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7 18:38최종 업데이트 23.09.1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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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편집자말]
"에휴! 나는 남자들이 훨씬 편해. 여자들과 어울리는 건 피곤하다고!"

한때 나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자 선배, 동기, 후배들과 어울릴 때는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내 말과 행동이 그들 사이에서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 매번 예의주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 행동을 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내가 이 말을 하면 건방지다고 생각할까? 그럼 조금 돌려 말해야 할까?


하, 정말 한숨부터 나왔다. 나는 짐짓 인생사에 통달한 듯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 맞는 것 같아"고 중얼거리며 남자들이 모인 곳에 섞여 들어갔다. 그곳은 말 그대로 '편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나는 중얼거렸다. 역시 남자들이 꼬아서 생각하지 않고, 곧이 곧대로 보고, 단순한 면이 있지. 그게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해. 복잡한 거 딱 싫어하는 나는 남자와의 관계가 더 좋아! 도대체 여성인 나는 왜 남성이 더 편했을까. 정말 남자들이 '순해서' 그랬던 걸까?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는 생전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여자 둘을 화합시키느니 전 유럽을 화합시키겠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케일린 셰이퍼의 책 <여자들을 위한 우정의 사회학>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도 여성들의 결속은 무시와 비판과 모욕의 대상이었다.

고대 철학자부터 종교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늘 여자들이란 도덕성이 부족해 우정으로 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왜였을까? 일단 여성의 우정을 표현한 역사적 근거 자료부터 찾기가 쉽지 않다. 이를 두고 일부 비평가들은 여성이 서로를 믿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하는가 하면 여성에게는 서로를 미워하고 심술궂게 대하는 유전자가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중세와 근세의 우정>의 저자 마릴린 샌디지는 이를 '터무니없는 억지 논리'라고 반박한다. 여성들은 분명 서로 친구로 지냈지만, 너무 소외된 처지였던 터라 그 증거를 찾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글은 쓴 사람은 보통 남자였다. 때문에 남자들은 여자들에 대한 자기 생각을 쓰거나 여자들의 생각을 자기들 방식으로 해석하며 여성들의 세상을 편리한 대로 재단해왔다.

반면 여성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기에, 여성 개인적 삶에 대한 내밀한 기록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로 연결된 끈 하나 없이 '집안의 원자'로 존재했던 여성들이 우정이라는 가치를 좇을 수 있었을까? 우정이라는 싹을 틔우려면 시간과 정성, 감정교류라는 햇볕과 물이 필요하지만 여성들은 그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성의 우정이 역사 뿐 아니라 소설 속에 언급되고 학문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가, 공적 공간에 여성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라는 점은 공교롭다. 즉 이때부터 여성들의 인간관계가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freiheit)와 친구(freund)는 같은 어원(fri)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에서 "자유란 원래 '친구와 같이 있다'는 뜻"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본다면 여성의 우정 역시 자유의 표현이자 독립의 증거일 터이다.

이렇듯 여성들이 자유로이 집안에서 뛰쳐나와 독자적인 사회 연결망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여성간의 우정이 본격적으로 피어올랐고, 이는 곧 사회적 결실을 낳았다. 과장된 크기의 꽃그림과 추상적으로 표현한 자연풍경으로 유명한 미국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는 우정의 힘을 톡톡히 본 작가다.

폴리처가 없었다면 오키프는

오키프가 처음부터 유명한 예술가였을까? 아니, 그녀에게도 무명 시절이 있었다. 한때 오키프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 일하던 미술 교사였다.

학교에서 일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던 그녀는 예술가로 이름을 알릴 만한 작품을 그리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자주 시달렸다. 그때마다 오키프는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오키프의 예술대학 동창이자, 먼 훗날 여성참정권 운동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친구 애니타 폴리처(Anita Pollitzer, 1894~1975).
 

28살 무렵의 조지아 오키프 홀싱어(Rufus W. Holsinger)가 1915년에 찍은 조지아 오키프 ⓒ 조지아 오키프


폴리처는 친구의 재능이 늘 아까웠다. 당시 여성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던 폴리처는 자신은 예술에의 길을 접는 게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오키프만큼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 생각에 오키프는 교사가 아니라 화가로 살아야 하는 '천상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개인적인 것을 표현한 그림이라 보고 있으면 괴로워서 곁에 두고 싶지 않아"라고 적혀 있는 오키프의 편지를 받자, 폴리처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편지에는 오키프가 그렸다는 소묘가 동봉되어 있었다.

소묘 뭉치의 포장을 풀자, 폴리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기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목탄 추상화'들이었다. 양치류, 구름, 파도에서 빌려온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종이 위에서 거대한 에너지를 뿜으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폴리처는 즉각 답장을 썼다.

"그 작품들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위대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큰 느낌을 지니고 있더구나. 내가 보는 한은 그래. 넌 뭔가 대단한 얘기를 한 거야!"
 

애니타 폴리처 조지아 오키프의 예술대학 동창이자, 먼 훗날 여성참정권 운동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친구 애니타 폴리처 ⓒ 애니타 폴리처

 
그 다음에 폴리처는 무엇을 했을까? 놀랍게도, 폴리처는 친구의 소묘 뭉치를 옆구리에 낀 채 집 밖으로 나갔다. 1916년 새해 첫날, 그것도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친구의 재능을 알아봐 줄 사람이 당장 필요했다.

그 사람은 바로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 미국미술계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갤러리 291'을 경영하던 화상이자, 예술잡지 <카메라 워크>의 발행인, 이미 그 자신이 명성이 드높았던 사진작가이었기에 적격이었다.
 

<초기2번>, 1915년, 종이에 목탄, 아키비우 조지아오키프재단 ⓒ Georgia O'Keeffe Museum / SACK, Seoul, 2023

 
폴리처는 스티글리츠가 머물던 갤러리 291의 문을 무작정 두드렸다. 전날 송년 파티로 엉망이 된 머리와 구깃구깃한 옷을 입은 채 문을 열어준 스티글리츠의 손에 오키프의 그림을 직접 쥐여 주었다. 그러곤 폴리처는 집에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오키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그림을 봤어.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받아들더니 다시 그림을 살펴봤어. 실내는 조용했고, 작은 불빛 하나뿐이었어.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어 '드디어 진정한 여성 화가가 나타났군'이라고 말했어."

그 후에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추천으로 전시를 열 수 있었고,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결국은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로 성장했다.   가끔씩 생각한다. 모두가 자신의 새해 계획을 세우느라 골몰하던 그날, 친구의 그림을 든 채 차가운 비를 뚫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남자를 찾아가는 폴리처의 마음을. 심지어 오키프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키프는 폴리처에게 이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폴리처는 친구에게 '새해 복'을 안기기 위해, 스스로가 동아줄이 되었다.

오키프에게 폴리처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미국화가'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폴리처의 헌신적인 우정 앞에서, 앞서 보았던 루이 14세의 말은 당장 빛을 잃고 만다. 오히려 루이 14세야말로 '남자의 적은 남자'라는 말의 화신이었다. 루이 14세는 친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내인 헨리에타 앤과 염문을 뿌렸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우정이라는 꽃을 피우려면
 

<소묘 8번>, 1915년, 마분지와 종이에 목탄, 뉴욕 휘트니 미술관 컬렉션 ⓒ Georgia O'Keeffe Museum / SACK, Seoul, 2023

 
그렇다면 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그동안 횡행했던 걸까. 사람은 사람과 갈등하지, 돌이나 햇빛과 대립하지 않는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충돌이 일기 마련이고, 그 속에서 모두와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같은 갈등이라도 남성들의 갈등은 '개인'과 '개인'간의 의견차로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는 반면, 여성들의 갈등은 '여성'과 '여성' 사이의 질투로 인한 대립으로 보는 데 있다.

여성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여자'라는 성별로 뭉뚱그린 것 자체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남성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남성 관람객이 가득한 콜로세움에서 여성이 검투사 노릇을 하며 '자기들끼리' 싸우는 광경은 재밌는 구경거리였을 터이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은 가부장적 권력 구조를 강화하는 부가적인 효과도 낳았다. 많은 식민지 정책들이 증명했듯, 권력을 갖고 있는 쪽은 권력을 갖지 못한 쪽이 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리에서 떨어진 사자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약자집단에 '너희의 적은 바로 너희 자신'이라는 일정한 딱지를 붙이면 그들의 행위와 삶을 일정한 방향으로 강제할 수 있다. 여성 스스로가 한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먼저 입에 올려보자. 그 순간부터 다른 여성들과 연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연 조지아 오키프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평소 귀가 닳도록 들었더라면, 자신의 작품을 흔쾌히 애니타 폴리처에게 보낼 수 있었을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따라서 사회가 남성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여성은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역설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라는데, 나는 왜 남자들 사이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던 걸까? 그것은 남자 입장에서 여자인 나는 우정을 나눌 '친구 후보 리스트'에도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나는 그들에게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보호하고 돌봐야 할 '여동생' 같은 존재이거나, 굳이 경계하고 날을 세우지 않아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알아서 사라져주는 '들러리'이거나, 어쩌면 잠재적 연애 대상인 '여자'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내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나눌 기대가 없는 그들이었기에, 내 행동과 말에 그다지 큰 에너지를 쏟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그들의 그런 한 수 접는 '담백한 태도'에 편안함을 느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수평적 관계에서 우정이라는 꽃을 피우려면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이 맞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고, 행동하기 전에 이것이 선을 넘는 것인지 상대를 서운하게 하는 일인지 한 번 멈칫하고 신중해져야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우정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이를 회피하고 '감정적 게으름'에만 빠져 지내다 보면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느 순간 내 주위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정이라는 선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지음, 이화경 옮김, 민음사, 2008
<조지아 오키프>, 리사 민츠 메싱어 지음, 엄미정 옮김, 시공아트, 2017
<화가의 출세작>, 이유리 지음, 서해문집, 2019
<여자들을 위한 우정의 사회학>, 케일린 셰이퍼 지음, 한진영 옮김, 반니, 2022
<그럴수록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이름트라우트 타르 지음, 장혜경 옮김, 갤리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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