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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먼저였다.

며칠 째 비가 내리고 있다. 일도 잠시 쉬고 있다. 때를 지켜야 할 소나무 손질도 거의 끝날 시기다. 우산을 받고 동네 커뮤니티센터에 가서 와이파이에 접속했다. 커뮤센(이곳 사람들은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다. 무심코 라인 앱을 눌러보니 사부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였다. 내일 흑송 손질하러 나간다. 7시까지 오너라. 4일 전에 온 내용이었다. 

짐 챙겨 놨으니 들고 나가라는 사부
 
장대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장대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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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다시 걸었다. 안 받는다. 평소에는 전화를 잘 걸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전화를 해도 국제전화여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 이쪽만 들어가면 그나마 괜찮은데 죄 없는 사부도 전화를 받으면 돈을 내야 한다. 그건 아무래도 서로 찜찜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전화를 잘 안 한다. 하지만 이건 비상사태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빗속에 즉시 사부댁으로 갔다. 벨을 눌렀더니 사부가 나온다. 표정이 어둡다. 우산을 접고 들어가려 했더니 들어올 거 없단다. 니 짐을 다 싸놨으니 가지고 가란다. 이건 숫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죄송하다고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러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고치겠다고 해도 그걸 니가 모르냐는 거다. 나도 화가 났다. 뭔가 오해가 있으면 말을 하고 소통을 해야지. 이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그렇게 화부터 내시나? 묵묵히 짐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사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대꾸도 안 하고 돌아서 왔다. 장대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쫒겨나는 일도 있구나. 대망의 일본 정원사 수업이 이렇게 무참하게 막을 내리는 구나.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나. 라인 문자로 작업 지시를 했는데 내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왜 사정을 묻지 않았을까? 내가 사부를 괜찮은 분으로 보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성실하게 일해 왔는데 어느 부분이 문제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하루미씨에게 먼저 알려야 했다. 좋은 분을 소개해주셨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화가 나신 것 같다고, 짐 싸가지고 쫓겨났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자세히 얘기해 보란다. 그동안 일들을 자세히 얘기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하루미씨가 진단을 내놨다. 사부가 뭘 시키든 묻기 전에는 의견을 얘기하는 게 아니란다. 내가 사부에게 말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소통을 한 것이지 구치고따에(말대답)을 한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사제 관계로 같은 배를 탔고 함께 좋은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서로 의견 교환하는 건 필수가 아니냐고.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걸 사부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사제지간이란 대화하는 관계가 아니란다. 지시하고 복종하는 관계란다. 사부가 어제는 왼쪽으로 가라하고 오늘은 오른쪽으로 가라해도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묵묵히 따르는게 제자의 도리란다. 

이해가 안 된다. 사부와 나는 이미 한 팀이 된 건데 팀이 발전하기 위해서 의견을 말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게 무슨 말 대답이고 사부를 거스르는 일이냐고... 설령 그렇다 해도 설명을 하고 가르쳐 줘야지. 갑자기 이렇게 쫓아내는 법이 어딧냐고...  

니 의견이 논리적으로 옳다해도 사부가 옛날 사람이면 그 사람에 맞춰 따라야 하는게 제자 위치란다. 하루미씨가 처음 춤 수업을 받을 때 별별 일을 다 겪었다며 제자 시절 경험담을 들려준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니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른다는 춤 선생도 모셔봤다며.

실패 없는 삶은 없다

처음에는 씩씩거리며 들어왔는데 하루미씨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상하게 설득이 됐다. 사부가 사는 쪽을 평생 바라보지도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부가 뭔 말을 하든지 알겠다고 대답하겠다는 데까지 세뇌가 됐다(내가 이렇게 쉬운 인간이라는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사실 하루미씨 말 솜씨가 대단하다. 익히 알고 있다. 수십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수십년의 춤 인생을 지켜온 것도 설득력 있는 그녀의 언행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제자들 데리고 무용발표회 현장에서 대표인사 하는 것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많은 관객 앞에서 원고도 없이 여유있게 꽤 긴 인사를 마쳤다. 나중에 내가 '총리가 국회연설하는 줄 알았다'고 놀리기까지 했었다.

하루미씨는 자기가 소개한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겼으니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를 빌어야겠다며 사부를 찾아갔다. 한참 후에 돌아왔다. 많은 말이 오갔을 시간인데 말을 아낀다. 한 마디만 전하겠단다. 

우리 선수가 뭘 잘못해서 레드카드를 받았는지 몰라도 다음 시합에 다시 뛸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했단다. 나는 절대 사부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을 거라고, 이미 짐 싸가지고 대꾸도 안 하고 왔으니 이건 완전히 끝난 거라고 했다. 그녀는 일단 기다려 보란다.
 
신은 한쪽 문이 닫히면 받드시 다른쪽 문을 열어 둔다
 신은 한쪽 문이 닫히면 받드시 다른쪽 문을 열어 둔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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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방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사는 동안 실패한 경험이 많았다. 얼마 전에도 지인과 트러블이 생겨 오랫동안 함께하던 동아리 활동을 접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조경사 공부를 시작해 다른 길을 찾았다. 결국 일본정원사 공부의 길을 열어준 건 지인과의 트러블이 계기가 됐다. 당시는 사람이 원망스러워서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며 살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됐다. 

실패 없는 삶은 없다. 세상 일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허나 그때 어려움이 나중에 뒤돌아 보면 반드시 나쁜 일인 건 아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위로가 됐다. 사는 동안 끊임없는 좌절이 있었고 어떻게든 극복해 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 다른 길은 없었고 오로지 살아 남아야 했으니. 내 삶을 이끄는 힘은 생존본능이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길이건만 또 다시 생각지도 않은 벽에 부딛혔다. 어차피 삶은 끊임없는 지뢰밭 아니던가. 세상 일 생각하기 나름이다. 비록 지금 길이 끊어졌지만 실패가 반드시 실패만은 아닐 거다. 지금 이 사태가 새로운 길을 찾는 계기를 만들수 있으면 된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감정이 앞서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천천히 냉정하게 다음 수를 생각해보자. 신은 한쪽 문이 닫히면 받드시 다른쪽 문을 열어 둔다고 하지 않던가. 어떻게든 또 새로운 길을 찾아낼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어둑해 질 무렵 저녁을 먹으려는데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사부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내일 일하러 나간다. 비가 올지 모르지만 7시에 출발한다. 오전 중에 끝날거라 생각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분명히 앞에 '국제발신'이라 찍히고 사부에게서 온 문자였다.

일단 하루미씨한테 문자 내용을 먼저 알려주려고 가게로 갔더니 외출 중이다. 남편분에게 대강 사정을 말했더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미씨 들어오시면 알려드리라고 전하고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바로 하루미씨가 아래층에서 부른다. 케이크 사러 나갔다 왔단다. 들고온 건 작은 케이크 상자와 센베 3개다. 울적할 땐 단 거를 먹어야 풀린다며... 케이크 먹고 마음을 다독인 다음, 그래도 남아있는 서운함이 있으면 센베 3개를 와작와작 씹으면서 전부 풀어 버리란다. 오늘 일 마음에 담아두지 말란다. 하루미식 처방전이다. 수호천사가 괜히 수호천사가 아니다. 

그녀는 아직 사태의 진행 상황을 모르고 있다.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온 거다. 사부한테서 문자가 왔노라고 했더니 그것보라며 얼굴이 환해진다. '니가 아무리 잘 했어도 내일 가서 사과부터 해. 설령 사부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제자에게 사부가 사과하는 법은 없어. 그게 쇼쿠닌(기술자)의 세계야.' 잘 알겠다고, 내일 만나거든 아무 소리 안 하고 사과부터 하겠다고, 오늘 많이 감사하다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직 오늘 비상사태 원인은 정확히 모른다. 하루미씨는 제자가 사과하면 된다 했으니 일단 그렇게 할 것이다. 차차 알게 되겠지. 하루미씨 진단대로라면 사부가 내 앞섶에 붙은 나뭇잎을 떼 줄 때가 발단이었던 것 같다.

기가 살아서 너무 자유롭게 내 의견을 얘기해 온 것 같다. 내 나름대로 가까움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사제 소통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간과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부는 왜 아무 말씀없이 듣고만 계셨을까? 그리고 이제와서 왜 이러는 것일까? 하루미씨는 아무것도 따지지 말라고 했다. 그게 제자의 도리라며. 입 다물고 매사에 좀 더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 삼자. 

오늘 하루가 온통 도깨비에 홀린 날 같다. 이런 날도 있어야 나중에 얘깃거리가 되려나? 밖에는 아직도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나는 하루미씨가 가져온 앙증맞은 케이크를 입에 넣고 글을 마무리 하고 있다. 달다.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일본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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