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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1년의 기억이 담긴 구술기록집 <너를 보낸 이태원, 우리가 만난 풍남문>?제작을 위한 펀딩이 진행 중입니다(https://www.socialfunch.org/1029jb). 전북 가족들의 목소리가 더 널리 퍼질 수 있도록 구술집 일부 내용을 온라인으로도 연재합니다.[기자말]
우리 아들은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할까?

맨 처음에 어렵게 해서 우리 효균이 데려왔어요. 뉴스에서 마약 얘기하고, 놀러 가서 죽었고, 그리고 도덕성이 없어서 그래 된 거라고 계속 떠드니까 그냥 조용히 보내자, 그런 마음이었어. 근데 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 그래서 남편한테 그랬지. 나 우리 아들 이렇게는 못 보낸다고. 며칠이라도 품에 안아주고, 사랑한다고도 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꽃도 주고, 맛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제사상도 챙겨주고, 친구들도 만나서 마지막 인사도 나누고, 그렇게 보내야 되겠다. 그러니까 얼른 준비하라고. 그렇게 해서 장례를 치르고 효균이를 보냈어요.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전주합동분향소 앞에 서 있는 사람들.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전주합동분향소 앞에 서 있는 사람들.
ⓒ 구파란(전북평화와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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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편은 애교 같은 거 없어요. 묵직하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야. 우리 집은 남자 셋에 여자 하나잖아요. 다들 무뚝뚝하고. 큰아이도 그렇고, 작은 둘째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그래도 "안아줘" 하면 안아줘요. 그리고 내가 "아들 사랑해. 엄마 안아줘" 그러면 "사랑해요" 하고. 둘째 애도 똑같이. 서른 살 먹었는데. 따뜻하게도 안 해. 투박하게. 애교를 떨어도 내가 떠는데…

예전처럼 다가가서 손도 잡고 애교도 부리고 그런 거를 할 수가 없더라고. 그전에는 남편 무릎도 툭 치면서 까불고 깔깔거리고 그랬는데 그런 걸 못 했어요. '내가 왜 웃어야 하지?' 웃으면 미안해서 못 웃겠고 예쁜 거 보면 미안해서 눈 감고. 그래도 먹고 싶은 건 있더라고. 밥을 한 숟갈 떴는데 '내가 어미가 맞나? 자식은 죽었는데 내가 배가 고파서 내가 밥을 먹어?' 근데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지금부터 우리 다른 인생을 살아야 되니까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떻게 살 건지. 생각이 안 나면, 우리 아들이 엄마가, 아빠가, 동생이 어떻게 살길 원할까를 일단 생각해 보자.

그래. 그러면 우리 아들이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할까? 엄마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할까? 첫째는, 우리 아들이라면 엄마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고 나쁜 생각 안 하길 원할 거고. 내가 맨날 죽는다고 그랬거든. 높은 데 갔을 때 누가 살짝 건드려 줬으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 근데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지? 모른대. 모르면 일단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보자. 그래서 정읍에서 추모제 하면 정읍으로 가고, 익산에서 추모제 하면 또 익산으로 가고. 전주에서… 진짜 춥고 배고프고, 아, 그때는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춥고 배고프고 그랬나 몰라요.

우리가 나중에는 웃더라고

12월 초에 서울 분향소가 생기면서 같이 하게 된 거죠. 그때 유가족 협의회에 갔더니 효균이 아빠한테 무슨 위원을 하래. 전주니까 안 된다 하고 나오는데 인영이 엄마가 손을 딱 잡더라고. 나도 전주라고. 그걸 시발점으로 해 가지고 전주에도 분향소가 만들어졌잖아요? 12월 29일인가 될 거예요. 그때 첫 집회 하고 만들어졌는데, 그 분향소에 애들 사진도 없었어요. 프린트한 거, 몇 개밖에 되지 않는 얼굴들이 있고. 낯설잖아요? 그런데 좋더라고요. 푸근하고.

처음부터 계속 있으면서 가족이 한 분 한 분 오시는 걸 다 봤네. 안 오신 분들한테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를 했어요. 항상, 꾸준히. "그래도 한번 나와보셔요" 하면서. 나도 못 해. 그분들 맨 처음에 왔을 때는 얼굴에 그 고통이 고스란히 쓰여 있어. 전화해도 아프니까 잘 안 받고, 나오시라고 해도 안 나오시고. 다들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할 정도의 그런 모습을 하고 있더라고. 그래도 와서 멀뚱멀뚱하니 한번 봐. 그냥 지켜보고 있어도 다 느껴지니까. 한 번 봐, 두 번 봐. 우리가 나중에는 웃더라고.

구정 때 차례상을 챙겼잖아요? 그래서 이제 어머니들이 각자 자기 아이들 해주고 싶은 거, 국하고 밥하고 해 가지고 오셨으면 좋겠다고 했어. 반찬 한 가지씩만 해 가지고 오셔도 되고. 그렇게 하시지요 했어요. 근데 연락이 안 되시는 분들, 안 오시는 분들이 있잖아? 그래가지고 아침부터 많은 밥, 많은 국을 차렸지. 그랬는데 명절날 단이 어머님이 오셨어. 조금 늦게 오셨어요. 단이 앞에 이제 내가 해온 밥이 딱 올려져 있는 거야. 근데 그런 상황을 잘 모르니까 뻘쭘 뻘쭘 계셨어. 옆으로 밀어버리고 단이 엄마가 해 온 거 얼른 주라고 했어요. "단이야, 엄마가 해 온 거 먹어" 하고. 그런 게 좋았어요. 명절 때 계속 거기 있는 게 진짜 그때 힐링 됐어요.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159km 걷기 할 때 어머니들 5인방이 갔잖아요? 차편이 없으니까 당일치기로 하기에 참 그렇더라고. 그래서 초보 운전이지만 '모여라, 우리 집 앞에 모여라' 해가지고 모시고 갔다가, 서울 가서 일정 다 소화하고 또 모시고 오고. 그때 국회 앞에서 단식 들어가는 날, 우리가 비를 억수로 맞고 다녔거든요. 아침부터 오더라고. 그래갖고 비옷을 입고 나왔어. 그러니까 5인조 독수리 오형제. 그때 재밌었지. 지현이 엄마가 전날 올라가서 전화가 온 거야. 그래가지고 "우리 집으로 와, 가자!" 연락해서 가고.

우리 지현이 엄마가 막둥이잖아. 언니들 왔으면 좋겠어. 여기서 왔으면 해, 이왕에 와줄 거면 그날 와 달라고. 그때 유가족 호소문을 읽으라고 해서 얼떨결에 읽었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기자들 처음 봤어요. 단식 얘기는 그 전부터 나오긴 했는데, 그때 딱 들어갈 줄은 당일에 알게 됐어요. 힘들었어요. 유가족이 '오늘부터 단식합니다' 하고 1일 차라고 조끼를 딱 입는데, 그날부터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는 거잖아요. 상상도… TV에서나 봤지. 현실 속에서 내가 그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피부로 느끼는 거잖아. 그 울분, 그 아픔, 고통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그래서 요즘은 지나가다가 누가 팸플릿 주잖아요? "예"하고 다 받아요. 받았어도 또 받아. 그리고 지나가다가, TV를 보다가 사람들이 얘기를 하고 하잖아요? '저 사람은 뭐가 억울해서 얘기를 할까?' 내가 들어주더라고요. 그러고 있더라고.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전주합동분향소 앞에 모여 앉아 촛불을 든 시민들의 모습.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전주합동분향소 앞에 모여 앉아 촛불을 든 시민들의 모습.
ⓒ 구파란(전북평화와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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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들은 왜 여기 와 있지?

맨 처음에 여기에서 활동하시는 모든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분들은 무얼까? 왜 여기 와 있지? 왜 같이 울어주지?', '왜?'라는 물음표가 계속 생기더라고. 그리고 '5.18 어머니들은 왜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세월호 어머니들은 왜 죄송하다고 그러지?' 이해가 안 됐어. 내가 어제 남편한테 그랬어요. 그분들은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우리들 옆에 갔을까? 모른대. 모르겠대. 남편은 그러지. 이거는 나중에 다 우리가 갚아야 할 부분이라고. 나중에. 그 어느 누구한테인가는 갚아야 되겠죠. 갚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런 사람들이 안 나타나서 내가 받은 걸 절대 갚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나는 관심이 없었어요. 왜? 남편이 너무 관심이 많거든. 내 귀에다 다 읊어주니까. 다른 데서 사람들이 엄한 소리를 하면 남편이 한 얘기를 다 하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있어야 되며, 세월호에 대해서도 막 내가 얘기하고 있더라고요. 그전에는 그냥 공감이었다면, 지금은 그 사람의 아픔이 고스란히 나한테 전해진다는 거지. 그전에는 그냥 끄덕끄덕하면서 '그래, 아플 거야, 슬플 거야.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거기까지였다면 지금은 내 가슴 속으로 내가 같이 운다는 거지. 지금은 그 고통, 그 아픔 어떡하냐고, 그걸 온몸으로 내가 다 받는다라는 거지. 방바닥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겠더라고. 그게 가장 큰 변화지.

무슨 집회 있고 그럴 때는 항상 가죠. 신부님들 하시는 정의구현사제단 집회도 가고, 그리고 윤석열 퇴진하라는 그것도 가고. 전주 시국선언 집회도 가고, 정읍에서 할 때도 가고 바빠요. 그리고 저번 주 토요일 날은 광주 릴레이 걷기 하는데도 갔고. 불러주면 맨날 가요. 뭐가 있다 하면 맨날 가. 어느 날부터는 당연히 가야 되는 자리라고 생각이 돼서 그냥 가요. 아무튼 무슨 집회만 있다 하면 항상 왔으니까. 활동 많이 하네요, 이제 봤더니. 맨 처음에는 뭔 생각 안 하고 빚 갚는다 생각하고 갔어요. 나중에는 그게 아니더라고. 그분들을 이해하니까. 그분들이 나를 도와줘야 할 의무는 없잖아. 근데 그분들은 나를 도와줘. 그래가지고 처음에는 '저분들이 와주셨으니까 나도 빚 갚아야 돼'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분들도 이제 내 가족이고. 그분들 옆에 내가 있어야 되고, 내 옆에 보면 항상 그분들이 와서 계시더라고. 나도 그분들 옆에 있어야지.


★ 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구술기록집 <너를 보낸 이태원, 우리가 만난 풍남문>에서 더 이어질 이기자 님의 목소리를 들어 주세요.
 
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구술기록집 모금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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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평화와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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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내용은 10.29 이태원 참사 전북지역 유가족 구술기록집 <너를 보낸 이태원, 우리가 만난 풍남문> 원고 중 일부입니다.


태그:#시민기자, #구술기록, #1029이태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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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평화와인권연대는 1994년 12월 10일, 단체 설립과 함께 인권소식 ‘평화와인권’을 창간하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차별 없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지향하는 전북지역의 인권운동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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