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밀양> 속 신애(전도연)는 아들을 죽인 가해자 살인범의 면회를 갔다 절망한다. 그 살인자는 "하나님에게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고, 그러고 나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무척이나 온화한 얼굴을 한 채로 신애에게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동의를 구한 것이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를 할 수가 있어요."
 
신애는 정신 줄을 놓는다. 이제 막 종교에 귀의해 목표를 잃은 삶을 추스르려던 차였다. 그런 신애에게 살인자의 하나님의 용서 운운은 깊은 절망과 삶의 회의를 안겨 준다. 고 이창준 작가의 <벌레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 살인자의 '셀프 회개'는 '1980년 광주' 이후 한국 사회의 오래된 상처이자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권력자들만이 아니다. 그런 가해자들은 사회 도처에 널려 있다.
 
"누구 마음대로 구원을 찾고 지랄이야."
 
여기, 학교 폭력의 피해자와 방관자가 있다. 수안보에 사는 이들은 어찌저찌 의기투합, 둘의 삶을 망쳐버린 가해자를 찾아 서울로 향한다. "구원을 받았다고? 구원? 누가 누굴? 누구 맘대로?"라는 억울한 심정으로 향한 서울에서 가해자를 맞닥뜨린 곳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어느 교회. 가해자는 웬걸, 이 둘을 환하게 반기고는 포옹과 함께 이런 의외의 멘트를 날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너네 나 벌주러 온 거지? 그거 나한텐 기적이고 축복이야."
 
<밀양>의 구조와 사이비 종교라는 소재 
 
 영화 <지옥만세> 관련 이미지.

영화 <지옥만세> 관련 이미지. ⓒ 한국영화아카데미

 
<지옥만세> 속 '쏭남' 송나미(오우리)는 학교 폭력의 방관자이자 피해자였고, 따돌림의 동참자였다. 가해자 집단의 '여왕벌' 박채린(정이주)의 말에 고분고분했던 지난날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렸다 자책하는 중이기도 하다. 피해자인 '황구라' 황선우(방효린)와 의기투합을 하게 된 계기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살아 뭐해, 어차피 망했고 앞으로도 망할 텐데"라며 수안보의 한적한 폐목욕탕에서 목을 매다는 일을 먼저 실행에 옮긴 결단력 있는 송나미에게 곧 뒤따라 가겠다던 황선우가 박채린의 근황을 알려준 게 화근이었다. 맞다. 소셜미디어가 만악(?)의 근원인 세상이다.
 
집이 망해 야반도주했다던 박채린은 서울 가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고, 황선우는 그 소식을 듣고 부글부글해 하던 송나미에게 이런 눈치 없는 멘트를 날린다. "걔 너 죽어도 상관없이 쭉 잘 살 걸". 이대로 생을 마감할 순 없다. 이런 꼬락서니로 전락한 것도 알고 보면 다 박채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 박채린 인생에 기스라도 내야 하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둘은 어차피 가기 싫었던 수학여행을 '보이콧' 한 채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이처럼 <지옥만세>의 도입부는 매력적이면서 발칙하고 그래서 더 활력 넘친다. 이 두 '학폭'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살 소동극은 진지한데 귀엽고, 귀여워서 더 안쓰럽다. 두 배우의 캐릭터나 연기 톤이 딱 그렇고, 이를 잡아내는 촬영이나 편집의 리듬도 그런 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학폭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은 오프닝부터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의 소동극은 간결하고 경제적이면서도 엉뚱한 10대 둘의 여정과 연대를 무조건 응원하고 기대하게 만든다. 이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다. 그리고 나선 효천선교회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피해자들의 복수가 가해자의 기적이고 축복인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박채린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없이 친절하기만 한 한명효(박성훈)가 가식적인 미소로 박채린을 무조건 감싸 도는 것도 모자라 '불신 지옥' 비슷한 말로 아이 신도들을 협박할 때부터 지옥도의 단초가 드리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돈 없고 갈 때도 마땅찮은 이 두 피해자가 고작 교회에서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사이 '고딩'들이 쉬이 마주하기 힘든 사건을 겪게 된다.
 
자칫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두 세계의 조화로운 동거라 할 수 있겠다. '학폭'과 '이단 사이비 종교'라는 두 세계 말이다. '학폭'은 이제 K-드라마의 단골 그림이요, '사이비 종교'는 여러 완성도 높은 장단편 독립영화들이 다뤘던 소재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연대 역시 <지옥만세>로 장편 데뷔한 임오정 감독이 전작 단편들에서 천착했던 주제다. <지옥만세>의 매력은 어쩌면 너무 친숙하거나 식상할 수 있는 소재나 그림들을 예측 불가한 전개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 안정감 있는 연출을 통해 독창적이고 신선한 여성서사로 버무려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밀양>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듯 '사이비 종교'로 살짝 소재를 뒤튼 '셀프 회개'와 용서라는 테마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쏭남과 황구라의 미소와 연대
 
 영화 <지옥만세> 관련 이미지.

영화 <지옥만세> 관련 이미지. ⓒ 한국영화아카데미

 
이 아이들은 모두 부모에게 소외됐거나 충분하게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황선우의 부모는 아픈 동생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느라 동생의 돈을 훔쳐 가출하는 첫째 딸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다. 홀로 호프집을 운영하며 생활력 '갑'을 자랑하는 송나미의 엄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채린의 엄마는 딸을 사이비 종교 집단에 맡겨 두고 먼저 외국으로 떠나 버렸다. 여기서 믿음을 키우면 자신과 함께할 수 있다는 믿지 못할 약속을 남겨 둔 채로.
 
<지옥만세>는 그런 아이들의 복수 아닌 복수와 용서 아닌 용서를 그럴싸하고 납득 가능한 연대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서울 어느 허름한 빌딩 안에서 아이들이 숙식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이다.
 
아이들끼리 경쟁에, 가족 이기주의에, 범죄에, 학대에, 해외로의 도피에,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이 사이비 집단이야말로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어떤 집단성의 단면을 은유할 텐데, <지옥만세>의 장점은 그 집단 안에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을 밀어 넣고서도 어떤 극단적이고 강압적인 폭력의 상황이나 이를 강요하는 듯한 심정적인 착취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만, 섬세한 시선과 그런 영화적 언어로 그 종교 집단에 내재된 폭력과 이를 마주한 두 피해자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회개와 용서라는 구조적인 전제도 마찬가지다. 10대 아이들에게 그런 고민은 사치라는 듯, 감정의 폭이 너른 '쏭남'은 좀 더 적극적으로 박채린의 입장에 감정을 이입한다.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황선우도 종국엔 본인의 맹신으로 망가져 버린 박채린의 요지부동 선택을 크게 비난하지 않는다. 목숨까지 위태해지는 상황 앞에 놓인 이들 세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택과 셀프 구원의 행위 앞에, 다시 말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뒤틀린 세계 안에 뒤섞여 버린 아이들의 선택과 행동 앞에 강조되는 것은 느슨한 화해와 내일을 희망케하는 연대일 뿐이다.
 
프랑스 혁명 시대 민중들의 실제 구호에서 따 왔다는 <지옥만세>는 고전적인 서사가 탄탄한 10대 모험 활극이요, 넷플릭스 하이틴 드라마 시리즈에 친숙해진 그 눈높이 관객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영민하면서도 완성도와 의미, 재미를 모두 만족시키는 걸출한 데뷔작이다. 
 
함께 죽으려던 둘이 미소를 짓고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분명 함께 미소를 보내며 응원을 보내는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쏭남과 황구라, 두 여고생의 이 가출 활극을 관객들이 극장에서 더 오래 만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다.
지옥만세 임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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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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