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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1년의 기억이 담긴 구술기록집 <너를 보낸 이태원, 우리가 만난 풍남문〉 제작을 위한 펀딩이 진행 중입니다. 전북 가족들의 목소리가 더 널리 퍼질 수 있도록 구술집 일부 내용을 온라인으로도 연재합니다.[기자말]
아이들이 내 재산이라고 생각을 했지

원래는 곡성에서 나서 광주로 가고 광주에서 생활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부산에서 직장 다니다가, 회사 생활하고 있다 애 아빠와 만났죠. 그러다 아이들을, 미정이까지 전라남도 광양에서 낳고 애 아빠 직장인 대전에서 살다가 전주로 온 거예요.
미정이가 한 5살 때인가 6살 때인가 왔을 거예요.

애들 기르면서 부업 같은 거나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애들 보내놓고 많이 하러 다녔어요. 애 아빠가 목공 인테리어 기술자였어요. 그래서 그때는 창과 창 사이에 무늬목 같은 것을 넣었어요. 신랑이 재료 갖다주면 아이들 돌보면서 나도 내 부업 하면서. 마트 캐셔 자판 있잖아요. 그런 컴퓨터 자판 조립하는 것들을 많이 했어. 집에서 하는 것들을.

난 아이들이 중요해서 아이들 위주로 살았지. 애 아빠 따라다니면서 창문도 같이 들어다 주고 내려주고. 신랑이 너무 힘들잖아요. 진짜 무거워. 웬만한 사람 못 들어요. 근데 애 아빠는 다 해요. 계단으로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그런 것들이 미안해서 같이 도와줬지.
 
전주종합경기장 사거리에서 피케팅을 하는 유가족과 시민들
 전주종합경기장 사거리에서 피케팅을 하는 유가족과 시민들
ⓒ 구파란(전북평화와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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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이들은 목욕을 참 좋아했어요. 어려서부터. 그래서 전부 다 쪼르르 앉아서 서로 다 밀고 등 밀어주고 마사지 서로 막 해주고 이러니까 동네 언니들, 남들이 다 '너무 부럽다'고, '너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고.

지금은 미정이 떠나고 난 뒤로는 아이들하고 목욕을 못 해봤어요. 미정이 보내놓고 다음에는 아직 집에서 다 모인 적이 없어.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잖아요. 이제 손주가 있으니까 그래도 웃기는 해도 아무래도 좀 달라요. 목욕탕에 가면 미정이 생각이 너무 많이 나.

저희 아이들은 제가 그런 데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가 몰라도 많이 도와줬어요. 아빠 떠나시고 여기서 일을 하면 미정이가 이제 오잖아요. 저를 위해서 한 번씩이라도 더 와. 엄마 일하고 있으니까 와서 도와주려고. 진짜 힘들어 그 일이. 그러면 저녁에 끝나고 일하고 있으면 온 육체적으로 하고 막 에너지가 다 소비가 되잖아. 땀으로. 그러면 애들도 막 해요. 그러면 그게 난 미안해서 하지 말고 그냥 엄마가 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라 해도, 엄마는 맨날 하니까 조금만 엄마가 조금 더 쉬고 지네들이 하겠다고 애들이 해줘.

그래서 거기 가 있으면 미정이 생각이 너무 많이 나니까. 물속에서 울면 표시가 안 나잖아요. 눈물인지 땀인지. 나도 모르게 그냥 엉엉거리고 울 때도 많아. 그래서 이것 때문에 목욕탕을 안 가봤어요. 한 2주 동안 안 갔는데 우울증이 너무 심해지더라고 또. 미정이랑 아빠 있을 때 이렇게 걸어가잖아요. 우리 애들도 잘 크고 성실하고 착한 게 제가 봐도 진짜 흐뭇했어요.

아이들이 많다는 것, 아이들 잘 키워놓고 이게 내가 최고 잘한 것, 아이들이 내 재산이라고 생각을 했지.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았어도 아이들만큼은 조금 편하게 살았으면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가르친다고 하긴 했는데 미정이 가버리고 이제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온실 속에서 밖으로 조금 나가는 그런 느낌

미정이가 떠나고 나니까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 우리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냥 갑작스럽게 온다는 애가 안 왔어. 없어져 버렸어. 내 눈앞에서. 목소리 듣고 싶어도 들을 수도 없고. 저는 아이들 키우고 돈은 벌었어도 부업하고 거의 동네에서만 온실 아닌 온실 속에서 그렇게 컸다고 봐야 돼. 그러니까 사회 물정을 몰라요. 제가 그냥 오로지 내 가족만 알고 살아와서.

그래서 우연치 않게 추모 공원에 유가족이 쪽지를 남겨 놨다 하시더라고. 사십구재 때문에 상의드릴 게 있다고, 연락 한번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그래서 저도 막막하잖아요. 아무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그래서 집에 와서 전화를 일단 해봤어. 아버님이 '아들도 거기 있었다'고 얘기를 해주시더라고. 얘기는 하는데 제 귀에는 하나도 안 들어와요.

그래서 큰딸한테 연락을 했어. 어떤 아버님이 이렇게 전화가 왔는데 네가 한번 얘기를 해봐라. 엄마는 지금 누가 얘기를 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아. 그래서 연락해 보라고… 그랬는데 효균이 아버님이시더라고. 그렇게 해서 유가족을 만나게 된 거예요. 내 생활이 조금씩 온실 속에서 밖으로 조금 나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다른 유가족들은 활동하는데 나는 수술하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너무 힘들더라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내내 울기만 했는데, 퇴원하고 집에서 한 1~2주 있다가 바로 나갔어요. 완치가 돼서 나간 게 아니고 마음이 불편하고 가족들 보고 싶어서. 쉬어줘야 되는데 마음이 항상 그쪽에 가 있더라고.

그래서 나갔는데 가니까 식구들 보니까 조금 마음의 위로가 되더라고. 내 몸은 아프지만 불편해. 어딘가 모르게. 분향소가 차려져 있기 때문에 내가 거기 가 있으면 우리 아이하고 같이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가면 미정이 눈동자가 막 반짝반짝거려요. 그래서 엄마 왔냐고 인사하고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가지고 하루라도 더 빨리 나가고 싶어서 일찍 나갔어. 그래야 나도 내가 편해서. 미정이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유일하게 그런 활동, 너무 억울하게 갔으니 애한테 그것이나마 제 자리 잡아주고 싶은 마음.

159km 걸을 때 제가 준비를 다 해갖고 갔잖아요. '솔직히 내가 이 거리를 걸을 수 있을까.' 중간에 가면 무릎 때문에 보호대를 다 이렇게 하고 다니니까. 근데 가면 또 유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해줘요. 효균이 엄마하고 손을 많이 잡고 다녔어요. 한 번은 비가 엄청 많이 왔는데, 효균이 엄마는 물집이 다 옆에, 저는 발톱이 다 불어 있는 상태에서 두 개가 멍이 들어서 하나는 다 빠져버렸거든요. 발톱이 떠서 빠져버리더라고.

그래도 그게 진짜 좋았어요.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이. 우리가 많이 알릴 수 있는 그 시간들이었잖아요, 모든 시민들한테. 그래서 그게 너무 좋더라. 159km 걸었을 때에도 우리들이 번갈아 가면서 발언하면서 걷고. 더불어민주당 앞에 가서도 또 제가 하고. 용기를 많이 준 것 같아요. 미정이가.
 
풍남문 광장 앞 이태원 참사 추모제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유가족들의 손
 풍남문 광장 앞 이태원 참사 추모제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유가족들의 손
ⓒ 구파란(전북평화와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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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것은

특별법이 통과가 됐다고 해도 그것이 다 된 것은 아니잖아요. 넘어갈 산들이 많잖아. 언제 될지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아직도 멀었다고. 그거 통과만 되면 다 정리가 된 줄 알았거든요. 사실 그래서 너무 좋아했거든. 근데 법을 조금 아신 분들은 아직 멀었다고 그러니까 맥이 다 풀리더라고요.

아이들이 지금 누명을 썼어요. 마약범들이라고 해 가지고. 우리 애기도 옷이, 옷이 벗겨져 가지고… 아이가 다쳐가지고 그렇게 있었으면 유가족한테 인계를 해야 되잖아요. 핸드폰 따로 분실물 따로 지갑 따로 가방 따로 아예 신발 따로. 옷도 다 찢어져 가지고 거기에서 뭐 검사하느라고 찢었는가 봐요. 그래서 옷도 따라오고…

그런 것도 생각하면 잠도 안 오고 그거 보고 난 뒤에도 내가 엄청 아팠거든요. 우리 아이들 옷을 벗겨놓은 상태에서 인계를 받으면 누가 그것을 이해를 하겠어요. 그게 너무너무 억울하고, 억울하게 간 거지. 산산이 다 흐트러지게 인계를 해줬으니 우리가 온전하게 살 수 있겠어요.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아이들 추모 공간, 이태원의 사고 났던 데를 안전하게 아이들이 마음 놓고 놀 수 있게 해주고 그런 거.

우리 본 가족은 좀 만나기 힘들어요. 그리고 엄마한테도 아직 얘기도 못했고… 미정이 외할머니한테 아직 얘기를 못 했어요. 엄마가 충격받을까 봐. 저는 친정에서 6남매인데 나 혼자 신랑 보내놓고, 아이들이 많으니까 엄마가 항상 마음 아파하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얘기를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가려고 했다가 그만뒀어요. 말을 안 하면 모르는데 나 때문에 또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미정이도 너무너무 보고 싶지만 엄마도 보고 싶거든요. 엄마가 여든이고 혼자 계세요. 남동생이 엄마 주변에서 살고는 있긴 하는데 그래도 또 혹시 모르잖아요. 엄마가 그전에 또 많이 한 번 아프셔가지고 더 염려가 돼서 말을 못 하고 있는 거죠. 전화상으로는 언니하고 얘기는 해요. 작은 언니도 얘기를 많이 해주긴 하는데 그래도 그냥 엄마하고 같이 있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러고 싶어.

★ 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구술기록집 <너를 보낸 이태원, 우리가 만난 풍남문>에서 더 이어질 박랑주 님의 목소리를 들어 주세요.

 
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구술기록집 모금 포스터
 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구술기록집 모금 포스터
ⓒ 전북평화와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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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내용은 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구술기록집 <너를 보낸 이태원, 우리가 만난 풍남문> 원고 중 일부입니다.


태그:#시민기자, #1029이태원참사, #구술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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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평화와인권연대는 1994년 12월 10일, 단체 설립과 함께 인권소식 ‘평화와인권’을 창간하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차별 없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지향하는 전북지역의 인권운동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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