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농구를 소재로 한 일본 스포츠 만화 <슬램덩크>는 1990년대 한국에서 뜻밖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완성도 높은 묘사와 탁월한 캐릭터성을 앞세워 <슬램덩크>는 만화 구판과 완전판, 게임, TV 애니메이션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로 꾸준히 재생산되며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다. 90년대에 중고교를 다닌 세대에게는, NBA(미프로농구)나 농구대잔치의 인기와 더불어 '농구 붐'을 주도한 아이콘으로까지 꼽힌다.
 
특히 한국에서 <슬램덩크>가 가진 위상이란, 이례적일 만큼 본고장인 일본에서의 인기를 오히려 능가했다. 그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슬램덩크는 안다'고 할 정도이며, 당시 극중 한국화로 로컬라이징된 강백호나 서태웅같은 주요 캐릭터들은 마이클 조던같은 실제 농구 슈퍼스타들과 견줘도 뒤지지않는 인지도와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로 요약된다. 또한 지난 2022년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본편 연재가 종료된지 무려 20여년만에 다시 선보인 작품임에도, 한국에서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2위에 이름을 올릴만큼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인기를 과시한 바 있다.
 
반면 <슬램덩크>가 처음 연재될 무렵만 해도, 일본에서 작품의 인기와는 별개로 농구라는 스포츠는 야구나 축구에 비하여 그다지 인기 스포츠도 아니었고 국제무대에서의 위상도 낮았다. 1990-2000년대까지 일본 농구는 아시아 무대에서조차 중국이나 한국, 필리핀, 중동세 등에 밀려 잘해야 중위권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한국농구는 당시만 해도 농구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가 더 많았고, 국제 경쟁력 또한 최소한 아시아무대에서는 중국에 이어 넘버2 정도의 위상을 구축하고 있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 (주)NEW

 

상상력이 현실이 되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슬램덩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으며 자랐던 한국과 일본의 세대가 '상상력을 현실로 바꾸어가는 다른 과정'에 있다. 사실 농구는 여러 구기 종목 중에서도 신체조건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스포츠로 꼽힌다. <슬램덩크>의 배경은 일본 학원 농구다. 실제 NBA 선수들의 캐릭터를 모델로 한 극중 일본 10대 고교생들이 정말 NBA에서나 볼 법한 덩크슛과 현란한 플레이를 펼치는 설정 자체는 사실 만화 특유의 전형적인 판타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슬램덩크>는 단순한 판타지에 머무는 것을 넘어서, 강백호라는 주인공으로 대표되는 미성숙하고 불안정한 청춘들이, 농구라는 스포츠를 통하여 도전하고 노력하며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성장 만화'로서 공감을 자아냈다. <슬램덩크>의 서사는 단지 승자와 패자의 우열을 가리는 경쟁이 아니라, 극중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농구를 왜 좋아하는지', '농구로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저마다의 답을 찾아가는 철학적인 여정이기도 하다. <슬램덩크>가 남긴 메시지와 상상력이 오늘날까지 많은 팬들에게 영감을 남긴 이유다.
 
한국과 일본의 청춘들이 <슬램덩크>를 통하여 농구의 매력에 함께 빠져들던 시대로부터 어느덧 약 30년이 흘렀다. 그리고 2023년 현재, 양국에서 농구의 인기와 위상은 각각 많이 달라졌다.

일본 남자농구는 최근 자국에서 열린 2023 FIBA(국제농구연맹) 농구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중 최고의 성적을 달성했다. 더불어 아시아 대륙에 단 한 장만 배정된 2024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권까지 따내는 기쁨을 누렸다.
 
일본농구는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했던 지난 도쿄올림픽에 이어 2회 연속 올림픽 본선 출전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자국이 아닌 원정에서 열린 올림픽으로 국한하면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무려 48년만의 자력 진출이다.
 
이번 농구월드컵을 앞두고 일본은 비록 개최국이기는 하지만, 최고 선수인 NBA 출신 하치무라 루이가 불참한데다 조편성상 최악의 조(호주, 독일, 핀란드)에 포함되면서 전패를 당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득세했다. 하지만 핀란드전에서 가드 카와무라 유키의 대활약을 앞세워 무려 18점차를 뒤집는 대역전극을 이뤄내며 이번 대회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일본으로서는 2006년 이후 17년 만에 농구월드컵 조별예선 첫 승이기도 했다.
 
일본은 순위 결정전에서도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다시 한번 13점차 열세를 뒤지는 역전승을 거뒀다. 그리고 지난 9월 2일 최종전에서는 카보베르데마저 80-71로 격파하며 3승째를 거뒀다. 이번 농구월드컵에서참가한 아시아 국가인 필리핀(1승 4패), 중국(1승 4패), 레바논(2승 3패), 이란(5패)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하며 명실상부한 아시아 1인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러한 일본 농구의 무서운 성장세는 결코 우연이 아닌 오랜 투자와 노력의 결실이다. 일본 여자농구는 이미 지난 2020 도쿄올림픽에서 북미와 유럽의 쟁쟁한 강호들을 제치고 은메달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자대표팀의 돌풍을 주도했던 미국 출신의 명장 톰 호바스 감독은 이후 남자대표팀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겨 올림픽 진출이라는 또 하나의 위업을 이뤄냈다.
 
일본 남자농구는 NBA까지 진출한 하치무라 루이와 와타나베 유타같은 선수들을 배출했다. 카와무라 유키, 히에지마 마코토, 토미나가 케이세이 등 자국리그에서도 걸출한 선수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국제무대에서도 자신감넘치고 역동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키작고 왜소한 일본 선수들'에게 대한 편견을 보기좋게 뒤집었다.
 
일본은 학원스포츠부터 체계화된 시스템을 통하여 신체조건은 조금 떨어져도 기본기와 전술 이해도가 뛰어난 유망주들을 대거 배출하고 있다. 또한 일본농구협회는 대표팀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 농구의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따라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 농구가 최근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볼수없는 이유다.
 
한국 농구 위상의 하락

그에 비하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농구 강국을 자부하던 한국농구의 현재 위상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한국 남자농구는 1996년 애틀란타대회를 끝으로 27년째 올림픽 무대를 더 이상 밟지못하고 있다. 이번 농구월드컵에서는 코로나19 감염자 속출로 아시아 예선에 불참해 실격 처리를 당했고, 시리아에서 열린 파리올림픽 사전예선도 출전을 포기했다.
 
남자보다는 경쟁력이 낫다고 평가받았던 여자농구대표팀 역시 2020 도쿄올림픽 본선 전패, 2022 농구월드컵 10위(1승 4패), 2023 아시아컵 첫 4강탈락과 올림픽 본선행 좌절까지 수모를 거듭하고 있다. 부진한 국제대회 성적과 더불어 한국농구에 대한 인기와 관심도 예전만 못한지 오래됐다. 
 
사실 농구만이 아니라 한국 스포츠는 최근 야구, 배구, 농구 등 구기 종목 전반에 일본에 크게 밀리고 있는 모양새다. 야구는 도쿄올림픽과 2023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일본이 연이어 정상에 오르는 동안 한국은 각각 노메달과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했고 한일전에서도 완패했다. 축구도 A팀과 각급 연령대별 대표팀이 일본을 상대로 몇 년째 연이어 3골차 완패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했다. 종목별 국제 랭킹도 모두 일본이 우위다. 현재로서 단체 구기종목에서 더이상 한국이 일본과 맞대결했을때 승리한다고 자신할수 있는 종목이 전무한 상황이다.
 
한때 <슬램덩크>에 일본 이상으로 열광할 정도였던 한국에서 한때의 '농구 붐'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한국은 2000년대 이후 자국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두 차례 우승한 것을 제외하면 원정 경기나 올림픽-월드컵 등 메이저그 대회에서는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못하고 있다. 일본처럼 NBA리거를 배출하거나 국제무대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스타플레이어들도 찾기 어렵다.

일본농구의 성공이 우리에게 더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신체조건이나 인종적 한계로 인하여 '세계무대에서 아시아팀은 통하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반박하는 사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보다 신체조건에서 밀릴 것이 없는데다, 실제로 한때는 전력상 한 수위였으며, 심지어 농구 인기도 더 많았던 한국은 왜 이제 일본농구을 부러워하는 처지가 되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더 큰 목표를 바라보며 성장하려는 꿈과 노력, 상상력의 차이는 아니었을까. 지난 30년간 불가능해보이던 상상을 현실로 바꾸어놓은 일본농구의 노력과 성장에 비하여, 과연 우리는 그 긴 시간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게 될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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