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녹수(張綠水, 1470-1506)는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후궁이자 악녀의 대명사로도 불린다. 역시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파트너 연산군 앞에서도 눈치보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했고 왕을 쥐락펴락했다는 수많은 일화들은 유명하다.

알고보면 장녹수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시대적 한계를 딛고 왕의 여자가 되어 막대한 총애와 권력을 누린 '조선판 신데렐라'이기도 했지만, 끝내는 비극적으로 몰락하면서 결말은 동화와 달리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장녹수와 연산군 커플이 함께 남긴 수많은 일화들은, 역사적으로 '폭군과 악녀'가 결합되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비극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장녹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스토리

 
8월 23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70회에서는 '폭군을 홀린 기생, 장녹수는 어떻게 연산군을 치마폭에 넣었나' 편을 통하여 '세기의 요부' 장녹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조명했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문의현의 현령을 지낸 장한필(張漢弼)이라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천첩으로 관비를 지닌 천민 출신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서 부모 중 한쪽이라도 신분이 천하면 천민이 돼야 했다. <연산군일기>에는 장녹수가 제안대군(조선 8대왕 예종의 아들)의 가비(家婢, 사노비)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장녹수의 언니와 매부 역시 천민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장녹수의 젊은 시절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미 제안대군의 가비가 되기전부터 상당히 기구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에는 장녹수가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다' '시집을 여러 번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사회는 여성 혼자 살아가기가 불가능했던 시대였다. 당시로서 비천한 신분에 생계도 막막했던 장녹수에게 여러 번의 혼인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남자 노비와 결혼하게 되면서 왕족의 집에 사노비로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먹고살기가 빠듯했던 장녹수는, 살아남기 위하여 노래와 춤을 배워서 기생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장안에는 장녹수의 가무실력이 걸출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한다. 비록 비천한 신분 때문에 생계를 위하여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녀가 상당한 예술적 재능이 있었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부유한 왕족이던 제안대군은 종종 집에서 연회를 열었고, 그의 사노비이자 기생인 장녹수는 자연스럽게 여러 왕족·양반들 앞에서 자신의 재주와 미모를 선보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운명적인 만남 역시 제안대군의 연회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실록에는 장녹수의 노래 실력이 매우 뛰어나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 역시 시를 좋아해서 자신이 쓴 글을 모아 시집을 내고, 가면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데 능했을 만큼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그만큼 예술적인 공감대가 있었던 장녹수에게 더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녹수는 당시 이미 '나이가 30여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고 기록할만큼 상당한 동안 미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연산군은 26세로 장녹수는 심지어 연상이었다.
 
연산군은 조선 팔도의 미녀들을 색출하여 여인들을 불러들여 왕실 기생으로 삼아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가무 기생들을 가리켜 운평(運平)이라고 칭했고, 이들중 실력이 더 뛰어난 이들을 선별한 것이 흥청(興淸)이었다. 이처럼 연산군이 나라를 돌보지 않고 기생들(흥청)을 끼고 노는 것만 즐기는 것을 백성들이 한탄한 데서 비롯한 말이 바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의 어원이다.
 
장녹수는 왕의 선택을 받아 흥청으로 발탁되어 궁궐로 들어가게 된다. 장녹수에게는 천민 출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입궁한 해에 정식 후궁인 종4품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게 기생 출신이 후궁이 된 것은 장녹수가 전후무후한 사례일만큼 엄청난 파격이었다.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 실록의 기록은 장녹수가 이미 수많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다른 비법을 묘사하고 있다. 놀랍게도 장녹수는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고 한다. 신분제가 엄연한 왕정국가에서, 아무리 왕의 후궁이라고 해도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대역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마치 현대의 드라마에서 오만한 재벌2세가 가난한 신데렐라 소녀에게 쩔쩔매며 '날 이렇게 대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고 매력에 빠지는 클리세와 비슷하다. 그만큼 연산군과 장녹수의 사고방식이나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반적인 왕과 후궁의 관계와는 많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연산군의 심리 상태를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하면 '애정결핍'의 증상이 강하게 드러난다.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부재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가 깊었고, 유일하게 자신을 왕이 아니라 연인처럼 혹은 아들처럼 격의없이 대하는 장녹수의 모습에서 '모성애'의 대리만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장녹수는 이러한 연산군의 애정결핍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용한 것이다.
 
장녹수는 입궁 후 연산군와의 사이에서 딸 영수를 낳았다. 연산군은 영수를 애지중지 아꼈고 장녹수에 대한 총애도 더욱 깊어지며 입궁 1년만에 종 3품 숙용(淑容)으로 승진시킨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산군은 장녹수를 위하여 각종 특혜를 제공한다. 장녹수가 궁궐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굳이 그녀의 사가 인근의 집들을 강제로 허물고 집을 넓혀줄 것을 지시했다. 이후로도 수시로 집과 토지를 멋대로 빼앗아 장녹수에게 하사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비천한 노비 신분이던 장녹수의 측근과 가족들에게 조선의 국법을 무시하고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다. 조정 신하들이 반대의견을 밝힐 때마다 연산군은 이를 '능상(凌上. 윗사람을 능멸한다)'으로 규정하며 철저히 억눌렀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장녹수의 행동도 갈수록 더욱 대담해졌다. 장녹수는 연산군이 하사한 집과 재물외에도, 국가무역에 개입하여 관선을 이용하여 세금을 가로채 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당시 장녹수가 착복한 쌀의 양은 약 7천석으로 이는 조선의 관청들이 사용하는 일년치 예산의 약 7%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였다. 조정 신하들은 연산군의 폭주를 등에 업은 장녹수의 독단에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장녹수가 입궁한지 3년만인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발한다. 연산군은 친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사된 사건을 조사하며 어머니의 죽음과 관계된 사람들을 대거 숙청하는 피의 학살극을 벌였다. 우리가 아는 폭군 연산군의 '공포정치'가 본격적으로 악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서슬퍼런 연산군의 폭주 앞에서 조정 신하들은 더 이상 어떤 간언도 할 수 없게 됐다.
 
갑자사화 이후 3개월 후에는 도성 한양을 충격에 빠뜨린 '벽서 사건'이 발발한다. 벽서의 내용은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고 왕실의 은밀한 이야기들을 폭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벽서가 붙은 곳은 궁밖에 있던 장녹수의 사가였다. 조선의 국법상 이는 장녹수 본인도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얼마 후 벽서 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는데,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연산군을 모시던 수근비와 전향이라는 두 궁녀였다. 그녀들은 질투심에 장녹수를 헤치려고 벽서를 붙였다고 자백했다. 연산군은 두 궁녀와 부모형제들까지 모두 처형시켰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된다. 두 궁녀는 벽서 사건이 벌어지기 두달전에 다른 죄목으로 유배를 가 있었기 때문에 장녹수를 음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록에는 '두 사람은 모습이 고와서 녹수가 마음으로 시기하여 밤낮으로 참소하였다며 그 배후가 장녹수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죄없는 두 궁녀를 벽서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도 장녹수였다는 것.
 
학계에서는 장녹수가 연산군의 총애를 잃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일부로 벽서 사건을 조작하여 두 궁녀를 음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자칫하면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는 자승자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 무렵의 장녹수는 연산군을 자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조종할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으로서는 어머니 폐비 윤씨가 모함을 받아 죽었다는 트라우마를 벽서사건을 통하여 떠올리게 되면서 맹목적으로 장녹수의 편에 서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504년 7월에는 조선의 양반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이병정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종2품 고위관료였던 이병정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강아지라는 이름을 지닌 장녹수의 여노비와 시비가 붙었다. 조선사회에서 천민이 양반과 다툰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지만, 노비는 주인의 권세를 맏고 이병정에게 방자한 행동을 서슴지않았다. 이를 들은 장녹수 역시 "내가 부리는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과 같다"고 분노했고, 연산군에게 고하여 오히려 죄없는 이병정을 체포하게 한다.
 
연산군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장녹수의 편을 들어 이병정을 중형으로 처벌하려고 했다. 겁먹은 조정신료들은 이병정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병정은 결국 가산을 모두 털어 장녹수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장녹수는 이병정을 풀어주면서도 "네가 지금은 비록 방면되었지만, 내가 다시 한마디만 하면 죽게 하기가 어찌 어렵겠는가"라는 섬뜩한 경고를 남겼다고 한다.
 
이 사건은 조선사회에 신분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장녹수가 조선의 양반사회외 신분제 자체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으로 각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장녹수는 연산군의 엽색행각을 앞장서서 돕기도 했다. 조정에서 부부동반 연회가 열릴 때마다 연산군은 신하들의 아내 중 미모가 뛰어난 여성을 골라 자신의 하룻밤 상대로 지목했다. 장녹수는 부인의 머리단장이 잘못되었다는 핑계로 연회장 밖으로 불러내 연산군이 기다리고 있던 은밀한 방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여성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연회에 참석하는 사대부의 아내에게 모두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했다고 한다.
 
젊은 궁녀들을 질투하여 모함해서 죽이기도 했던 장녹수가, 정작 연산군과 다른 여인들을 연결해준 것은 얼핏 앞뒤가 맞지않아 보인다. 하지만 장녹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연산군의 사랑보다 '권력'이었다면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유부녀인 고위관리의 아내들은, 연산군에게는 하룻밤 정복의 대상일뿐 어차피 장녹수에게는 경쟁자가 아니었다. 또한 사대부 아내들은 연산군의 지목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하여 장녹수에게 아부하거나 뇌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기에 장녹수의 위세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장녹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산군의 비위를 맞춰주는데 앞장서는 방식으로 총애와 권력을 모두 지켰다. 또한 연산군은 끊임없이 여색을 탐하던 것과는 별개로 '내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녹수뿐'이라며 그녀를 변함없이 신뢰했다. 그렇게 연산군과 장녹수는 이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운명 공동체가 됐다.
 
1505년 11월에는 옥지화라는 이름의 운평이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장녹수는 평소에 옥지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예전부터 벼르고 있었고 사소한 잘못을 이유로 연산군에게 참소했다. 연산군은 '능상의 죄'를 적용하여 옥지화를 처형하고 심지어 잘린 머리를 흥청과 운평들에게 돌려보게하여 경계로 삼게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를 사실상 국왕인 자신과 동일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연산군은 신언패(愼言牌)를 만들어 궁궐의 모든 신료들에게 착용하게 하고 '입은 화의 문이요, 혀를 몸을 배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굳건하리라'라고 말조심을 경고한다. 이어 신하들이 착용하는 사모에는 충성(忠誠)이라는 글자를 앞뒤고 한 자씩 써서 붙이고 다니게 했다.
 
연산군은 우스꽝스러운 신언패와 충성사모를 착용하고 다니는 신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강력한 왕권과 태평성대를 이룩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런데 고금을 막론하고 언론을 탄압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모든 독재자들의 공통점이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연산군 본인도 폭군이 된 자신의 말로가 그리 멀지않았다는 불안감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연산군은 충직한 신하들이 사라지고 장녹수와 간신들만 남은 조정에서 매일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연산군의 폭정이 절정에 이른 1506년에는 흥청의 숫자가 무려 1만을 넘겼다고 하다. 흥청을 조정에 바치는 것으로 신료들의 인사고과를 평가하기도 했다.
 
연산군의 폭주, 그리고 파국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스토리

 
'연려실기술'에서는 연산군이 유생들이 공부하던 성균관을 오락의 장소로 만들었고, 흥청의 음탕한 놀이장소로 변하였다며 한탄하는 내용도 나온다. 연산군은 심지어 유학자인 유생들은 자신의 가마꾼으로 이용하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연산군의 끝없는 폭주는 역설적으로 그의 시대가 어느덧 파국의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복선이었다.

1506년 9월 2일, 마침내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고 연산군은 폐위된다. 이는 이전의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과는 달리, 조선 역사상 최초로 왕족이 아닌 신료들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최초의 사례다.
 
모두가 연산군을 버리고 도망쳤던 순간,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장녹수는 놀랍게도 연산군의 곁을 지키고 있다가 함께 체포됐다. 그것이 단순히 도망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인지, 혹은 연산군에 대한 진심어린 의리나 사랑이 남아있었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연산군은 폐위된 이후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보내졌다. 그리고 장녹수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참수형을 당했다.
 
처형 후 길바닥에 버려진 장녹수의 시신에는 백성들의 원성어린 돌팔매질이 쏟아졌다. 분노한 백성들은 '나라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며 장녹수를 손가락질했고, 잠깐사이에 쏟아진 돌무더기가 시신위에 가득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장녹수를 바라보는 세간의 여론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장녹수는 비천한 신분과 기구한 인생을 극복하고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생일대의 권세를 누린 입지전적인 신데렐라로 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의 여인'으로서 감당해야할 책임은 뒤로한 채 그저 사리사욕만 채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조선사에서 동정의 여지가 있거나 재평가를 받는 여성 권력자들과 달리, 장녹수는 여전히 '비선이 실세가 되어 나라를 망친 반면교사'로만 남으며 사후에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벌거벗은한국사 장녹수 연산군 흥청망청 비선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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