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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 시계를 보니 밤 1시 32분이었다. 저녁 무렵에 친구를 만난다고 나갔던 딸아이가 그때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밤 12시쯤부터 어디에 있는지, 언제 들어올 건지 묻는 문자를 보내고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했지만, 아이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반복하다가는 결국 막차를 놓쳐버렸다. 그리고선 어차피 막차를 못 타게 되었으니 좀 더 놀다가 택시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그 심정이 이해는 갔다. 재수까지 해서 갓 대학 신입생이 되었으니 얼마나 놀고 싶었을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는 날에 엄마인 나는 온통 신경이 곤두선다. 잠도 못 자고 핸드폰만 붙들고 있다.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내 문자에 아이는 애교 섞인 말투로 같이 있는 친구들 사진까지 찍어 보내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고 걱정은 점점 화로 변해가곤 했다.

아이 믿어주는 부모였지만  
 
새벽 2시가 넘어서도 귀가하지 않는 딸이 걱정이 돼 견딜 수 없었다. 도시의 어두운 밤(자료사진).
 새벽 2시가 넘어서도 귀가하지 않는 딸이 걱정이 돼 견딜 수 없었다. 도시의 어두운 밤(자료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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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내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참견하는 극성스런 엄마인가 하면, 오히려 아닌 쪽에 가깝다. 큰아이 때는 오히려 아이가 언제 들어오는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친구들과 며칠간 여행을 가도 돌아올 때까지 문자 한통도 보내지 않아 지청구를 듣던 무심한 엄마였다. 평소에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탓에 일부러라도 관심을 줄이려고 했다.

눈 앞 현실은 달랐다. 결국 새벽 3시가 다 되어 현관문을 들어서는 아이에게 나는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다. 아이의 늦은 귀가에 대한 걱정에다가, 잠들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그 뒤론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갱년기 불면증의 괴로움까지 더해져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엄마가 차 끊기기 전에 오라고 했지."
"엄마, 내가 어린애야?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좀 놀다 온 건데 왜 그렇게 난리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집에서 걱정하는 건 생각 안 하니?"
"그래서 사진도 보내고, 계속 엄마 문자에 답도 했잖아. 내가 엄마 문자에 답하느라고 계속 핸드폰 들여다본다고 애들이 얼마나 흉봤는지 알아?"


아이에게 늦게 들어왔다며 화를 내기는 했지만, 사실 대답하는 아이 말에도 틀린 건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더 놀고 싶은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그것보다도 본질적인 건 가해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가해자인데, 왜 딸아이에게 화를 내야 하나 

사실 밤이든 새벽이든 일이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고 해치는 이들이 활개치는 사회가 문제인 것을, 마치 딸이 늦게 다니는 게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점점 대꾸할 말이 궁색해졌다.
 
서울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 최모씨가 8월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관악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 영장심사 향하는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피의자 서울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 최모씨가 8월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관악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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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흘이 멀다하고 범죄소식들이 전해지고 있다. 주로 야심한 시각에,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나 일어나던 범죄들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저녁시간에, 그것도 지하철역과 백화점 한복판에서 벌어진다. 곳곳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최근엔 서울 주택가 인근 산책로에서 벌건 대낮에 성범죄가 벌어졌다. 피해자는 결국 숨졌다고 한다(관련 기사: 등산로 사망 피해자, 출근 중 참변... "출근한다고 만나기로 했는데" https://omn.kr/25a1p).

특히나 혼자 사는 여성들을 뒤쫓아가 범죄를 저지르고, 젊은 여성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는 사건을 접할 때면 두 딸의 엄마인 나는 남 일 같지 않아 등골이 오싹해진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두 딸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딸들에게 잔소리 많은 엄마라고 핀잔을 들을지언정 귀가시간을 단속하고, 부디 그런 불운이 내 딸들에게는 피해서 가주기를 바라는 일 뿐이라는 현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가끔은 절망감마저 든다.

거의 40여년을 살았던 곳을 떠나 지금 동네로 이사오면서 유난히 변화에 대한 적응이 더딘 내가 낯설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동네에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건, 아파트 옆에 있는 자그마한 뒷동산 덕분이었다.
   
딸인 나를 걱정하는 나이 든 엄마 

매일 아침 혼자서 산에 오르면서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이 루틴이 되었고, 숲길을 걸으며 조용히 사색하는 것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던 나의 일상. 그런 이 일상이 최근 대낮 공원에서 일어난 성범죄 사건으로 인해 깨져버렸다. 얼마 전엔 내 엄마도 나를 걱정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OO아, 이제 산에 가지마라."
"엄마, 엄마도 이제부터 혼자서는 절대 산에 가지마."


나이 50이 넘은 딸을 가지신 여든 넷의 노모도 딸인 내가 다칠까 세상이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처럼 내가 혼자서 산에 갈까 봐 단속하느라 다른 가족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울창한 나무들과 풀벌레 소리가 아름답게만 느껴지던 뒷동산이 하루아침에 무서운 우범지역으로 전락해버린 게 속상하다.
 
매일 뒷동산에 올라 숲길을 걸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안전한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매일 뒷동산에 올라 숲길을 걸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안전한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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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의 엄마인 나는 요즘 세상이 무섭기만 하다. 

온 국민을 일대일로 전담해서 보호하거나 혹은 감시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상상이겠지만, 적어도 딸들을 조심시키는 부모의 걱정과 잔소리만이 범죄에 대한 유일한 예방책이 되는 사회는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딸아이의 밤늦은 귀가에도 내가 발 뻗고 편히 잠잘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란다. 뒷동산에 올라 숲길을 걸으며 매일 아침 멀리 계신 노모와 전화로나마 도란도란 얘기나눌 수 있는, 그렇게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안전한사회, #사회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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