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5 07:14최종 업데이트 24.04.05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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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민생토론회 후속 조치 점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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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토하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검토한다는 말은 사실상 안 한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게 돼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민생토론회 후속조치 점검회의에서 한 말이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민생을 챙기는 정부'라는 주제를 단 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검토하겠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말 것과 벽을 허물 것을 참석자들에게 주문했다.


이 발언을 접하면서 신속한 집행에 대한 기대보다는 일방적 추진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24번의 민생토론회에서 후속 조치를 결정한 과제만 해도 240개나 된다. 이 많은 과제를 관계기관이나 이해 당사자들과의 조율이나 관련법 개정을 위한 야당과의 협의 없이 속도만을 앞세우는 게 맞느냐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지난 2월 6일 민생토론에서 발표된 의대정원 2천 명 증원계획을 담은 의료개혁 4대 패키지만 해도 그렇다. 의사 부족으로 인한 비인기 진료 분야나 지방의 의료 공백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의대정원 확대는 필요한 일이고,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한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하기 어렵다.

2천 명 증원을 밀어붙인 정부는 의사 부족 해소를 위한 최소한의 숫자이고 명확한 근거가 있다며 어떤 협상도 거부해 왔다. 그러나 증원 인원의 독단적 결정과 야당이나 전문가 그룹의 조언조차 경청하지 않는 고집은 정부 스스로 갈등 해결의 주체가 아니라 의사들과 싸우는 정치권력 정도로 가둬놓는 모양새가 됐다.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대의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의정 갈등에서 흔쾌히 정부 편을 들지 않는 건 독단적인 결정과 밀어붙이기식 해결 방식이 국민 생명을 지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정운영 난맥상의 생생한 증거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이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연구개발(R&D) 지원 개혁 방향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박상욱 수석은 "정부 R&D 지원 방식의 개혁을 진행해 완수해 나가면서 동시에 내년 R&D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대통령이 민생토론회에서 약속한 정책을 모두 입안하려면 약 901조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주장이다. 이것도 민생토론회 17회까지의 추정치이고 24회까지 약속한 정책은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할 것이다.

2024년 국가 예산은 656조 6000억 규모다. 24차례 민생토론회에서 대통령은 국가 1년 예산을 훌쩍 넘어서는 규모의 정책을 약속했다. 그리고 민생토론회 후속조치 점검회의에서 검토보다는 속도 있는 추진을 다그친다. 국가 1년 예산을 넘는 사업들을 적절성 검토나 예산 의결권을 가진 입법부와 한마디 상의 없이 대통령 홀로 결정하고 속도 있는 추진을 재촉한다. 이건 법치주의와 상식을 넘어서는 횡포이고 월권이다.

지난 3일 대통령실은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R&D 예산을 전년 대비 4조 6000억 원(14.7%)이나 삭감한 정부였다. 과학계 카르텔 운운하며 예산 삭감에 팔 걷어붙인 정부가 1년 만에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하겠다는 이유는 비효율적인 부분에 많은 조정이 이뤄졌다는 설명이 전부다.

불통독주 국정운영의 전형이다. 국가 예산을 대통령 주머니 쌈짓돈 정도로 생각하는 발상이다. R&D 예산에 큰 증액이 필요하다면 역대 최대 규모로 줄인 올해 예산 편성에 대한 사과부터 있어야 한다. 정부 마음대로 줄이더니 이제는 다시 선심 쓰듯 늘리겠다는 예산. 법과 시스템보다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국정운영 난맥상의 생생한 증거다.

윤석열 정부는 취임 초부터 긴축재정을 천명해 왔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미국발 금리 인상에 대응한다는 논리였다. R&D 예산은 물론 일자리안정자금, 지역화폐 예산 등 국민 생활과 직접 관련된 예산마저 크게 줄였다.

그러나 국가재정의 건전성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씀씀이를 줄이는 것 이상으로 부자와 기업에 세금을 줄여줘 세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경기에 서민 예산을 줄이면 내수 침체와 저소득층 빈곤이 더 커질 것이라는 우려에도 후대에 빚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며 긴축재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랬던 정부가 갑자기 국가 1년 예산 이상이 소요되는 사업들을 민생토론회에서 남발하기 시작했다. 긴축재정이 곧 재정건전성 확보라는 주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약속을 재정지출을 늘려 경제 침체를 막으려는 확장재정이라고 볼 수도 없다. 긴축재정이나 확장재정, 그 자체만으로 어떤 정책이 낫다 평가할 수는 없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정책은 긴축재정에서 확장재정으로 바뀐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서민들에게는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요하고, 부자와 기업에는 불로소득으로 부를 축적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재정 정책이었을 뿐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삭감이 되고 늘어나는 주먹구구식 예산, 이런 나라 살림을 '엉망재정' 말고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국민 혈세가 대통령 쌈짓돈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민생토론회 후속 조치 2차, 경제분야 점검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대통령실


"재정 운용은 정부만의 책임이 아니라 집권여당도 공동책임이 있는 것이다. 막중한 책임이 있는 집권여당이 잘못된 재정운용에 반성하고 사과하기는커녕 기재부를 강박하며 이렇듯 국민 혈세를 주머니 속 쌈짓돈으로 여겨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지난 2021년 11월 문재인 정부에 초과 세수가 발생하자 더불어민주당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으로 지급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당시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정부 금고를 집권 여당의 현금지급기로 생각하는 건가'라며 민주당을 강하게 성토했다. 일면 타당한 지적이다. 보수적 재정 운영으로 엄청난 초과 세수를 발생시킨 문재인 정부 기재부에 잘못이 있다. 국민의 혈세를 주머니 속 쌈짓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로부터 2년여 지난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재정 운용 방식은 과거 이런 비판을 했던 동일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초과 세수가 아니라 적자재정을 걱정해야 할 나라 살림이다. 그런데도 국가 1년 예산을 넘어서는 사업을 약속하고 속도전을 강요한다.

240개의 사업, 901조 원에 이른다는 예산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통령에게 이런 막강한 권한을 누가 부여했다는 것인지 탄식이 절로 나온다. '진짜 이러다 나라 망하는 거 아닌가'라는 세간의 농담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라는 윤 대통령의 팔뚝질이 이렇게 무서운 의미인지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4.10 총선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대통령의 과거 주장대로 재정 운영은 정부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의 책임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입법권과 예산심의권을 쥔 국회도 재정 운영을 분담하고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다. 윤석열 정부가 국가 1년 예산을 훌쩍 넘겨 약속한 민생토론회 사업들에 대한 타당성과 예산 배정의 합리성 검토는 다음 국회의 과제다.

대통령이 약속한 240개 약속들. 그게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집권 여당에 힘을 실어주면 된다. 선택은 국민의 몫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의사 증원 규모가 정해지고 국가 재정을 쌈짓돈처럼 운용하는 것에 박수칠 것인가, 막아야 할 것인가도 유권자의 결정이고 스스로 책임져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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