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조선의 로빈슨 크루소' 문순득(文順得, 1777-1847년)은 조선 후기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하던 어물 장수였다. 본래대로라면 평범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갔을 문순득이 어느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며 역사에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 이유는, 우연히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서 겪게 된 파란만장한 여정 때문이었다.
 
10월 11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교양 <벌거벗은 한국사> 77회에서는 '조선 최초의 동남아 여행자, 홍어장수 문순득은 어떻게 동남아를 떠돌았나' 편을 통하여 한 남자의 운명을 바꾼 동남아 표류기를 조명했다.
 
조선 초기인 1402년 제작된 한국 역사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보면, 당시 선조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조선인들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존재까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발길이 실제로 닿은 곳은 중국과 일본 정도였고, 조선 중기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진 조선은 그나마도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더욱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갔다.

그런데 조선 후기인 1801년(순조 원년), 중국과 일본을 넘어 조선인 최초로 동남아시아까지 다녀온 인물이 등장한다. 이동 경로만 7800Km, 기간은 무려 3년 2개월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조선 역사에 최초로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뚫고 미지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기록을 남긴 사나이, 바로 문순득이다.
 
두 번이나 망망대해 표류한 문순득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문순득은 1777년 홍어의 특산지로 유명한 소흑산도(현 우이도)일대에서 태어났다. 문순득의 집안은 대대로 손질한 홍어를 배에 싣고 육지로 가서 내다파는 일을 하는 중개 상인으로 지역에서는 알부자로 꼽혔다고 한다. 문순득 역시 가업을 이어 자연스럽게 홍어장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운곡선설>에 따르면 문순득은 "비록 문자에 능한 것은 아니나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능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의 일반적인 백성들과 달리 학식은 부족했지만 관찰력과 두뇌회전이 빠른 상인 특유의 DNA를 타고났던 인물로 짐작할수 있다.
 
1801년 12월 겨울, 당시 24살의 청년 문순득은 작은 숙부인 문호겸, 선원 4명과 함께 제철을 맞이한 홍어를 가득 싣고 우이도로 향하는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난다. 키가 부러진 문순득의 배는 방향을 잃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다가 제주도를 지나 남쪽으로 끝없이 흘러내려갔다.
 
파도에 휩쓸린지 12일째, 어느덧 물도 식량도 다 떨어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문순득 일행은 기적처럼 한 섬을 발견해내고 육지에 정박한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문순득 일행에게 접근해왔다. 당시 조선인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던 시절이라 문순득 일행도 처음에는 이들을 경계했다. 그런데 문순득은 이들이 비록 말은 통하지 않고 옷차림도 달랐지만, 조선인과 크게 차이나지 않은 외모를 지닌 것에 주목했다.

문순득 일행은 손짓발짓까지 동원하며 의사소통을 위하여 노력한 끝에 이 섬의 정체가 류큐 왕국(현 일본 오키나와)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당시만해도 류큐 왕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엄언히 별개의 독립국(1879년 일본 병합)이었고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다. 한 번도 조선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던 문순득 일행에 류큐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다.
 
류큐인들은 처음엔 정체를 알 수 없던 문순득 일행을 경계했지만 통역을 통하여 단순한 표류민임을 알게되자, 음식과 옷 등 생활을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문순득은 처음 경험하는 낯선 세상에서 조선과는 또다른 류큐인들의 일상과 환경에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문순득은 장사꾼 특유의 재치와 친화력을 발휘하여 류큐어를 익히고 류큐인들과 교류하면서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문순득 일행이 류큐에 표류한 지 1년 2개월이 지났다. 류큐 정부는 외교적 문제 등으로 인하여 문순득 일행을 바로 조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 중 한 곳을 선택해야만 했다. 1802년 문순득 일행은 류큐에 표류했던 청국인들, 호송 역할을 맡은 류큐인들과 함께 청나라로 가는 배에 타기로 결정된다. 류큐와 조공관계를 맺고 있는 청나라를 거쳐서 다시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순득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있던 문순득은 하필이면 청나라로 향하던 호송선이 또다시 풍랑을 만나는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표류하던 문순득 일행의 배는 망망대해에 10여 일을 떠돌다가 다시 낯선 도시의 한 항구에 도착한다.
 
다시 한번 구사일생한 문순득이 이번에 도착한 곳은 여송(呂宋), 바로 오늘날의 필리핀 지역인 루손 섬이었다. 류큐보다도 더 남쪽으로 표류하여 동남아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필리핀 현지인들을 처음 만난 문순득 일행은 햇볕에 그을린 사람들의 피부를 보고 흑칠을 했다고 오해했다고 한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지금도 그 영향으로 '아시아의 스페인'이라 불린다. 마침 문순득이 필리핀에 표류하기 불과 1년 전에는 훗날 '성 바오로 성당'이 지어진 상태였다. 평생 조선의 기와집만 봐왔던 문순득은 신축한 지 얼마 안되는 성당을 직관하는 행운을 누리며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이국적인 풍경에 큰 감명을 받은 듯 하다. <표혜시말>에 따르면 문순득은 "신묘 한쪽 꼭대기 옆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닭)를 세워서 바람에 따라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하였다"라고 묘사하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하지만 표류민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해줬던 류큐에서와 달리, 조선이나 류큐와 외교적 교류가 전무했던 필리핀에서는 직접적으로 별다른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문순득 일행과 류큐인들은 모두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필리핀에는 중국 교민들이 진출하여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고, 청나라 표류민들이 문순득 일행과 류큐인들에게 함께 지낼 것을 제안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조선-류큐-청국인 세 집단이 차이나타운에서 한동안 기묘한 동거를 이어가는 상황이 펼쳐졌다.

정약전이 남긴 그의 이야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그런데 문순득이 필리핀에 도착한 지 약 4개월 후, 뜻밖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표류인들이 함께 거주하던 청나라 교민의 집에서 갑자기 류큐인들에게 그간의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라고 청구한 것이다. 알고보니 청나라 표류민들은 문순득 일행과 류큐인들에게는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정작 자국 교민들에게는 류큐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것.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류큐인들은 분노했고, 청나라 표류민들과의 관계는 악화된다. 류큐인들은 당초 계획대로 표류민들을 청나라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빨리 필리핀을 떠나자고 재촉했지만, 혹시 바다로 나갔다가 앙심을 품은 류큐인들의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웠던 청나라 표류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대치상태가 길어지자 류큐인들은 결국 표류민들을 내버려두고 단독으로 필리핀을 떠나 류큐로 돌아가버렸다.
 
여기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은 문순득 일행이었다. 류큐인들이 조선인 일행을 중국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문순득은 좌절하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갈 배를 장만하려면 돈을 마련해야했다. 문순득은 장사꾼의 재능을 발휘하여 이번에는 필리핀어를 익혀 인맥을 쌓는가하면, 연줄과 목재 등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여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문순득은 1년여 만에 필리핀 관리의 도움을 얻어 청나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1803년 9월 9일, 문순득 일행은 세 번째로 배를 타고 이번엔 청나라의 오문(현 마카오)에 도착한다. 당시 마카오는 이미 명나라 시대부터 왜구 격퇴를 위하여 포르투갈인들이 대거 진출해있었고, 청대에는 사실상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국제무역도시로 자리잡았다. 문순득은 여기서 서양인들을 만나서도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고, 당시 현지에서 유행하던 화폐유통구조를 목격하면서 경제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었다.
 
문순득 일행은 마카오에서 송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며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문순득 일행은 마카오를 떠나 난징을 거쳐 약 5개월간 북으로 이동하며 1804년 5월 20일에는 마침내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에 도착했고, 현지에 도착한 조선 사신단을 따라 무사히 조선으로 귀국했다.
 
1805년 1월 8일, 드디어 문순득은 꿈에 그리던 고향 우이도에 도착한다. 두 번의 표류와 류큐-필리핀-중국을 거쳐 동아시아 일대를 돌고도는 3년 2개월의 기나긴 대장정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문순득의 기적같은 귀환에 아내는 남편을 얼싸안고 부부가 함께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평범한 홍어장수의 삶으로 다시 복귀한 문순득에게, 어느날 정약전(1758-1816)이라는 인물이 찾온다. 동생 정약용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전은 공교롭게도 마침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조선 바깥의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던 정약전은, 문순득이 표류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보고 온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글을 몰랐던 문순득은 조선 밖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와 무용담을 신나게 풀어놓았다. 정약전은 문순득이 보고들은 모든 이야기를 대신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살의 나이차와 양반과 평민의 신분을 뛰어넘어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조선에 없는 새로운 것을 둘러보고 최초로 새로운 세상을 보고온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천초(天初)'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약 2년여에 걸쳐 두 사람의 대화와 문순득의 표류기를 정리한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어쩌면 막연한 소문이나 전설로만 전해지다 잊혀질 수도 있었던 문순득의 이야기는, 정약전의 노력을 통하여 어엿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편 문순득은 조선에 돌아온 이후에도 표류 시절의 경험을 살려 훗날 필리핀인들이 조선에 표류했을 때는 관리를 대신하여 통역에 나섰다는 일화도 전한다. 문순득에게는 '조선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관'이라는 타이틀도 추가된다.

문순득은 사실상 문자를 익힐 기회가 드물고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했던 조선 시대의 평민에 불과했다. 그런 문순득이 현지에서 독학으로 외국어를 습득했다는 것이나, 조선에 돌아오고나서 수년 동안 쓸 기회가 없었음에도 그 언어를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범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케한다. 시대의 한계로 인하여 그의 재능과 경험이 더 주목받고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게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이러한 문순득의 모험담은 훗날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이 집필한 <경세유표>, 이강회가 쓴 조선 최초의 선박논문인 <운곡선설>, 현재는 일본에 의하여 사실상 말살된 류큐어의 연구사 등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문순득의 체험은 당대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훗날의 조선인들이 더 넓은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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