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어드바이저(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를 비롯한 홈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도 세자르호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 세자르 에르난데스 곤잘레스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2일 끝난 2023 발리볼 네이션스리그(VNL) 예선라운드를 12전 전패로 마감했다. 상대에게 36번의 세트를 내주는 동안 따낸 세트는 고작 3번. 그렇게 한국은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최하위이자 대회 유일의 무승 팀이 됐다.

경기 내용은 더욱 좋지 않았다. 한국은 이번 대회 39번의 세트를 치르는 동안 승리한 세 번의 세트를 포함해 20점 이상을 따내면서 상대를 괴롭혔던 세트가 단 13세트에 불과했다. 나머지 26번의 세트는 세트당 20점도 따내지 못하는 일방적인 열세 끝에 상대에게 손쉽게 세트를 내줬다는 뜻이다. 단순히 신장과 높이의 열세만을 탓하기에 세자르호가 대회기간에 보여준 경기내용은 너무 무기력하고 실망스러웠다.

물론 2년 연속 VNL 전패라는 부끄러운 성적에 대해서는 세자르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그리고 대한배구협회의 반성과 이 같은 부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번 대회 한국에도 수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대회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두 자리 수 평균득점을 기록한 김다은(흥국생명)이라는 젊은 공격수를 발굴한 것은 단연 이번 대회 세자르호가 이룬 최대 성과였다. 

우울했던 세자르호의 유일한 희망
 
 수원에서 열린 3주차 4경기에서 57득점을 올린 김다은은 VNL 대회 한국의 최고수확이다.

수원에서 열린 3주차 4경기에서 57득점을 올린 김다은은 VNL 대회 한국의 최고수확이다. ⓒ 국제배구연맹

 
V리그가 출범한 2005년부터 한국 여자배구 최고의 아포짓 스파이커는 단연 '코트의 꽃사슴' 황연주(현대건설 힐스테이트)였다. V리그 출범과 함께 프로무대를 밟은 황연주는 V리그 원년부터 서브와 후위공격 1위에 오르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18시즌 동안 현역으로 활약하면서 5번의 챔프전 우승과 함께 통산 6000득점(통산 2위), 후위득점 1300개(통산 1위)같은 대기록을 세우며 V리그의 살아있는 역사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황연주는 177cm의 크지 않은 신장과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국제대회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에이스 김연경의 부담을 덜어줄 아포짓 스파이커가 필요했던 한국 대표팀에게 황연주의 잦은 이탈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황연주는 완전치 않은 무릎상태로 대회출전을 강행했는데 이 때 황연주를 대신할 신예가 등장했다. 185cm의 좋은 신장과 뛰어난 파워를 겸비한 김희진(IBK기업은행 알토스)이었다.

런던올림픽을 기점으로 황연주로부터 대표팀의 주전 아포짓 스파이커 자리를 물려 받은 김희진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2020 도쿄올림픽 4강 멤버로 '김연경 시대'의 훌륭한 조력자로 활약했다. 도쿄올림픽을 끝으로 김연경과 김수지(흥국생명),양효진(현대건설) 등 '언니라인'이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을 때도 많은 배구팬들은 1991년생 김희진이 대표팀의 새로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황연주와 마찬가지로 고질적으로 무릎이 좋지 않았던 김희진은 2022-2023 시즌 도중 수술을 받았던 무릎 부상이 재발했고 무리하게 출전을 강행하다가 지난 2월 무릎수술을 받으며 시즌아웃됐다. 김희진의 부재는 소속팀 기업은행은 물론이고 대표팀에게도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김희진이 대표팀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 한국은 2023VNL을 통해 김다은이라는 아포짓 스파이커 유망주를 발굴하는 큰 수확도 있었다.

튀르키예에서 열렸던 1주차 때만 해도 최종명단에 포함되지도 못했던 김다은은 브라질에서 열린 2주차부터 엔트리에 포함되면서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다은은 수원에서 열린 3주차 4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14.25득점을 기록하며 한국의 주공격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다은은 이번 대회 8경기에 출전해 83득점(평균10.38점)을 올렸는데 이번 대회 한국 대표팀에서 평균득점 10점을 넘긴 선수는 김다은이 유일했다.

주장 김미연-아시아쿼터 레이나와 주전경쟁 
 
 대표팀의 아포짓 스파이커로 도약한 김다은은 소속팀에서는 아웃사이드 히터 자리를 놓고 쉽지 않은 경쟁을 해야 한다.

대표팀의 아포짓 스파이커로 도약한 김다은은 소속팀에서는 아웃사이드 히터 자리를 놓고 쉽지 않은 경쟁을 해야 한다. ⓒ 한국배구연맹

 
이번 VNL을 통해 세계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공격력을 보여준 김다은이 이번 대회 '세자르호 최고의 발견'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배구팬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다은이 VNL을 통해서 얻은 자신감을 무기로 다가올 V리그에서도 소속팀 흥국생명의 주축선수로 맹활약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김다은은 아직 소속팀 흥국생명에서 주전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다은은 2022-2023 시즌 정규리그 35경기에 출전해 33.91%의 공격성공률로 186득점을 기록했다. 김다은이 국제대회를 경험하면서 많이 성장했다 해도 지난 시즌 36경기에 모두 출전해 리그 득점 3위(821점)를 기록한 외국인 선수 옐레나 므라제노비치의 자리를 넘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김다은이 2023-2024 시즌 흥국생명의 주전으로 활약하려면 김연경과 콤비를 이루는 아웃사이드 히터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지난 시즌 김연경과 짝을 이뤘던 흥국생명의 주전 아웃사이드 히터는 김다은이 아닌 주장 김미연이었다. 김미연은 지난 시즌 33경기에서 35.1%의 성공률로 308득점을 기록하며 김다은보다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게다가 김미연은 서브 4위(세트당 0.24개)에 올라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서브를 구사하고 주장으로서 코트에서 보여주는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 김다은이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지 못하면 주전 자리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김미연 한 사람만 해도 쉬운 상대가 아닌데 김다은에게는 또 한 명의 경쟁상대가 생겼다. 흥국생명의 아시아쿼터 선수인 가나와 일본의 혼혈선수 레이나 토코쿠가 그 주인공이다. 4년 동안 일본 V리그에서 활약했다가 2022-2023 시즌 핀란드리그에서 활약한 레이나는 일본 청소년 대표팀 출신으로 서브 리시브와 공격력이 두루 좋은 선수로 알려졌다. 레이나는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이 드래프트 당시부터 영입 리스트에 올렸던 선수 중 한 명이다.

VNL 대회를 통해 김다은을 인상 깊게 봤던 배구팬들은 김다은이 다가올 2023-2024 시즌 V리그에서 김연경,옐레나와 함께 흥국생명의 삼각편대를 구성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김다은이 흥국생명의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해야 한다. 한국 여자배구의 미래를 이끌 선수로 배구팬들의 큰 기대를 받고 있는 김다은은 다가올 겨울에도 흥국생명의 주역으로 코트를 누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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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2023 VNL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김다은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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