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31 11:53최종 업데이트 23.10.3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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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경제·안보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내가 올리는 게 아니잖아요. 추석 때는 사과 한 박스가 20만 원도 넘었어요. 지금은 그나마 내린 거지요. 어쩔 수 없어요. 안 오르는 게 없어요."  

새벽마다 야채와 과일을 싣고 오는 아저씨와 아줌마의 실랑이가 이어진다. 과일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는 푸념에 도매가격이 그런데 어떡하냐는 아저씨의 항변이다. 사과 3개에 만 원. 귤도, 샤인머스캣도 성큼 손이 안 간다. 아무리 기상 이변 탓이라고 하지만 서민들이 느끼는 물가는 올라도 너무 올랐다.


과일값만 오른 것도 아니다. 음식값도 올랐고 교통비도 올랐다. TV만 틀면 한전이 적자라고 전기요금을 올려야 된다고 하고, 지하철 적자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또다시 인상 군불때기를 한다.

중동 정세의 불안함에 기름값도 오를 거란다. 물가를 잡겠다는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냐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날씨 탓, 국제정세 탓이라고 하지만 정부의 경제정책이 있기는 하냐는 원망도 넘쳐난다. 무정부 상태,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진단도 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서민의 삶은 반팔, 반바지 차림처럼 을씨년스럽고 위태롭다.

상저하고? 3분기 성장률 0.6% 
 

부산항 신선대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상저하고' 상반기는 부진하지만 하반기는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 추경호 경제부총리를 위시한 경제 관료들이 한입처럼 내놓은 경기 전망이었다. 상반기는 0.9% 성장률이지만 하반기엔 1.7%∼1.8% 성장률로, 상반기에 비해 두 배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 근거는 반도체 부진을 딛고 수출이 제 궤도로 진입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런데 하반기가 2개월 여 남은 현재, 수출이 늘어나고 성장률이 반등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3분기 성장률도 고작 0.6%에 불과하다. 소나기는 피해 보자는 식의 준비 안 된 임기응변이 국민에게는 희망고문만 되었던 셈이다.

지난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3년 10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는 불안한 경제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소비심리지수가 98.1을 기록해 석 달 연속 하락세다. 가계수입전망, 향후경기판단과 전망 등 대부분 지표가 부정적인 시각이 나타냈다. 향후 1년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인 기대인플레이션은 3.4%로 전달보다 1%P 올랐다. 지금도 어렵지만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 심리가 가계는 물론 기업 경제와 나라 경제까지 휘감고 있다.

분명한 위기다. 코로나 정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경기 침체와 물가고. 그러나 진단도 처방도 보이지 않는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 이념을 버리고 민생에 집중하겠다는 정부와 여당이 정신 차리는가도 싶었지만, 그 다짐을 뒷받침할 어떤 낌새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결국 재정이나 금융 측면에서 확장적 정책을 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나 우리 국민이 좀 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해 지속 가능한 성장이 되도록 정책 방향을 끌고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지난 7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밝힌 재정운용의 기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진부한 인식은 그저 놀랍다. 긴축재정을 '재정건전성'으로 미화하는 건 물론 야당의 추경 요구를 '방만한 재정'으로 연결 짓는다.

나라가 어려우니 정부도 국민도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건 무능의 자인이고 국민 겁박이다. 소득이 줄어들고 가게의 세도 못내는 자영업자가 폭증하는 현실, 오르는 물가 따라잡기에도 허덕이는 국민들이 더 이상 어떻게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말인가? 활황기에는 분배 요구에 '조금만 더 참아 달라', 불황기에는 '허리띠 졸라매자'는 강요는 50여 년을 반복되었던 소리다. 역대 어느 정권이라도 국민들에게 허리띠 풀어놓고 먹게 한적,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긴축재정과 확장재정을 선악으로 구분하는 건 유치한 이분법적 발상이다. 세금을 제대로 걷고 적재적소에 쓰는 것 국가재정의 기본이다. 부자들 세금을 깎아주고, 대기업 법인세를 줄여주면서, 나라 경제가 어려우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은 궤변이다. 그렇게 해서 나라 살림이 튼튼해지는 것도 아니다. 올해 9월까지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빌려다 쓴 돈의 규모가 약 113조 6000억 원, 대출이자만 1497억 원에 이른다. 세수 관리는 뒷전인 채 나라 빚을 늘려서는 안 된다는 긴축재정의 고집이 이런 기형적인 나라살림을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내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대폭 삭감을 예고했다. 특히 <노컷뉴스> 보도에 따르면 반도체 설계 회사인 '팹리스' 기업들에 대한 지원 예산의 91.5%를 깎았다. 사회서비스원 예산도 통째로 삭감됐다. 이태원 참사 때 재난 트라우마 신속 상담을 약속했던 정부가 내년도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한 셈이다. 입버릇처럼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요하는 정부이니, 놀랍지도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 피해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 서민들, 당장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분야에 집중된다. 
   
이뿐일까. 무엇보다 서민들은 고금리에 이자 내기도 벅차다. 정부의 대출 규제로 인해 더 이상 돈 빌릴 때도 없다. 오른 물가에 주머니 사정은 더 빠듯하다. 시장의 돈맥경화(?) 현상은 내수를 멈춰 세우는 형국이다. 이럴 때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 정부의 예산을 활용한 소비진작→내수활성화→경제활력의 선순환이 무엇보다 절실할 때다.

그러나 가계나 기업보다도 나라 살림을 돈줄 죄기에 나선 정부다. 소비침체→내수침체→경기부진의 악순환을 정부가 방치하고 오히려 조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가도 그렇다. 금리 인상은 물가를 잡기 위한 고육책이다. 한쪽에서는 금리 인상으로 국민들 고통을 키우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부동산 경기를 살리기 위해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규모를 키우는 정책. 이렇게 어긋나는 정책들로 물가는 오르고 금리 인상의 고통까지 국민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윤석열 탓' 분명히 있다 
 

"좋아 빠르게 가!"라던 대선 캠페인 모습. ⓒ 국민의힘

 
"코로나 때보다 더해요. 그렇지만 내년이 더 안 좋을 거라고 난리네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과거에는 맞든 틀리든 소득주도성장으로 국민들 먹여 살릴 거라고 했는데 이 정부는 아예 비전조차도 없잖아요?"

모처럼 전화를 한 거래처 사장님. 올해보다 내년이 더 안 좋을 이야기를 서글픈 인사처럼 한다. 물가에 내수 침체에 점점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이 모든 게 윤석열 정부 탓만은 아닐 것이다. 날씨 탓에 과일값도 오르고, 기름값도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무관치 않다. 고금리의 고통은 비단 우리나라만도 아니다. 그래서 가계도 기업도 국가도 모두 어려운 현실을 두고 과거 '노무현 탓' '문재인 탓'처럼 이 모든 게 '윤석열 탓'이라고 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러나 '윤석열 탓'은 분명히 있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은 길을 잃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하려는지 계획조차 보이지 않는다. 허리띠 졸라매자는 강요가 전부다. 취임 초 수출주도로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했지만 세계 10대 수출국 가운데 감소율이 -13%로 가장 크다(무역협회, 23년 1월~9월 전년 동기 대비 기준)

'좋아 빠르게 가(좋빠가)'.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후보의 쇼츠 영상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좋빠가'를 외치며 팔뚝을 치켜세울 때도,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국민들을 채근할 때도 아니다. 긴축재정의 고집, 좌충우돌하는 경제정책, 계획부재와 응기응변의 처방. 그런 정책들이 가계와 기업, 나라 살림을 어디로 몰고 가는지에 대한 성찰과 반성부터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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