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 커넥트픽쳐스

 
미국 사회 내에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범죄가 극성을 부리며 사회적 논란이 되는 시기에 <프리 철수 리>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인종 문제를 넘어 1세계 국가들 중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수감자 비율과 함께 현대 형법에서 대세인 교정주의가 아니라 엄벌주의를 채택하는 미국의 교도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영화는 80여 분의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이철수, 철수 리라는 이름을 가진 재미교포의 굴곡진 삶을 다룬다. 시사 다큐멘터리의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기에 관객은 그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지만 영화적 재미로 보기엔 딱딱한 측면이 적지 않다. 하지만 쉽게 상상하기 힘든 압도적 진실의 힘 앞에서 관객은 재미를 찾기보다는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근원적 분노에 휩싸여 이 영화를 관람할 법하다.
 
이철수의 생애는 그 자신이 선택하거나 극복할 수 없었던 몇 번의 전환점을 거치며 구불구불 흘러가는 산중턱의 도로와도 같다. 1952년-1973년-1977년-1983년-1991년-2014년으로 이어지는 그의 인생 분기점은 대부분 자신이 의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다. 대체 어떤 사연을 간직했기에 생소하기 그지없는 이 이름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진 걸까?
 
생과 사의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기구했던 전반생
 
 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 커넥트픽쳐스

 
한국전쟁의 포성이 한창이던 때 '철수'는 태어났지만 전쟁 통이 아니라도 축복받은 탄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혼외자녀였고 어머니는 미군과 재혼해 한국을 떠나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는 부모 없이 친척집에서 자라며 전후 빈곤을 고스란히 겪었다. 얼마 후 미국에서 이혼하고 혼자 살게 된 어머니는 12살의 철수를 데려간다. 빈곤 그 자체이던 한국과 달리 풍요로운 미국의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투잡을 뛰느라 낮밤으로 바쁘던 어머니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곁을 지킬 틈이 없었고 영어가 서툰 동양계 소년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락하지도 않은 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쏘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갓 스물을 넘겼을 때 차이나타운에서 일어난 갱단 간 총격살인사건이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아시아계를 제대로 식별할 경험이 부재한) 백인 목격자들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배운 것도 조력자도 없어 자신을 방어할 수단도 갖추지 못한 외톨이 청년은 정당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일급살인죄로 교도소로 직행한다.
 
여기에서 미국의 악명 높은 교정행정의 폐단이 돌출한다. 교도소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옥 갱단 중 한 곳에 속해 보호를 받아야 한다. 멀쩡한 시민이 생존을 위해 범죄 집단과 연루되는 출발점 노릇을 교도소가 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낄 수 없던 동양계 청년은 쉽게 표적이 되고야 만다. 자기 방어로 그는 4년 후 악명 높은 아리아 형제단(백인우월주의 지향) 갱과 충돌해 또 다른 살인죄를 얹게 된다. 이젠 정말 가스실에서 짧은 인생을 끝마칠 판이 되고만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덕분에 그의 혐의에 의혹을 품게 된 이들이 합류한다. 지역 내 유력매체 기자였던 당시 샌프란시스코 지역사회 내 유일한 한국인 기자 이경원과 아시아계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합세한 것이다. 청소년 시절 그와 절친이던 일본계 랑코 야마다 역시 법률전공으로 변호사가 되어 지원팀에 가세한다. 이들은 이 영화의 제목이 된 '프리 철수 리', 철수에게 자유를 캠페인을 시작하고 항고소송을 개시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교포사회의 허브 역할을 하던 한인교회가 앞장서 역할을 소화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으로 주인공의 시련이 마침표를 찍은 건 아니다. 한때 두 번째 살인 혐의로 사형 선고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변호인단의 노력으로 살인죄를 뒤엎는 증거를 발굴해 그는 1983년, 1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다.
 
여기까지로 영화가 마무리를 찍었다면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자주 목격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감동적인 법정드라마로 끝이 났을 테다. 실제로 그의 사건을 각색한 영화가 제임스 우즈 주연으로 상업영화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혐의로 적용된 두 번째, 실제로 교도소에서 저지른 살인은 사법거래의 대가로 유죄를 인정하고 풀려나야만 했다. (이 때문에 이철수는 정부를 대상으로 한 명예회복이나 피해보상을 거의 얻지 못했다고 전한다.) 사실상 첫 번째로 누명을 뒤집어쓴 살인용의자 취급이 아니었다면 두 번째 살인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미국 정부는 그런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반성도 책임도 지지 않은 것이다.
 
씁쓸한 후일담이 오히려 진한 감상을 남기는 후반부
 
 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 커넥트픽쳐스

 
10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몇 달 후 이철수는 자유의 몸이 된다. 어느덧 이제 아시아계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구심으로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출소 초반 얼마동안은 록 스타가 된 것처럼 그를 환영하는 이들에게 답례하느라 미국 전역을 투어 돌듯이 다녀야 했을 정도다. 그렇게 사회적 관심과 성원 속에서 철수 리의 이후 삶은 행복하게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게 동화처럼 귀결되지 않는다. 불우했던 유년시절 트라우마와 감옥 내에서 겪었던 외로운 고난에서 그는 육체적으로는 구조되었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방황과 옥살이에서 풀려났으니 세간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재기와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조력자들은 일자리도 제공해 주는 등 도움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치는 때로 당사자에게 족쇄나 정신적인 올가미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는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시아계 차별에 대한 인권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언론과 사회의 스포트라이트에 길들여져버린 것도 좋지 않은 작용으로 기울고 만다. 사람들의 환대와 관심을 받을 때는 행복해했지만, 잠시라도 혼자 있게 되면 곧바로 불안과 공허함에 빠져드는 철수의 일상은 그를 향한 기대와는 반비례처럼 무너져 간다.
 
영화의 후반은 그렇게 나락과 재기를 반복하며 점점 초라하게 늙어가는 철수의 후반생을 따라간다. 그는 출소 후 몇 년이 채 못 되어 마약에 손을 대고 갱단과 연루되는 등 추락을 거듭한다. 급기야 자신이 일으킨 방화로 죽을 고비도 겨우 넘기고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런 실패를 겪어가며 대오각성해 말년에는 조용하게 살다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왜 죽음의 문턱에서 부여된 두 번째 인생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는지는 관객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평가가 나뉠 법하다. 그가 단지 나약해서인지 아니면 그를 주목했던 인권운동가들이 단언하던 것처럼 아시아계 미국인이 짊어져야 했던 수난의 아이콘 그 자체인 인생 때문이었는지 판단도 관객의 몫이 될 테다.
 
인생의 희로애락과 그 뒤 배경인 인종차별 문제를 증언한 성실한 기록
 
 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 커넥트픽쳐스

 
영화는 이철수가 2014년 사망하고 작게나마 그의 기구한 삶이 다시 회자되면서 미디어 활동 중이던 공동감독들에 의해 재발굴된 결과물이다. 영화 속에서 그의 구명을 도왔던 이들이 보관해 둔 당시 자료들과 인터뷰에 의지해 제작진은 이미 당사자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의 생애 전반을 재구성해 선보일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극적 몰입감을 위해 영화는 부재한 당사자 이철수를 대신할 내레이션을 적극 활용한다. 최대한 당사자의 고뇌를 감정이입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여타 방송 다큐멘터리의 무미건조한 해설조의 내레이션을 넘어서지 못했을 텐데, 이철수처럼 어릴 적 수감되어 장기간의 교도소 생활을 체험한 내레이터 세바스찬 윤의 활약 덕에 마치 생전 당사자가 빙의한 것 같은 호소력을 장착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영화가 전반부 법정 드라마로 끝나버렸다면 아마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낸 (이철수 사건을 모티브로 1980년대 제작된) 극 영화와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잊어버리기 딱 좋은 작업이었을 테다. 하지만 씁쓸한 뒷맛을 살려낸 후반부 덕분에 <프리 철수 리>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해당 사건과 당사자를 부활시켜 문제의 중심으로 복권시키는 저력을 갖출 수 있었다. 사회의 무관심과 억압적인 교정제도가 한 인간의 삶과 가능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 인권운동은 물론 사법제도 관련 고찰에도 유용한 자료가 될 만하다.
 
영화는 구한말 초창기 이민자들에 이어 한국전쟁 이후 유입된 이민세대들, 넓게는 여전한 아시아계 차별 속에서 악전고투하며 미국 땅에 뿌리내렸던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어두운 한 단면과 함께 현재까지 이어지는 차별에 맞서는 인권운동의 프로토 타입을 생생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는 효능 또한 제공한다. 그런 영화적 가치를 통해 우리는 이철수라는 개인을 넘어 이민자 세대 전반에 대한 이해는 물론, 두 개의 사회와 문화 사이 경계에 놓인 이들이 겪게 되는 애환을 강 건너 불구경을 넘어 교감할 기회를 얻는다. 아는 만큼 보이게 되는 법, <프리 철수 리>는 성실하게 간접경험을 통한 세계관 시야의 확장을 안내하는 가이드 같은 작업이다.
 
<작품정보>
 
프리 철수 리 Free Chol Soo Lee
2022|미국|다큐멘터리
2023.10.18. 개봉|86분|12세 관람가
감독 하줄리, 이성민
출연 이철수, 이경원, 유재건, 랑코 야마다, 제프 아다치
내레이션 세바스찬 윤
제작 이철수다큐멘터리 유한책임회사
배급 커넥트픽쳐스
 
2022 선댄스영화제 아마존 스튜디오 프로듀서상-다큐멘터리(김수현)
2022 로스앤젤레스 아시안퍼시픽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언급-장편다큐멘터리경쟁
2022 토론토릴아시안국제영화제 장편영화상
프리철수리 하줄리감독 이성민감독 이철수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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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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