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6.25 전쟁(Korean War, 1950-1953)'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킨 비극인 동시에, 20세기 인류 역사의 흐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양 진영을 대표하여 전투에 파병된 인원만 전 세계 20개국 500만 명에 이른다. 미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유엔을 동원한 것은 한국전쟁이 최초였다. 또한 20세기 이후 세계 패권을 이끌어나가게 될 미국과 소련-중국이 모두 직접적으로 개입한 유일무이한 국제전쟁이기도 했다.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무모하게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나, 그럼에도 끝내 패망하지 않고 정권을 지킬 수 있었던 배후에는 소련과 중국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소련에는 이오시프 스탈린, 중국에는 마오쩌둥이라는 강력한 독재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과연 이들은 왜 6·25 전쟁에 개입하려고 했으며, 무엇을 얻으려고 했던 것일까.
 
8월 2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4회에서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왜 6·25 전쟁에 개입했나' 편을 통하여 국제 정치의 관점으로 돌아본 한국전쟁의 진실을 조명했다.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어가던 1945년 2월, 미국과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얄타 회담'을 통하여 전쟁이 종결된 이후의 전범국 처리와 세계 질서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반도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합국들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당시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었던 탓에 한반도 문제 처리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이나 방법들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는 훗날 큰 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된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에 이어, 8월 14일에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다.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운명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한반도에 입성한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북에서는 소련이, 남에서는 미국이 일본군을 각각 무장해제시키기로 합의한다.
 
소련과 미국의 분할 통치를 받던 한반도에서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먼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각각 들어서며 본격적인 분단의 시대로 접어든다.
 
1949년 3월,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은 소련의 원조를 요청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전격 방문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무력으로 남한을 침공하여 한반도를 통일시키겠다는 비밀 계획을 밝히며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 제안을 반대했다. 스탈린이 두려워한 것은 미국의 개입이었다. 2차대전 이후 최전성기에 접어든 미국에 비하여, 소련은 승전국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인명피해가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한반도에서의 분쟁으로 미국과 소련이 정면 충돌할 경우 자칫 3차세계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
 
그런데 6·25 전쟁을 불과 1년 앞둔 1949년, 한 해 동안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크게 급변한다.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소수의 군사고문단 병력만 남기고 모두 철수했다. 1947년에서 작성된 기밀문건인 '미국의 국가안보 중요성에 따른 해외국가 원조 순서'에 따르면, 한국은 아시아에서도 일본(13위)-중국(14위)보다도 낮은 15위에 그치고 있다. 당시 미국이 한반도를 국가안보전략에서 그리 중요한 지역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또한 같은 해에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최초의 핵무기인 RDS-1를 보유하게 된다. 이제는 소련이 더 이상 미국의 핵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10월에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중국의 공산화가 이루어졌다. 미국이 중국의 공산화를 방치하는 모습을 지켜본 스탈린은, 남한을 침공해도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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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또한 미국은 1950년 1월 12일에 공산주의 진영의 확장에 맞선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선언하고 일본과 필리핀을 잇는 새로운 극동 방위선을 규정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반도와 타이완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이는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2차대전 이후 폭등한 국방비와 군인력을 감축하는 정책을 추진중이었다. 제아무리 미국으로서도 전 세계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안보상 우선순위에 해당하는 지역을 위주로 방어선을 설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을 무조건 '포기한다'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타이완을 제외하며 중국에게 유화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이 당시 가장 두려워한 시나리오는 '중국과 소련의 결집'이었다. 중국이 가장 민감해하는 타이완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며 중국을 위협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소련 역시 중국이 혹시 미국의 손을 잡을까봐 경계하며 서로 팽팽한 외교전을 펼쳤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애치슨 라인 선언은, 결과적으로는 북한과 중국-소련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진영에게는 '남한을 침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시그널만 인식시킨 꼴이 됐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오판했다. 미국은 북한을 소련에 종속된 위성국가로 봤고, 군사력에 있어서도 별볼일 없다며 얕잡아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애치슨 라인 발표 하루 뒤 미국의 정보기관 CIA가 작성한 기밀문건에는 "북한군의 증강에도 남침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잘못된 정세 판단에 따른 '동상이몽'이, 결국 한반도와 전 세계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국제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애치슨 라인 발표 이후, 1950년 2월 14일 중국과 소련은 이에 대응하여 '중·소 동맹 상호원조 조약'을 맺고 상대방이 반대하는 동맹이나 집단, 조치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합의한다.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던 두 독재자,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관계는 이른바 '우호 속의 긴장'으로 요약된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겉으로는 인정하는 듯했지만, 소련의 패권 유지를 위하여 중국이 강대국이 되는 것을 내심 경계했다.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과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중국만의 독자노선을 추구하려는 속내를 품고 있었다.
 
영국 BBC의 보도에 따르면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외국 정상들이 방문했을 때 배설물까지 정보기관이 수집하여 분석했다고 한다. 마오쩌둥 역시 1949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때 소련은 숙소에 특수 화장실을 설치하여 마오쩌둥의 배설물을 검사하여 그의 건강과 심리상태까지 분석하여 협상에 활용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다시 모스크바를 비공식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을 통하여 남침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지원을 약속하면서도 한편으로 '미국의 불개입'과 '마오쩌둥의 승인'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분쟁이 미국과의 전면전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고, 만일의 경우에는 자신 대신 마오쩌둥과 중국을 전면에 내세워 혹시 전쟁으로 인하여 발생할 피해나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중국 측에 남한침공계획을 논의하는 기밀외교문서에도 스탈린의 본명이 아닌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끝까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마오쩌둥은 과연 이러한 스탈린의 검은 속내를 몰랐던 것일까? 마오쩌둥으로서도 같은 공산주의 진영이자 든든한 우방으로서 북한과의 관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국공내전 당시 북한은 중국에게 든든한 후방기지이자 고위층의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만큼 특수한 관계에 있었다.
 
다만 마오쩌둥은 북한에게 전쟁지원을 약속하면서도 오히려 스탈린과는 정반대의 조건을 제시한다. 바로 '미국이 참전할 경우에만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 역시 타이완 점령과 국민당 잔존세력 진압 등 내부적인 문제가 많아서 한반도 전쟁에 선뜻 개입하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미국의 참전이라는 최악의 조건에만 지원하겠다고 미리 선을 그어놓은 것이다.
 
또한 김일성은 중국의 공산화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전쟁으로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야심에 고무된 상태였다. 소련과 중국이라는 든든한 배후의 지원을 등에 업은 데다, 남침을 하면 남한에 있는 약 20만 명의 공산주의 세력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며 3일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운명의 6월 25일,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한반도 이남으로 진격하며 비극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전차에다가, 중국으로부터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족 출신 병력들을 지원받으며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이 발발해도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공산주의 진영의 예상과는 달리, 곧바로 참전을 결정했다. 미국 사회에는 중국의 공산화로 인한 공산주의 진영의 확산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고, 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개입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이는 자유진영을 대표하던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이어 자신들이 정부수립에 직접 관여한 남한의 공산화마저 방치할 경우, 동맹국과 국제사회에서의 신뢰를 상실할 수 있다는 부담감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 국내의 정치상황도 복잡했다. 미국 내 강경 보수파는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 확산을 방치했다며 비판 여론이 급등했다. 트루먼으로서는 어떻게든 한국 전쟁에 개입하되, 소련과의 전면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전쟁을 신속하게 종결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참전을 결정하면서도 유엔(UN)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승인을 받아 대응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자국 내 전쟁 반대여론과 미국 의회의 내부승인절차 등을 고려하여 회원국들에게 법적 구속력을 지닌 안보리를 통하여 보다 신속한 전쟁 개입을 위한 결정이었다.
 
1950년 당시 유엔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 그리고 소련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안보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지만, 그런데 소련은 의외로 반대가 아닌 기권을 선택했다.
 
스탈린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지금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일각에서는 만일 결의안을 거부하면 '전쟁의 배후'로 지목 당할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찬성하면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배신'이 되기에, 어떻게든 전쟁의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스탈린의 꼼수로 보기도 한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두 달 후, 같은 공산주의 진영이었던 당시 체코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로부터 왜 안보리 결의안에 반대하지 않았냐는 항의 편지를 받았다. 이에 스탈린은 "극동에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는 동안, 제 3차 세계대전은 연기될 것이고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굳힐 시간이 생길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애초에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그의 주장처럼 미국의 시선을 극동에 묶어놓고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큰 그림'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쟁의 양상에 당황하여 내놓은 '궁색한 변명'이었는지는 해석이 분분하다.

안보리의 결의안이 통과하며 북한은 침략국으로 규정되었고 유엔군이 조직되어 참전이 결정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미국이 유일하게 전쟁에서 유엔을 동원한 사례로 남아있다.
 
1950년 7월 1일, 유엔군이 결성되고 총 16개국에서 34만 1000명에 이르는 병력이 한국전쟁에 파병되어 활약했다. 이는 현재까지 유엔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참전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반 한국에 불리했던 전황은, 유엔군의 참전과 맥아더가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등으로 전세가 뒤집혔고 9월 28일에는 서울 탈환까지 성공하며 대반전을 맞이했다.
 
예상치 못한 미국과 유엔군의 개입으로 공산주의 진영도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 측에 김일성의 중국 망명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일성과 스탈린은 각각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 참전을 요청했지만, 마오쩌둥은 먼저 소련의 참전과 지원을 요구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하면서 다시 상황이 변했다. 반격에 나선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까지 점령한다. 맥아더는 내친김에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은 물론, 중국까지 아예 공산주의 세력 자체를 완전히 제거할 것을 주장하던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에 중국은 미국이 북한을 점령할 경우, 타이완 일대과 수륙 양면에서 포위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고심하던 태도를 바꿔 참전을 결정했다. 중국은 약 20만의 인민지원군을 편성하여 한반도에 파병했고,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전한 인민지원군의 규모는 최대 135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중국이 유엔군의 북진에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스탈린도 중국이 참전하자 비로소 공군을 투입하면서 지원에 나섰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 양측 최초의 충돌이자, 최초로 제트기 전투가 벌어진 전쟁으로도 기록된다.
 
하지만 소련 공군은 최대한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하여 조종사들에게 러시아어를 쓰지 말고 중국어나 한국어로 교신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참전한 소련 공군 조종사의 증언에 따르면 비행기에 소련 마크를 달지 못하게 했고, 부대원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한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소련 공군이 북한에 불시착했을 때 미군으로 오해받아 공격 당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혹독했던 대규모 전투로 꼽힌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국은 1만 7000명, 중국은 4만 8000명에 이르는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유엔군과 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12월 15일 흥남으로 집결하여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다.
 
이후 한국전쟁은 결코 어느쪽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어려운 소모전 양상으로 변했다. 처음부터 확전을 두려워했던 미국-소련-중국 지도부의 의지로 인하여, 1951년 3월부터 전선인 38선 일대로 고착화됐다. 지속되는 피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양측은 소련이 먼저 제안한 정전을 미국 측이 받아들이며 7월 10일부터 회담이 시작됐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교환 방식의 대립으로 휴전회담은 장기간 답보상태에 빠졌다. 여기에는 미국이 한국문제에 장기간 발목 잡히는 게 이득이라고 여겼던 스탈린의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2년여간의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양측 합쳐 30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2년간 159회의 본 회담, 765회의 각종 회담을 거치면서도 지지부지하던 협상은 1953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 출범, 소련의 스탈린 사망 등으로 비로소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해 7월 27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인민지원군 사령관, 마크 W 클라크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각 대표로 정전협정서에 서명하면서 3년 1개월 2일 만에 길고 잔혹했던 한반도의 비극은 비로소 막을 내린다.
 
정전협상의 결과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새롭게 설정되었지만, 크게 보면 전쟁 전 38선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 양측 모두 유의미한 승리도, 영토도 얻지 못한채 남북한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만 초래한 것이 한국전쟁의 씁쓸한 결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스탈린의 소련에게도 당장은 미국의 힘과 주의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거뒀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미국과의 냉전 구도와 극한 대치를 더욱 악화시키는 부메랑으로 이어졌다. 마오쩌둥 역시 불필요한 전쟁에 참전하여 중국을 개혁-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30여 년간이나 연기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전쟁은 겪어보지 않은 자에게는 달콤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의 격언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어지만 아직도 평화는 완성되지 않은 먼 이야기로 남아있다.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정치적 모략과 이합집산의 무대가 되어야 했던 아픈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잊지 말아야 할 또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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