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의 2022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끌었던 파울루 벤투(54·포르투갈) 감독이, 불과 7개월 만에 이제는 '적장'이 되어 아시아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아랍에미리트(UAE) 축구협회는 7월 10일(한국시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벤투 감독을 UAE 대표팀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계약기간은 북중미월드컵 본선이 열리는 2026년까지 3년이다.
 
벤투 감독은 현역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 출신이자 1990-2000년대 포르투갈 '골든 제너레이션(황금세대)'의 일원으로 유로 2000대회 4강, 한국과 맞붙었던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멤버 등으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자국 명문인 스포르팅을 비롯하여 포르투갈-대한민국 국가대표팀, 크루제이루(브라질)-올림피아코스(그리스), 충칭(중국)의 감독으로 다양한 지역의 클럽-대표팀 감독을 넘나들며 경력을 쌓아왔다.
 
벤투 감독의 지도자 인생에서 대표적인 순간으로는 조국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고 유로 2012 대회에서 4강을 이룬 것. 그리고 대한민국 대표팀을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12년 만에 원정 16강으로 이끈 것 등이 있다. 클럽무대에서는 리그 우승 경력은 없지만 컵대회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며 단기전에 더 특화된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 시절은 벤투 감독의 지도자 경력과 한국축구 양쪽에서 모두 '부흥기'로 평가받는다. 한국축구는 2010 남아공 대회 16강 진출 이후 월드컵 2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과 잦은 감독교체로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벤투 감독은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사임 이후 가는 팀마다 연이은 불운과 조기 낙마로 커리어가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을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 16강에 올린 파울루 벤투 감독이 1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포르투갈로 출국하고 있다.

한국을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 16강에 올린 파울루 벤투 전 감독. ⓒ 연합뉴스

 
벤투 영입을 주도했던 당시 김판곤 국가대표선임위원장(현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은 벤투 감독의 확고한 축구철학과 능동적인 방향성에 깊은 감명을 받아 4년 임기를 보장하고 한국축구의 지휘봉을 맡겼다고 밝힌 바 있다. 벤투 감독은 부임 이후 크고 작은 위기도 있었지만, 투박하던 한국축구에 빌드업과 점유율 축구를 끈기있게 이식시키며 '한국축구 역대 최장수 감독(4년 4개월)'의 반열에 올랐다. 카타르월드컵에서 조국 프로투갈을 꺾고 16강진출을 이뤄내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벤투 감독은 한국축구와 동행을 마감한 뒤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당초 유럽 복귀 가능성이 유력하게 예상되었으나 생각보다 공백기가 길어졌다. 반년동안 벤투 감독은 조국 포르투갈 대표팀을 비롯하여 폴란드-에콰도르-가나 등 여러 대륙의 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모두 불발됐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아시아무대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벤투 감독의 UAE행은 여러모로 미묘하다. UAE 축구의 피파랭킹은 72위에 불과하며 그가 직전에 맡았던 대한민국(28위)과는 격차가 크며, 최근 영입설이 거론되었던 폴란드(23위). 에콰도르(41위), 가나(60위)보다도 모두 떨어진다. FIFA 월드컵 진출은 단 한번 1990년 이탈리아 대회에 출전했으나 조별리그 3전 전패로 광탈한게 유일한 기록이다.
 
벤투 감독은 50대 중반으로 감독으로는 아직 한창 나이다. 바로 직전에는 월드컵 16강까지 갔다는 감독이 유럽도 아닌 아시아, 거기서도 중위권 정도에 불과한 팀으로 갔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비교하자면 유럽 5대리그 빅클럽을 이끌던 감독이 중소리그나 중하위권 팀 감독으로 옮기는 것과 비슷한 '다운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벤투 감독이 한국 사령탑에서 물러난 직후 받았던 제안들이 본인의 눈높이에 영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혹은 예상보다 벤투 감독의 능력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벤투 감독이 한국축구를 16강으로 이끌며 국내에서는 한동안 '벤버지'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지만, 막상 그 과정과 내용을 살펴보면 아시안컵 8강탈락, 한일전 2연속 세골차 패배, 지나치게 경직된 선수선발과 불통 등 명암이 뚜렷하게 엇갈렸던 인물에 가깝다. 오히려 코로나19 변수로 인한 중동 원정 무관중 경기, 가나전 퇴장으로 관중석에서만 지켜봐야 했던 포르투갈전 역전승 등, 중요한 순간마다 천운이 따라준 측면도 컸다. 그럼에도 벤투호가 4년을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몇 번의 고비에도 흔들림없이 벤투의 축구를 믿고 기다려 준 한국축구의 인내심 덕분이었다.
 
벤투 이전에 한국축구를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은 한일월드컵 이후 주가가 다시 폭등하며 모국인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의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벤투와 똑같은 월드컵 승점 4점을 올리고도 16강 진출에 실패했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조차 러시아 제니트의 지휘봉을 잡으며 역시 유럽에 복귀한 바 있다. 이에 비하여 벤투 감독이 UAE행을 선택했다는 것은, 사실상 '돈' 때문이 아니라면 결국 그 이상의 팀에서는 좋은 조건을 제안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UAE행은 벤투 감독에게도 '도박'이 될 수 있다. 한국대표팀의 경우, 최소한 아시아에서는 전통의 강호이자 월드컵 단골손님이었다. 벤투호에 대한 지원과 신뢰도 매우 탄탄했다. 반면 다음 대회부터 월드컵 출전국이 48개국으로 늘어난다는 변수는 있지만 여전히 UAE는 본선통과조차 장담하기 힘든 다크호스에 불과하다. 벤투 감독에게는 한국축구를 이끌고 월드컵 16강을 이루는 것보다, UAE를 36년만에 본선으로 이끄는 것이 훨씬 더 난이도 높은 과제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중동은 한국보다 연봉 대우는 훨씬 좋을지 몰라도, 지도자를 오래 믿고 기다려주는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많은 해외의 유명 감독들이 '오일머니'에 이끌며 중동행을 선택했다가 커리어의 흑역사만 맛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벤투 감독이 한국에서처럼 중동에서도 마이웨이와 불통 행보를 고집하거나, 라이벌전에 연패하고도 책임을 회피하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가는 오히려 쓴 맛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UAE에서의 실패는 한국에서의 성공으로 잠깐 반등했던 벤투 감독의 지도자 커리어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 클린스만호로서도 한국축구를 너무나 잘아는 전임 감독을 바로 같은 아시아 무대에서 적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리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현재 한국축구대표팀의 핵심 선수 대부분이 바로 벤투가 4년간 지도하여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장 내년에 열리는 AFC 아시안컵이나 2026 북중미 월드컵 2차예선에서 벤투 감독이 이끄는 UAE를 만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한국축구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부임한 이후 올해 A매치 4경기에서 2무 2패에 그치며 아직까지 승리가 없는 상황이다. 클린스만 감독을 향한 의구심의 시선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카타르월드컵 16강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벤투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대표팀에 이래저래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한국축구는 UAE와 역대 전적에서 13승 5무 3패로 절대 우위를 보이고 있다. 지난 카타르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한 조에 편성되어 1승 1패를 기록했다. 가장 최근 대결은 벤투 감독이 지휘하던 2022년 3월 29일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으로 당시는 한국이 0-1로 패하며 최종예선 무패기록이 좌절된 바 있다.
 
과연 벤투 감독은 UAE를 이끌고 다시 한번 벤버지의 기적을 재현할 수 있을까. 또한 63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과 11회 연속 본선진출을 노리는 클린스만호의 행보를 위협할 강력한 난적이 될 것인가. 적으로 다시 만날 벤투와의 재회가 여러모로 흥미롭게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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