나 공민왕을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공민왕이 태후와 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리고 찾아왔는데, 공민왕은 신돈의 행색이 꿈속에서 본 승려와 너무나도 흡사하여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후 공민왕은 신돈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총명함과 언변에 반하여 갈수록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공민왕은 고려를 개혁하겠다는 일념이 강했지만, 권문세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을 거듭해야했고 그의 곁에는 믿을만한 사람이 부족했다. 공민왕에게 신돈은 왕비인 몽골인 출신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가장 속내를 터놓고 믿을수 있는 최측근이 되었다.
 
하지만 공민왕에 대한 신돈의 총애가 두터워지는 것을 곱지않게보던 반대파들은 신돈을 경계했다. 당시 유학자의 대부였던 이제현은 신돈이 '흉악한 골상(관상)'을 가지고 있다며 반드시 후환이 생길 것이니 멀리하라고 비난했다. 급기야 누군가 신돈을 암살하려한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공민왕은 고심끝에 신돈을 보호하기 위하여 잠시 멀리 떠나있으라고 제안했다. 신돈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개경을 떠나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신돈이 공민왕을 떠나있는 동안, 고려의 상황은 더욱 혼란스럽게 흘러간다. 두 차례에 걸친'홍건적의 난(1359,1361)'의 난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국토가 유린되는 등 국가의 권위와 지배력은 더욱 약화된다. 또한 홍건적을 평정하는데 앞장섰던 최영과 이성계 등, 강력한 사병조직을 보유한 신흥무인세력들이 성장하면서 왕권의 또다른 위협으로 등장했다. 또한 1361년에는 공민왕이 누구보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하면서 공민왕은 큰 절망감에 빠졌다.
 
1365년 7월, 공민왕은 돌연 수소문 끝에 7년 만에 신돈을 다시 개경으로 불러들인다. 공민왕은 자신의 최측근 세력으로서 근왕파이면서도 조정을 장악한 권문세족과 무인세력에 맞서 개혁을 단행할 '대리인'이 필요했다. 그 역할로 조정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떠돌이승려였던 신돈을 낙점한 것이다.

공민왕은 신돈을 공식적인 왕사(왕의 스승)로 임명하며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이자 정책자문을 맡겼다. 또한 판검찰사사(현재의 감사원장)-제조승록사사(불교 수장)-판서운관사(현재의 기상청장) 등 동시에 7개의 고위 관직을 겸임하게 하는 엄청난 실권까지 부여했다. 공민왕으로서는 신돈이 문벌과 귀족, 무인세력들의 저항에도 흔들리지 않고 개혁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힘을 몰아준 것이다. 고려에 최초로 승려 출신 정치인이 탄생하는 전무후무한 순간이었다.
 
신돈은 처음에는 공민왕의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했다. 신돈은 정치에 뜻이 있었지만 기득권의 반대가 불보듯 뻔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보호막이던 공민왕에게 확실한 신임과 안전보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다르면 공민왕은 신돈의 청에 따라 '다른 사람의 참소에 현혹되지 않을 것을 부처와 하늘앞에서 맹세한다'는 각서까지 써가며 신돈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비로소 공민왕의 제안을 받아들인 신돈은 승려에서 환속하여 세속인으로 돌아왔고 왕의 대리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게 됐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문벌과 귀족, 무인세력등은 반발했지만 공민왕의 강력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초기의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다시 부활시켜 고려 후기에 권세가들이 불법토지점유와 백성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개혁에 나섰다. 이는 곧 권문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길이었기에 신돈을 내세운 공민왕의 의도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이러한 개혁을 크게 환영했고, 신돈은 '성인이자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신돈은 이때부터 조금씩 독선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신돈은 '자신을 비방하는자는 모두 중상모략하여 바다에 수장하였다' '옥사를 꾸며냈다' '관직에서 삭제하여 일반민으로 삼았다'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머리를 깎아 산사로 내쳤다'는 기록들이 쏟아져 나온다.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은 없는 죄도 꾸며서 탄압할 정도로 냉혹하고 무자비한 권신으로 변한 것이다. 신돈의 눈밖에 난 이 들중에는 훗날 고려의 충신이자 무인세력을 대표하던 최영도 포함되어있었다.
 
또한 '스스로는 현량한 사람을 뽑는다고 하였으나 명단이 나오고보면 모두 신돈이 좋아하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인사권을 장악한 신돈이 능력이나 인품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측근들로 전횡을 일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뜩이나 정치적 기반이 없던 신돈은 독선적인 행보로 사방에 적을 만들었고, 개혁이라는 목적에서 우군이 될수도 있었던 신진사대부나 무인세력들마저 신돈을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민왕은 왜 이런 신돈의 막나가는 행보를 지켜보기만 했을까.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신돈이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대신 제거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일이 잘못되었거나 비난을 사더라도 모두 신돈이 저질렀고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빠져나갈 여지가 있었기에 굳이 신돈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신돈은 공민왕 앞에서는 처음 만났을때처럼 소박하면서도 고상한 모습을 유지하며 공민왕의 환심을 샀다. 또한 신돈은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시름에 빠져있던 공민왕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첩이자 여종이던 반야라는 여인을 공민왕에게 바쳤다. 야사에 따르면 반야의 외모가 노국공주가 무척 닮아 공민왕이 그녀를 총애했다고 하며, 공민왕과 반야 사이에서 낳은 아들 모니노는 바로 고려의 32대 국왕에 오르는 우왕이다.
 
정작 공민왕이 없을 때 드러난 신돈의 본색은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신돈이 탐욕을 부리고 음란하여 뇌물이 폭주했고 집에서는 술과 고기를 먹으로 제멋대로 여색을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용재총화>에 따르면 신돈이 관리들의 처첩중 용모가 뛰어난 여인이 있으면 그 남편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고 억울함을 호소하러 온 여인들을 침상에서 맞이하여 성착취를 저질렀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소불위의 권세를 거머쥔 이후 신돈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신돈의 든든한 러닝메이트이던 공민왕과의 관계에 서서히 금이 가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결정타가 된 것은 신돈이 공민왕이 추진하던 노국공주 추모 사업에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당시 공민왕은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이 지나쳐 성대한 영전공사에 막대한 국고와 노동력이 소모되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 신하들과 태후까지 일제히 나서서 공민왕을 말릴 정도였기에 신돈으로서도 충언을 하지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는 공민왕의 역린을 건드린 격이 되어 신돈과의 관계가 더욱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공민왕은 지방을 시찰하고 온 관리가 자신이 아닌 신돈에게 먼저 보고했다는 이유로 곤장형을 내리는가 하면, 명나라의 외교문서에 신돈을 상국(相國, 최고위직 집정대신)으로 지칭한 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공민왕은 얼마 뒤 돌연 교서를 내려 '친정'체제의 복귀를 선언하고 신돈에게 내린 왕의 대리인으로서의 자격을 모두 박탈했다.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은 신돈은 각서로까지 약속받았던 맹세가 무색하게 쫓겨나야 했다. 사실 이는 신돈만이 아니라 신임하던 최측근이 권세가 커지면 토사구팽하는 공민왕의 전형적인 정치 방식이기도 했다.
 
1371년(공민왕 20년) 7월, 신돈이 역모를 꾸몄다는 익명의 고변이 공민왕에게 전해진다. 공민왕은 충분한 조사도 없이 불과 사흘만에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보낸 뒤 불과 며칠 뒤에 사람을 보내 즉결처형했다. 신돈에게는 공민왕을 만나 무언가 변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공민왕은 참수한 신돈의 머리를 도성에 내걸고, 사지를 찢어 전국에 보내어 경계로 삼게 했다.

이로써 밑바닥부터 이뤄낸 신돈 천하는 불과 6년 만에 막을 내린다. 이는 곧 고려를 구할 마지막 골든타임이었던 공민왕의 개혁정책이 끝내 실패하였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신돈 사후 몰아친 후폭풍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tvN

 
신돈이 정말 역모로 꾸미려고 했는지는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신돈이 권력을 되찾기 위하여 실제 역모를 구상했을 가능성에서부터, 공민왕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신돈을 일부러 제거했다는 설, 혹은 공민왕과 신돈의 사이가 멀어진 틈을 타 신돈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누명을 씌웠다는 설 등이 다양하다.
 
신돈은 사후에도 고려 역사에 적지않은 후폭풍을 남겼다. 공민왕과 반야 사이에서 태어난 우왕이 사실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진 것. 공민왕은 비천한 여종의 아들로 태어난 우왕의 출생 소식을 처음엔 비밀에 부치다가 뒤늦게 궁궐로 데려와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했고, 이는 신돈과 반야의 관계와 맞물려 무수한 의혹을 낳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우왕 출생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과 그 아들인 창왕이 모두 신돈의 후손이라는 설)로 확대되며 훗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주요한 명분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신돈의 이름은 죽어서도 끊임없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야만 했다.
 
다만 이러한 소문과 기록의 다수는 신돈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반대파들, 혹은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을 감안해야 한다. 만일 고려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신돈과 공민왕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알려졌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전해졌을 가능성도 높다. 과연 신돈은 정말로 권력만을 탐한 타락한 요승이었을까. 아니면 역사가 왜곡해 놓은 실패한 개혁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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