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영화의 변경에서 마침내 국내 상륙한 거장의 최신 역작
 
어떤 종류의 특별한 영화들은 볼 때는 좋았는데 막상 정리해서 남기려 하면 무진장 힘든 경우에 속하곤 한다. 한 당나귀의 여정을 담은 < 당나귀 EO >(이하 EO)는 근래 접해본 영화들 중 가장 그런 부류에 부합되는 작업이다.

이 영화에 대해 어설프게 무성의한 글을 쓴다는 건 뭔가 영화 속 주인공에게 죄를 짓는 것 같다는 기분이 거듭 들었다. 영화를 계속 보기 위해선 먼저 본 영화의 감상을 일정부분 덜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머릿속 빈자리에 다음 영화를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딱 랙에 걸려버리면 다른 영화를 감히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선 영화를 요약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현실에서 급한 볼일 때문에 택시를 타고 고가대로를 탔는데 딱 출구 진입로에서 병목현상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며 난관에 봉착한 꼴이다.
 
< EO >를 보고 난 소감이 딱 그랬다. 근 하루 내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일을 못하는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머릿속에선 몰입해서 봤던 영화가 무수한 이미지와 단상을 더해가며 소용돌이치는데, 이를 끄집어내 남들과 나눌 수 있도록 옮기는 건 너무나 어려웠다. 실로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에게만 유독 덜 알려진) 폴란드의 1938년생(!)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장구한 작품목록에서 공교롭게도 본 작품은 국내에 최초로 정식 개봉하는 사례다. 대체 지금껏 왜 한 편도 개봉하지 못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사실 감독의 영화를 영화제에서는 종종 접해 왔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미 개봉 관련 체감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절대다수의 국내 관객에게 이 거장 칭호 아깝지 않은 감독의 흥미로운 작업들이 우연히 접할 기회도 제공되지 않았다는 건 퍽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럽영화의 변방에서 오랫동안 무시당해온 폴란드 영화의 저평가와 연결해 생각할 지점도 있음직하다. 그리고 감독과 그의 영화가 국내에서 처해온 기구한 상황은 고스란히 영화 속 주인공 EO의 운명과도 통하듯 다가와 버린다.
 
감독의 영화가 국내에서 특히 부당할 만큼 과소평가되어 왔던 지라, 본 작품 역시 과연 얼마나 재평가될 지는 (요즘 한국 극장가 상황을 볼 때) 솔직히 의문이다. 그러나 < EO >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 맥이 탁 풀렸다. 이번만은 온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길 고대하게 된다. 그만큼 본 작품이 실로 엄청난 괴력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아마 한동안 이 영화의 이미지가 마치 머리 한 구석에 박힌 쐐기처럼 각인될 수밖에 없을 운명이다. 하지만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만큼 이 영화의 위력은 압도적이다.
 
인간의 잣대로만 재단당하는 동물들의 운명
 
"당나귀 EO"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당나귀 EO"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폴란드 어느 시골을 순회하며 서커스 공연에 동원되던 당나귀 EO는 학대도 꽤나 당하지만 그와 공연을 펼치는 인간 파트너 '카산드라'에겐 지극한 애정을 받는 존재다. (현실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기본적으로 당나귀는 인간의 언어로 입장을 전할 수 없기에, 관객은 그저 그의 눈빛과 동작으로 EO의 심경을 추측할 뿐이다. 이런 핸디캡을 안고 있지만 관객의 눈 앞에 비친 EO의 표정을 유추해보자면 고달파도 그런대로 견디면서 큰 불만은 없는 시간을 보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서커스단이 동물을 학대한다는 동물보호단체의 시위와 청원 때문에 지방자치단체가 공권력을 동원해 어느 날 갑자기 서커스단의 동물들을 몰수한다. EO는 파트너와 생이별을 당하고 같은 처지의 동물들과 함께 보호시설로 옮겨진다.
 
겉으로 보면 EO는 다른 서커스단 동물들처럼 구조된 형국이다. 하지만 인간 위주의 잣대로 학대당하는 동물들을 구출했다는 기쁨에 겨웠던 이들은 곧 각자의 길을 가고 잔뜩 남겨진 다양한 동물들은 곧 처치곤란 대상이 되고야 만다. 관공서와 유지들은 동물이 아니라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공치사와 기념식을 치른 뒤 뿔뿔이 흩어지고 동물들은 낯선 인간들에게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인간들 역시 구조는 했다지만 개별 동물들을 섬세하게 돌보거나 특성을 고려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EO는 당나귀이기에 비슷한 종으로 분류된 몰수된 말들과 함께 수용된다. 과거 유럽을 호령하던 폴란드 창기병, '윙드 후사르'를 태우고 전장을 누비던 말들의 후예일지도 모를 (즉, 폴란드의 국가 정체성과 연결되어 우대받을 조건을 다 갖춘) 훤칠하고 잘생긴 말들은 시설에서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게 이런 대우인지는 모호하지만) 관심과 함께 제법 대접을 받으며 지낸다. 하지만 볼품없는 당나귀에 불과한 EO는 (서커스단에서처럼) 찬밥 취급을 당한다. 외모가 빼어난 말이 사육사들에 의해 단장되고 있을 때 EO는 건초가 가득한 짐수레를 끌며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결국 한 성깔 하기로 유명한 당나귀의 천성이 발현된 탓인지 양순한 편이던 평소 모습과 달리 EO는 반은 고의로 사고를 거하게 치고 그만 쫓겨나고 만다.
 
그는 당나귀 농장으로 옮겨지지만 며칠 새 급격히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며 농가의 근심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농장주는 그를 장애아동들의 체험학습장으로 보낸다. 겨우 며칠간 시간을 보내며 그곳에서 그럭저럭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EO의 생일을 기억하던 파트너가 밤중에 찾아와 평소에 그가 좋아하던 당근 머핀을 전하고 이별을 고하며 떠나가자 그리운 나머지 EO는 담장을 허물고 탈출하고 만다. 그러나 파트너 '카산드라'는 이미 멀리 떠나버린 뒤다.
 
EO가 목격하는 인간의 넘쳐나는 폭력과 악덕
 
이제 EO는 홀로 거대한 숲 속에 남겨진다. 하지만 야생당나귀의 후손임에도 인간에게 사육되며 대를 이어온 길들여진 동물이 된 지 오래다. 야생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EO에겐 어두운 숲 속은 자유로운 공간이 결코 아니다. 그저 낯선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처음 보는 야생동물들은 숲의 이웃이 아니라 위험천만한 존재일 뿐이다. EO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자연의 경쟁자들을 피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위험은 그걸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 사냥꾼들은 과학기술의 정수인 레이저 포인터와 야간 투시경을 활용해 숲속 여기저기를 조준하며 어둠이라는 보호막도 걷어버리고 살육에 매진한다. 그 학살의 현장에서 죽임당하는 다른 동물을 구할 능력은커녕,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간신히 몸을 피한 EO는 다시 자신에게 익숙한 인간들의 마을로 향한다.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서 엉겁결에 축구 훌리건들의 난동에 휘말린 EO는 아무 영문도 모르는 상태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시합에 진 후 분노가 폭발해 상대팀을 습격한 패전 팀의 폭력 난동 와중에 앙갚음의 희생양이 되고만 것이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보복에 EO는 빈사 상태로 몰린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건 당나귀의 울음소리 때문에 페널티킥 기회를 놓쳤다는 엉뚱한 분풀이 대상으로 지목된 탓이다. 안락사를 권하는 시설 관계자들에게 수의사가 자기 본분은 일단 살리는 거라며 헌신해준 덕분에 장기간의 치료를 거쳐 겨우 살아난다.
 
하지만 볼품없는 당나귀에게 주어지는 처우는 여전히 형편없다. EO는 또다시 짐수레를 끌고 모피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그에겐 생지옥에 다름 아니다. 매일 모피를 얻기 위해 죽어나가는 철창 속 여우와 담비들의 눈빛을 겪어야 했던 그는 또다시 폭주해 대형 사고를 치고야 만다. EO의 분노는 정당한 응징의 형태로 볼 수 있지만 정작 그가 꾀했던 구조는 불가능하다. EO는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사육농장의 빈틈을 노린 말 도둑들이 침입해 그를 납치한다. 당나귀도 말 종류 아니냐는 도둑들의 갑론을박 끝에 대충 말 비슷하겠지 하는 무지의 승리로 EO도 트럭에 실려 먼 길을 떠난다. 그런데 그들의 말 도둑 목적은 고가로 팔리는 당나귀 살라미(염장 소시지) 도축용도다. 그런 전후사정은 까맣게 모른 채 EO는 폴란드에서 독일을 지나 소시지 생산 공장이 있는 이탈리아로 기나긴 여정을 이어간다. 중간에서 EO로선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인간 내의 암투가 속속 이어진다. 우연히 그를 보호해주려는 백작부인과 의붓아들을 만나지만, 그들의 기행에 적응하지 못한 EO는 또다시 자신의 의지로 그곳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가 딱히 발걸음을 옮길 곳은 더 이상 없다. 기다려주는 이도, 돌아갈 곳도 없는 EO는 그만의 순례를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여정의 끝에서 종막이 찾아온다.
 
반세기를 넘어 겹쳐지는 두 당나귀 현자의 이야기
 
"당나귀 EO"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당나귀 EO"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는 자신에게 잊지 못할 감흥을 선사한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1966년 작품이자 세계 영화 역사에서 당당히 '고전'의 반열에 오른 <당나귀 발타자르>에 대한 헌사이자 오마주로 < EO >를 제작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 헌정작업 성격의 영화를 통해 일찍이 발타자르가 보여준 것처럼 EO 역시 인간사회에 대한 고발을 감행하게 된 건 필연이자 원작에 대한 진정한 경의로 볼 수 있겠다. 온전히 EO의 시선으로만 거의 모든 전개가 펼쳐지는 < EO >는 브레송의 영화를 21세기에 맞게 리메이크한 것처럼 간주되기 쉽다.
 
하지만 반세기 전 <발타자르> 속 주인공이 처한 운명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파괴적인 이야기로 귀결된다. 영화를 만든 이들이 당나귀 주인공을 통해 펼쳐 보이려 한 시대와 인간들의 풍경이 한층 더 잔혹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발타자르의 운명과 EO의 운명은 같은 듯 보이지만 그들의 자취를 좇다 보면 다른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워낙에 헌정 형태로 작업했다는 게 분명한 작업이기에 만약 두 영화를 겹쳐서 본다면 그 비극성이 몇 배는 더 선명하고 무겁게 전해질 테다. 게다가 영화가 너무나 잘 만들어진 덕분에 그 파괴력은 훨씬 더 배가된다. 보고 나면 덜덜 떨릴 정도다.
 
영화 속에서 EO와 만나는 인간들 중 그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들이 종종 존재하지만, 그의 말없는 시선 속에 비치는 인간세상은 EO가 이해할 수도, 허용할 수도 없는 괴이쩍은 세계일뿐이다. 실제 당나귀는 붉은색을 인지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EO는 붉은색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영화 속 실제 EO의 눈에 비치는 풍경과 그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풍경 대비에서 전자는 컬러로, 후자는 레드 필터로 구분되는 묘사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런 상징적 암시를 통해 우리가 직접 소통할 수 없는 EO의 시선과 그가 느끼는 당혹감을 어렴풋이 포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EO의 속마음을 인간의 언어 대신 표현하는데 활용되는 초현실적 이미지 - EO의 눈에 비친 세상의 순류역류를 상징하는 - 의 절제된 표현은 문득 그 함의를 깨닫는 순간 저릿한 감흥을 선사할 테다.
 
EO의 눈에 비친 인간 세계는 이기와 탐욕, 부도덕으로 점철되어 있다. 서커스단에서 그는 모진 대접을 받긴 하지만 피난처 같은 파트너의 애정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그를 파트너와 생이별하게 만든 동물보호단체의 활동은 동물을 위하기보단 자기만족적으로만 비친다. 정작 EO와 동료들은 그저 보호시설을 전전하면서 운 좋게 보호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조건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는 실상이 묘사되면서 그런 심증은 확정된다. 감독은 동물복지와 권리에 대한 옹호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인간본위에 치우치는 경향은 경계하는 태도를 분명히 한다.
 
6천 년 전부터 가축으로 인간에게 봉사해온 선조들처럼 EO 역시 늘 조금만 먹고 상대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시인 백석 또한 시골에서의 생활을 다룬 수필에서 말보다 당나귀에 대한 애착을 피력할 정도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당나귀의 노고에 대해 당연시하며 편견에 찬 수많은 문화적/사회적 언급을 남긴 바 있다(하지만 정작 당나귀는 오히려 말보다 더 영리하다고 한다). EO 역시 그런 인간들의 대를 이어 물려받은 단견에 재단되고 이용당한다. 그런 인간들의 위선과 폭력적 행태를 거듭 목격하면서 EO는 점점 더 피폐해져간다. 강인한 당나귀 종의 특징 때문에 그는 훌리건들의 무차별 폭행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야생에서도 위기를 극복하지만 인간들이 망쳐놓은 세계에서 그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과연 감독은 EO의 여행을 통해 무엇을 전하려는 걸까?
 
인간과 동물의 벽을 허무는 우화의 매력과 서늘한 경고의 조화
 
"당나귀 EO"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당나귀 EO"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아마 많은 이들이 브레송의 <발타자르>와 < EO >를 한데 묶어 풀이하겠지만, 감독의 전작 <특급살인(이센셜 킬링)>과의 연결고리 또한 적지 않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면서 노장의 관록을 만천하에 떨쳤던 해당 작품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용의자로 구금된 주인공은 북유럽의 수용소로 옮겨지던 중 그가 난생 처음 겪는 극지대의 겨울에 홀로 내던져진다.

말도 통하지 않고 사방이 적대적인 낯선 환경에서 그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대가 없는 호의를 겪으며 어리둥절하기도 한다. 혹시 이 작품을 본 이들이라면 < EO >와 해당 영화 속 아프가니스탄 출신 주인공이 별반 다르지 않은 당혹스러움에 처한 것처럼 생각될 법하다. 종의 경계를 넘어 부조리한 세상에 팽개쳐진 주인공의 기이한 여정과 그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존재는 퍽 닮은 꼴이다.
 
그리스의 노예였던 이솝이 구전한 이후로 '우화'는 세상의 부조리를 쉽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 왔다. 중세에는 라퐁텐 우화가 있었고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에 걸쳐 탄생한 풍자문학들, <호질>이나 <금수회의록>도 우화에 기반을 둔 창작이다. 무엇보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감흥이 < EO >를 통해 극한으로 확장되고야 만다. 두 영화 사이의 간격,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으로 불과 반세기 동안의 시간차 동안 인간이 얼마나 더 다른 생물 종들에겐 잔인해지고 스스로 또한 망쳐먹고 있는 해충 같은 존재로 타락하고 말았는지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두 영화의 당나귀들은 그 어떤 인간 현자들보다 더 강력한 설득과 증명을 펼쳐 보인다. 영화의 원문 제목들이 굳이 '종'을 표기하지 않고 <발타자르>와 < EO >로 하나의 인격체처럼 주인공을 대하는 건 영화를 만든 이들의 태도와 경의를 전제한 것이라 보면 무방하겠다. EO의 운명과 그의 여정을 확인한 후 브레송의 영화 속 발타자르 이야기를 복습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나빠졌는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을 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제목,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처럼, 이제 감독과 EO가 던진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야 할 숙제가 관객에게 주어진다. EO가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볼 때 눈을 내리깐 채 그 거울 같은 눈동자에 비친 우리의 비겁한 모습을 훔쳐보든, 혹은 참회와 속죄의 감정을 가지든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혹시나 영화 속 동물들의 운명에 대해 염려하는 이들을 위해 감독과 제작진은 친절하게 말미에 추신을 남겨놓았다. 영화를 보고 EO와 다른 동물들을 걱정했다면 기왕 든 고민을 일상에서 더 이어나가야 할 테다. EO의 운명을 목격하고 물씬 들었던 감정이 악어의 눈물로 그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작품정보>
 
당나귀 EO, EO
2022|폴란드|드라마
2023.10.03. 개봉|88분|15세 관람가
연출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출연 타코/홀라/마리에타/에토레/로코/멜라(EO 역)
산드라 지말스키(카산드라 역), 로렌조 주르졸로(비토 역),
마테우시 코스치우키에비치(마테오 역), 이자벨 위페르(백작부인 역),
사베리오 파브리(동물 훈련사 역)
수입/배급 찬란
공동배급 (주)하이스트레인저
공동제공 소지섭, 51k
 
2022 75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사운드트랙상
2022 88회 뉴욕비평가협회상 국제영화상
2023 95회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
2023 25회 폴란드영화상 작품상/감독상/각본상/촬영상/음악상/편집상
2022 뉴욕타임스·카이에 뒤 시네마·타임·사이트 앤 사운드·인디와이어 선정 올해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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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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