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 롯데엔터테인먼트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 그리고 아비규환 상황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엄연히 묵시록적이다. 생존만이 최고 가치가 된 때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고통을 부르짖을 것 같지만 엄태화 감독이 제시한 세상에선 웃음이 튀어나오는 순간도 있고, 은근히 귀여운 순간도 담겨 있다.
 
실제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아무리 비극적 상황이라도 희극은 존재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래서 엄태화 감독은 올여름 개봉하는 다른 대작 영화와 사뭇 분위기가 다른 이 영화를 두고 "블랙코미디 안에서 충분히 대중적인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본래 준비하던 다른 작품이 있었지만 사정상 미뤄졌고, 그 와중에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를 접하면서 아파트라는 소재에 꽂히게 된 셈.
 
희비극의 교차

"원작에선 살아남은 아이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야기 사이즈가 좀 작아보였다. 아파트라는 걸 강화하고 거기에 맞는 인물을 생각하다가 영끌(영혼 끌어모으듯 대출받은)로 아파트를 장만한 신혼부부를 떠올렸다. 이 둘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애쓰는 모습을 큰방향으로 잡았고, 시스템이 무너진 아파트에서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걸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피카소 그림 <게르니카>와 아파트를 다룬 박해천 교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일종의 모티브였다. 엄태화 감독은 "단순히 규모가 큰 영화보단 관객이 이입할 수 있고,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하는 과정을 판타지가 아닌 현실감 있게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제가 아파트에서 나고 자랐기도 했고, 한국 사람에게 아파트는 하나의 화두잖나. 쉬고 생활하는 주거 공간인데 자산이 되는 현실이다. 집이 없는 사람은 없어서 슬프고, 있는 사람은 (요동치는) 집값으로 슬프기도 하다. 이게 웃기면서도 슬펐다. 웃프다라는 표현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엄태화 감독은 여러 아파트 중에서도 1980년대 지어진 아파트를 택했다. 한창 경제 부흥기 때기도 하고, 아파트의 영광시대였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라는 이유였다. 극중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이 반상회에서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다 재난이 더 극심해지고,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의 갈등이 격화되며 영화는 코미디에서 일종의 스릴러로 전환을 맞는다. 아파트 주민들이 나름 투표로 대표를 선정하고, 외부인 배척 방침을 결정하는 등 민주주의 시스템을 따지지만,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이 시스템은 무력하게 흔들린다.
 
"민주주의라든가 혐오의 작동방식을 제가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프레임이 씌워지지 않은 채로 관객분들이 보셔야 하기에 특별히 제가 말을 얹고 싶진 않다. 어떤 분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볼 수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혐오라는 건 어쩌면 공포심 때문일 수도 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적과 내 편을 만들고, 그룹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거지. 영화에서도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뭉치고 잘 살아남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쫓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본다.
 
아파트 촬영에서 최선은 실제 아파트 안에서 하는 건데 재개발 지역 버려진 아파트를 찾았지만 촬영 기간과 안 맞더라. 그래서 3층 짜리 건물을 지은 것이다. 80년대 아파트로 정한 이유는 영탁과 연결시키고 싶어서기도 했다. 아파트 영광시대가 끝나고 재난이 벌어지잖나. 인생에서 한풀 꺾여 내리막을 걷는 영탁과 닮은 지점이었다. 디스토피아가 된 한국에서 혼자 서 있는 아파트가 유토피아처럼 보이고, 영탁도 절망적인 현실에서 나름 삶의 의미를 찾지만, 실상 그 아파트는 더욱 디스토피아적 내면이 있는 곳이었던 거다."
 

공포영화도 잘할 자신 있어

<친절한 금자씨> 등 박찬욱 감독 영화의 연출부 출신이기도 한 그는 <잉투기>나 <가려진 시간> 같은 저예산 독립영화 연출로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오고 있다. 이번 영화가 가장 규모가 크다지만 나름 그의 초기작에서 선보인 과감함이 엿보인다.
 
"좋은 연출의 첫 번째 덕목은 좋은 배우를 찾는 눈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연기를 잘 아는 게 아니니 역할에 맞는 배우를 잘 찾아야지. 배우가 시나리오를 보고 본인의 해석을 말씀하실 때 제 생각과 달라도 마음에 들면 하라고 하는 편이다. 디렉션을 제가 안 준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미 배우가 영화 안에 들어와 주시기에 일단 듣는 것이다. 이번 영화에선 자연스러움이 중요했다.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게 반상회 장면인데, 찍기 전에 그 자리에 있는 배우 서른여섯 분에게 각각의 옛날 사연과 이웃과의 관계 등 전사를 드렸다. 카메라를 보는데 다들 자기 연기를 하고 계시더라. 그 앙상블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보고 영화가 잘 나오겠다고 예상했지."
 

두 번째 장편 <가려진 시간> 이후 7년이 걸려 관객앞에 서게 된 그다. 가급적 더 자주 많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선배 감독들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엄태화 감독은 "한 작품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아이템을 같이 하다가 그중 먼저 되는 걸 하는 거라고들 하시더라"며 공포 영화에도 뜻이 있음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현실에 없는 곳을 뜻하잖나. 제가 진짜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답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영화에서도 딱히 답을 내리진 않는다. 극중 명화(박보영)가 계속 민성(박서준)에게 묻잖나. (외부인들과)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근데 아무도 동참하지 않고, 질문하지도 않기에 이런 비극이 벌어진 것이라 본다.
 
명화가 했듯 질문하는 영화였으면 한다. 사람들이 한 번쯤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내가 어떤 인물에 탑승하느냐에 따라 본다면 그게 베스트다. 사실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봐도 장르적으로 재밌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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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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