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수>의 한 장면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주)NEW

 
한국 영화, 드라마에 자막 열풍이 불고 있다.

외국어를 이해하기 어려운 관객, 시청자를 위한 번역으로만 기능했던 자막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도 점차 도입되고 있는 것. 청각 장애인의 시청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순기능도 있지만 그만큼 한국 콘텐츠 제작진들이 음향에 신경 쓰지 않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지난 7월 26일 개봉해 46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질주 중인 영화 <밀수>는 한국 영화 최초로 한글 자막 화면해설(CC) 상영을 시작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뿐만 아니라 칼로 찌르는 소리, 뱃고동 소리, 배경음악까지 모두 자막으로 묘사한다. 노래 가사의 경우 노란색 글씨로 구분되어 쓰인다.

그동안 영화 개봉 이후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 일부 특별관에서 배리어프리 자막 상영을 진행한 경우는 있었지만, 개봉과 동시에 일반 상영관에서 자막 상영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번이 최초다.

그 시작은 지난 6월 한국농아인협회에 도착한 편지 한 통에서부터다. 배우 김선호의 오랜 팬이라 밝힌 청각장애인 이모씨는 영화 <귀공자>를 자막 없이 보려다 보니 영상으로만 내용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와 장애인 단체가 이에 화답한 것.

영진위는 장애인 관객의 관람권을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주요 배급사, 극장 멀티플렉스 3사, 장애인 단체 등과 협의체를 구성하고 개봉 전에 한글 자막 및 화면해설을 제작하고 상영관 편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지난 2일 개봉한 <더 문>과 <밀수>가 우선적으로 한글 자막 지원 대상이 되었다. 오는 9월에 개봉하는 하정우, 임시완 주연의 < 1947 보스톤 > 역시 자막 상영관이 편성되며, 12월까지 추가로 서너 편의 최신 한국영화들이 자막 버전으로 영화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관객 반응은 '긍정적'... 꼼수 비판도
 
 영화진흥위원회 '한글 자막(CC)' 상영 프로모션 이미지

영화진흥위원회 '한글 자막(CC)' 상영 프로모션 이미지 ⓒ 영화진흥위원회

 
관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청각 장애인 관객뿐만 아니라 비장애인 관객들도 자막 상영을 반기는 분위기다. 실제로 영화 커뮤니티나 SNS에도 "이왕이면 자막으로 보겠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한글 자막 상영을 보기 위해 <밀수>를 두 번이나 관람했다는 김예슬씨는 "처음에 자막 없이 봤을 때는 몰랐는데 자막 버전으로 다시 보니까 내가 놓쳤던 대사들이 많았다"며 "영화를 더 풍부하게 즐기고 있다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영진위는 1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내부적으로 사업에 대한 평가를 위해 한글 자막 상영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하고 있다. 아직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한글 자막 상영에 생각보다 젊은 관객들의 호응이 있다고 들었다. <밀수>의 경우 음악이 많이 나오는데 가사들이 다 자막으로 나오니까 좋았다, 익숙한 노래여서 가사를 보면서 영화를 보는 게 즐거웠다는 호평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궁극적으로는 외화를 볼 때 (관객들이) 한글 자막과 더빙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영화도 자막이 있는 버전과 없는 버전을 선택해서 볼 수 있는 관람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비장애인 관객들도 자막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자막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결과를 받는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반면 일각에서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꼼수를 찾은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온라인 커뮤니티, SNS 등지에는 "대사가 잘 안 들린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불만 토로가 적지 않다. 1년에 열 번 이상 극장에 간다는 신윤정씨는 "한국영화를 볼 때마다 대사가 잘 안 들린 적이 많다. 효과음 소리는 작지 않은데 대사가 잘 안 들리는 건 음향 문제가 아닌가. 한글 자막도 좋지만 음향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상파 및 종합편성 채널 드라마에서도 자막 방송
 
 SBS <악귀>의 한 장면

SBS <악귀>의 한 장면 ⓒ SBS

 
영화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지상파 및 종합편성 채널 드라마에서도 자막 방송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지난 4일 첫 방송된 MBC 금토 드라마 <연인>은 재방송에서 한글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3일 종영한 TV조선 <아씨두리안>에서도 일부 대사에 한해 자막 연출이 사용되기도 했다.

MBC 콘텐츠 프로모션부는 1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저희가 정책적으로 앞으로 모든 드라마의 재방송에 자막을 넣겠다고 결정한 상태는 아니다"라면서도 <연인>은 1, 2회에 조선시대 고어, 방언 등을 활용한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막 서비스를 하기로 결정했다. 시청자 분들도 자막을 선호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본방송에서는 자막을 달지 않고 재방송에서만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SBS는 지난 2월부터 <법쩐> <트롤리> <모범택시 시즌2> 등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은 일부 드라마 재방송에서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자막을 제공한 것은 SBS가 최초였다.

SBS 관계자는 18일 <오마이뉴스>에 "드라마 재방송에 자막을 탑재한 이후, 본방송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장르물 드라마의 편성 비중이 높아진 상황에서, 의학, 법학 등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등장해 이해가 어렵거나, 긴박한 상황에서의 액션, BGM 등의 요소로 인해 순간 대사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재방송으로 다시 보는 과정에서 자막 서비스가 해당 장면의 이해도와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증가시켰다는 평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본방송의 경우 자막 설정을 선택할 수 없고, 일괄적인 자막 도입으로 인해 연출적 요소나 연기에 대한 집중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이견도 있어, 반영 계획이 없다"고 덧붙여 전했다.

"일반인에게도 자막이 유용하게 쓰여"
 
 MBC <연인>의 한 장면

MBC <연인>의 한 장면 ⓒ MBC

 
한국 영화, 드라마에 자막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요인으로 OTT 열풍을 꼽는 사람들도 많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들이 한국어 콘텐츠에도 청각 장애인을 위한 한글 자막을 제공하기 시작한 게 지금 영화나, 드라마의 자막 서비스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

국내에서 한글 자막 서비스를 가장 먼저 도입한 쪽은 2016년 한국에 진출한 넷플릭스다. 지난 2011년 미국 청각장애인협회는 장애인용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 OTT 업체들에게 소송을 걸었고 이후 미국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자막을 필수적으로 넣도록 규제하는 법이 마련됐다. 한국에서 넷플릭스 작품들이 인기를 끌면서 시청자들도 한글 자막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티빙, 웨이브, 왓챠 등 국내 OTT 업체들까지 모두 한글 자막을 제공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비장애인 시청자들도 자막에 익숙해졌고 지상파 드라마나 한국 영화 역시 이러한 트렌드에 발 맞추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OTT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자막 없이 콘텐츠를 보는 게 오히려 낯설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23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과거에는 자막을 보는 게 불편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말했듯, '1인치 자막이 장벽이 될 수 있었'고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 한국은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자막이 있어서 편리하게 느끼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보다 명확하게 대사를 볼 수 있으니까"라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정덕현 평론가는 "예전에는 영화관에서 자막을 보는 것만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동하면서도 콘텐츠 소비를 하지 않나. (이동할 땐) 자막이 없으면 실질적으로 콘텐츠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 자막에 익숙해지고, 자막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자막이 불편하지 않다는 건 곧바로 (자막의) 기능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편리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청각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한 기능일 수도 있지만 일반인에게도 자막이라는 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글자막 밀수 영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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