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은 물론 밤중에도 매미 소리가 멈추지 않는 여름이다. 간혹 도시인들은 그 소리가 성가시다고 하는데 다행히 나는 그렇지는 않다.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비행기 소리 등에 비하면 매미 소리는 음악에 가깝다.

잘 들어 보면 운율감이 느껴진다. 매앰매앰매앰 매애애애. 오늘따라 매미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니, 매미가 우리 집 방충망에 붙어 있다. 내가 가까이 가니 소리를 멈춘다. 날아가지 않고 붙어 있다. 휴대폰을 켜고 카메라를 들이대는데도 가지 않는다. 덕분에 사진까지 찍을 수 있었다.
 
우리집에 찾아온 매미 어느날 아침 우리집 방충망에 매미가 찾아와서 한참을 쉬다 갔습니다. 밤새 울었던 것 같습니다.

▲ 우리집에 찾아온 매미 어느날 아침 우리집 방충망에 매미가 찾아와서 한참을 쉬다 갔습니다. 밤새 울었던 것 같습니다. ⓒ 강지영

 
매미를 글 대문에 걸어 놓은 이유는 연극 <변신> 때문이다. 며칠 전 딸아이와 함께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았다. 연극을 보기 전에 책으로 읽었다. 학창 시절에 책으로 읽기는 했는데 다시 펼쳐보니, 그 옛날에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로 변한 사람의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참 쯧쯧! 이제라도 다시 읽게 된 것이 다행이다 싶다. 그러니 여러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재독 삼독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변신>처럼 좋은 고전은 재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 <변신 시골의사> 민음사 연극<변신>의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 <변신 시골의사> 민음사 연극<변신>의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 강지영

   
책을 읽으면서 연극에서는 어떻게 표현될지 상상해 보았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분장은 어떻게 하고 나올지 궁금했다. 혹시나 흉측한 벌레의 모습을 하고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 벌레의 모습이 나중에 꿈에도 나타나면 어찌할까 상상하다가 더위까지도 날렸다. 설렘과 긴장하는 마음을 안고 '공간 아울' 소극장에 들어섰다. 공연장은 지하에 있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는데 계단 양옆으로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공연 시작 15분 전에 입장을 하였다.

관람객이 꽉 들어찼다. 공연 시작 전에 음악이 흘러나왔다. 듣고 있으니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안정감이 찾아왔다. 딸아이에게 음악 참 좋다고 하니, '위대한 쇼맨' OST라고 한다. 곡명은 'Never Enough' 피아노곡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연극<변신> 포스터 '공간 아울'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연극<변신>의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습니다.

▲ 연극<변신> 포스터 '공간 아울'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연극<변신>의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습니다. ⓒ 강지영

   
7시 30분이 되자, 연극이 시작되었다. 무대장치가 독특했다. 지름 6cm 정도의 쇠기둥이 무대 대부분에 얼기설기 놓여 있었다. 소품이라고는 그레고르 아버지가 사용한 긴 대나무가 다였다. 출연자의 복장도 변함이 없었다. 출연자의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움직임만으로 극을 이끌어 갔다. 잡다한 무대장치나 소품이 배제되어서 오히려 몰입도를 높였다. 내가 걱정한 것, 그레고르의 분장도 기우였다.

그레고르 역을 맡은 배우 정형렬은 검은 바지에 웃옷을 완전히 벗고 나왔다. 몸에 어떠한 분장이나 소품도 걸치지 않았다. 맨발에 맨몸. 벌거벗은 몸이 벌레의 나약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했다. 웅크린 몸 손가락과 발가락의 움직임. 벌레로 변신한 자신의 몸, 그리고 가족들로부터의 외면과 소외에 절규할 때에는 배우의 목에 드러난 핏줄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배우의 배 부분도 잘 볼 수 있다. 특히 배우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땀 흘리며' 열연하였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그 쇠기둥 속을 기어 다녔다. 쇠기둥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다가 웅크리기도 하였다. 그레고르의 아버지가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긴 대나무 막대로 배를 찌르며 몰아내려는 동작이 연출되는 순간에는 조명이 빨갛게 켜지고 공포감과 긴장감이 엄습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서 책 제목이 '변신'이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연극을 보면서 느낀 건, 그레고르의 변신은 몸만 변했지 마음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부모와 여동생의 생계를 걱정했다. 마음이 변한 것은 부모와 여동생. 변신이 아니고 변심인가, 아무튼 부모와 여동생은 마음이 변했다. 집안 경제를 꾸려왔던 그레고르. 그가 벌레로 변해서 더 이상 가장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가족 모두는 그를 혐오했다. 남들 눈에 띌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레고르는 가족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데, 가족은 그레고르의 외침을 알아듣지 못한다. 소통의 부재는 그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벌레가 되어 일을 못하게 된 아들을 대신하여 아버지는 다시 일터에 나간다. 어머니도 일을 하고 여동생도 일을 시작한다. 그레고르를 측은하게 여기기보다는 원망으로 점철된 가족. 다시 가장이 되어 일하는 것에 분노한 아버지는 그레고르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사과를 던진다. 연극에서 그레고르는 그런 아버지에게 화가 난다.

"아버지, 아버지가 그렇게 힘이 셌었나요. 내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힘없이 침대에 누워서 내려오지도 않던 아버지가 맞나요. 그렇게 힘이 있었으면서 왜 그렇게 나약한 척을 했나요(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대략 이 내용으로 말함)."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혔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레고르에게서 누구도 사과를 꺼내주지 않았다. 사과는 그레고르의 등에서 서서히 썩어갔다. 썩은 사과가 등에 꽂힌 채로 그레고르도 천천히 죽어갔다. 얼마 후, 그레고르는 숨이 멎고 다리를 위로 쳐든 채 굳어져 버렸다.

그레고르가 숨을 거두자 가정에는 평온이 찾아왔다. 가족은 그동안 가지 못한 '화려한 외출'을 했고 눈부신 햇볕을 만끽했다. 부모는 딸에게 짝을 정해 줄 소망을 갖고 미소를 띠었다. 그건 '가짜 행복'이다. 극이 끝나자, 'Never Enough' 피아노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레고르는 왜 벌레로 변한 것일까. 책에도 연극에도 나오지 않는다.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인간은 벌거벗은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그레고르 역시 벌레로 변할 어떠한 이유도 의도도 없이 세상 모든 것에 무관하게 맨몸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런 세상 이치를 나타낸 것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변신>은 젊은 나이에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직장 생활의 고통을 감내하던 아들이 더 이상 돈을 벌어 오지 못하게 되자 그를 외면하는 가족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인간 소외와 인간성의 상실 등을 보여준다. 쓸모 없어진 그레고르가 느끼는 가족으로부터의 배제나 외로움은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는 고독과 슬픔과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프란츠 카프카는 살아 있는 동안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가 기대하는 바와 프란츠 카프카가 원하는 삶은 달랐다. 프란츠 카프카는 문학을 예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뜻대로 법학을 전공했고, 보험사 직원이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퇴근하면 글쓰기에 매진했다. 그게 그의 진정한 삶이었다.

그는 글을 써서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이 없었다. 글쓰기 자체를 즐겼다. 40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어가면서 친구에게 자기 사후에 자기가 쓴 글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했다. 친구는 그의 글이 위대한 것을 알고 불태우지 않고 출간한다. 그래서 우리가 프란츠 카프카를 만날 수 있다. 그레고르는 카프카 자신이었다.

앗, 저 매미도 어떤 누군가가 변신한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브런치 스토리에 중복 게재합니다.
변신 연극 프란츠 카프카 공간 아울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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