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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같은 편인데 왜 후세 사람들이 나누는지 모르겠다."

지난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에서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날 윤 대통령은 이종찬 광복회장에게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며 위와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구 선생의 손녀인 김미 김구재단 이사장 역시 "지금 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을 두고 갈라져 싸우는 분위기 같다"며 "대한민국은 하나이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힘을 합쳤었는데 후세 일부가 이간질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 것으로 언론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2023년 8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 모습
 2023년 8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 모습
ⓒ 대한민국 대통령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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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발언, 사실일까 

하지만 나는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같은 편'이라고 단순하게 요약하는 건 역사 왜곡에 가깝다고 본다. 김구와 이승만은 결코 같은 편이 될 수 없는 사이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 직후 두 사람은 잠깐이지만 서로 손을 잡은 적도 있었다.

당시 당면 과제는 한민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정부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한반도에 대한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와 이승만은 즉각적인 반탁운동에 돌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1946년 이승만과 김구.
 1946년 이승만과 김구.
ⓒ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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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46년 6월의 일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로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미·소 간의 의견이 대립하며 좀처럼 의견을 좁히지 못하자 이승만은 6월 3일 "통일 정부 수립이 어렵다면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는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이른바 '정읍 발언'이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구의 입장에서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진의 회고에 의하면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이 UN 한국임시위원단의 입경을 거부하는 등 정세가 단독정부 수립으로 흘러가자 김구 역시 점점 고립돼 갔다. 김구는 '국제형세역행자(國際形勢逆行者: 국제 형세를 거스르는 자)'라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고, 독립운동가 진영에서조차 통일 정부냐 단독 정부냐를 놓고 분열이 일어났다.

상하이 시절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 문일민은 1925년 3월 임시의정원 의원 자격으로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공동 발의했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독립운동하던 시절에도 탄핵을 당해 쫓겨났던 이승만이 해방된 조국에서 또다시 분열을 야기한 데 분노해 김구와 김규식 앞으로 이승만을 비난하는 유서를 남기고 1947년 10월 25일 중앙청(미군정)에서 스스로 배를 갈랐다(중앙청 할복 의거).

당시 유서 내용 일부를 옮겨본다.

[김구 앞으로 보낸 유서]

"나라는 미·소 양군이 점령하는 바 돼버렸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국토양단의 슬픔도 모자라 좌우로 쟁투를 벌이더니 대한민국의 법통을 이어온 임시정부마저 부정을 당한 마당에, 주석(김구-기자 주)과 우남(이승만-기자 주) 양 영수의 의견까지 불일치하니 불초(不肖)는 혁명가로서의 이 한 몸을 제단에 바쳐 양 영수의 각성을 진작 호소코자 단심(丹心)을 뿌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라건대 주석께서는 그 넓은 도량으로 우남을 설복하고 일신동체로 합력하여 기어이 통일독립 달성의 초지(初志)를 관철하소서…."

[김규식 앞으로 보낸 유서]

"우남은 자고로 내분의 제1인자이더니 이제 와서는 자기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던 임정의 법통마저 무시하고 단정 수립의 아집과 권세욕으로 민족 분열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우사(김규식-기자 주)께서는 그 밝은 통찰의 형안과 학덕의 높은 견식으로써 김구 주석과 노선을 함께 하시어 겨레와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여 주소서…."

문일민의 유서에서 드러나듯이 당시 김구와 이승만은 이미 분열한 상태였다. 그리고 분열을 야기한 장본인은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문일민의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그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중략)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이는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이승만에게 결코 협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이제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정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북협상을 시도하는 등 끝까지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세우려던 김구의 노력은 끝내 좌절됐고, 시세에 부응했던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꽃놀이 조작 사건'

1949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에 모두의 시선을 끄는 한 장의 사진이 실렸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김구가 모란꽃이 만발한 덕수궁을 찾아 함께 꽃놀이를 즐기는 사진이었다.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과거 우리들의 노력 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며 이승만과의 합작 의사를 밝힌 김구의 인터뷰도 실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김구와 이승만이 극적인 화해라도 하게 된 걸까.
 
1949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김구의 덕수궁 꽃놀이 사진. 이 사진은 조작된 사진으로 밝혀졌다.
 1949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김구의 덕수궁 꽃놀이 사진. 이 사진은 조작된 사진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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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진은 조작된 사진이었다. 인터뷰 역시 거짓이었다. 해당 보도가 나간 직후 김구의 비서였던 엄항섭은 "우익 기자의 희망섞인 기대였을 뿐"이라고 반박했고 이승만 정부 역시 오보에 항의했다. <동아일보>의 꽃놀이 조작 사건은 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김구와 이승만이 화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기자가 벌인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이러한 바람과 달리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 조작 사진을 다시 게재했다는 이유만으로 5월 29일 자 <비판신문>을 압수했다. 김구 측 역시 "결코 현 정부를 민주적인 정부로 간주한다는 뜻이 아니다"라며 굳이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던졌다. 이미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가 되어 있었다.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

한 달 뒤인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자신의 사저인 경교장에서 이승만 정권의 사주를 받은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목숨을 잃었다.

안두희는 죽을 때까지 이승만의 암살 개입 여부에 대해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김승학,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이승만은 김구 암살 계획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사건 처리에 있어서 이승만이 개입한 것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암살범 안두희는 6.25 전쟁 와중에 슬그머니 복직하여 육군 중령까지 진급했다. 국사범이었던 안두희가 석방된 것도 모자라 군에 복귀하여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정권 차원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승만의 묵인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에 1995년 국회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는 "적어도 이승만 박사는 암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구 암살의 책임에서 이승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 어디까지 갈 생각인가 

이처럼 김구와 이승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기에 결코 같은 편이 될 수 없었다.

심지어 김구 암살의 유력한 배후로 이승만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을 같은 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평생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기록에서 백선엽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기록을 삭제하더니 이제는 이승만 기념관 건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김구를 끌어들이기까지 하는 윤석열 정권의 행보가 경악스럽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고 목불인견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인가.

태그:#김구, #이승만, #문일민, #윤석열, #박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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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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