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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외물(外物)편에 나오는 우화의 내용이다. 마차 바퀴 자국 웅덩이에서 겨우 숨 쉬는 잉어가 "한 국자의 물로 저를 살릴 수 없겠습니까?"하고 애원하자 장자는 "내가 출타 중이니 오면서 큰 강물을 끌어다 주겠다"고 대답한다. 잉어는 화를 내면서 말한다. "제게 필요한 것은 지금 저를 살릴 수 있는 한 국자의 물입니다. 만일 그것이 당신 대답의 전부라면 다음에는 건어물 진열대에서 저를 찾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장자는 이 우화를 통해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위선을 조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처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보호출산제를 둘러싼 논의는 이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최근 출생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아동들에 대해 조사가 이뤄지면서 보호출산제에 대한 찬반 논의가 거세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겨레 신문 사설('미등록 아동' 249명 사망, 어른들 모두의 유기·학대였다/ 2023.7.19)은 미혼모 지원체계 강화와 사회편견 해소 등을 말하면서도 보호출산제는 부정했다. '보호출산제는 출산 뒤 원가정 양육이 아니라 입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어린이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사설은 주장했다.

이런 논점은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위선적인 해법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 사회에서 위기임산부가 주변의 냉대 속에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은 너무나 많다. 당장 자신과 아기의 목숨에 대해 위기를 느끼는 이들에게, '향후 촘촘한 지원체계와 사회편견 해소를 위해 노력할 테니 숨지 마시오!'라고 외치면 당장 그들이 응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원가정 양육을 위해 노력하되 양육이 불가한 경우 입양이 최선책임은 아동복지에 있어 초보적인 상식이다. 한겨레의 사설이 말하는 '어린이의 행복'은 어떠한 경우에도 원가정·혈연만이 정답이라는 뜻인가?

사각지대의 생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보호출산제를 일컬어 '섣부른 해법'이라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현재 미혼모 단체에서 활동하는 구성원들과 달리, 양육을 택할 수 없는 미혼모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흩어져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가령 친족 성폭행으로 출산을 한 미성년 생모에게, 모성은 숭고한 것이니 양육을 하라고 권고할 것인가? 모든 임신, 출산은 개개의 고유한 영역임에도 사회적 구호와 이상을 앞세워 그들의 삶을 하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가?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베이비박스·베이비룸 2023.7.11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베이비박스·베이비룸 2023.7.11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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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출산제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 제도가 익명출산의 길을 터줌으로써 아동 유기를 조장한다고 말한다. 현재 민간이 운영하는 베이비박스는 아기를 놓고 가려는 생부모를 상담하여 최대한 양육을 권고하고 이들을 돕는 데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러나 생부모가 공적 지원체제에 접근하려면 자신의 신분부터 밝혀야 한다. 이후 이들이 양육을 포기하고 베이비박스를 찾을 경우 형사처벌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유기를 조장하고 있을까?

현재 베이비박스가 하는 일을 국가의 공적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이 보호출산제의 핵심내용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보호출산제를 정면 반대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떳떳지 못했는지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시기상조라는 말 자체가 퇴보이며 역행이다. 이것이 2천여 년 전 장자가 일갈한 내용이다. 그가 통렬하게 지적했던 대로 생과 사의 간극에 놓인 이에게 먼저 한 국자의 물을 제공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다. 그러니 진심으로 묻고 싶다. 지금 보호출산제를 미루는 것이 최선인가?

[관련기사] 부모에게 죽은 아기, 법조문 한 줄이 불러온 참사(https://omn.kr/24thh)

태그:#보호출산제, #베이비박스, #위기임산부, #출생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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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족이 된다' 저자.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상담사, '전국입양가족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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