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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 시가지 전경.
 경남 창원 시가지 전경.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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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들은 힘이 없으니까 불도저가 밀어버리면 금새 붉은 바퀴 자국만 남았는데, 내게는 그 모습이 꼭 우리 영혼이 흘린 피 같았다 ... 당시 우리 고모는 막내 사촌을 업고 불도저에 뛰어 들었고, 또 어떤 사람은 운전수에게 똥물을 뿌렸다. 지금 같았으면 화염병이라도 던졌겠지만 그 당시는 할 수 있는 저항의 전부였다. 그 저항은 어떤 이념에 기반을 두지 않은, 뿌리 뽑힌 삶을 향한 근본적인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남 창원 출신 고영조 시인은 고향 '귀현리'의 마지막 쓰라린 기억을 이같이 더듬었다. 고 시인은 시에서 "그해 봄날 뱃길 끊기고 / 무성하던 회나무 / 공장 부지로 뽑혀질 때 / 새순 피우던 포도밭과 함께 / 꿈마저 뽑혀지고 / 마침내 우리도 뽑혀졌다"고 했다.

고영조 시인 같은 '뿌리뽐힘'의 기억들이 책 <창원공단의 기억>(도서출판 피플파워 간)을 통해 되살아났다. 이창우·강찬구 기자가 발품을 팔아, 1970년대 조성된 창원국가산업단지(옛 창원기계공업공단)와 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책이다. 380여쪽에 걸쳐 창원의 옛 모습과 개발 과정에서의 갈등 현장 사진도 실려 있다.

옛 창원은 라스베이거스 못지 않게 밤이면 불빛이 요란한 상남동을 비롯해, 길고 넓게 뻗은 직선 도로 사이 들어서 있는 아파트·주택단지, 그리고 나열하듯 조성된 여러 공장이 '잘 짜여진' 계획도시다.

창원공단이 우리나라 산업사·도시사 차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고, 그래서 누구는 '신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원주민들이 받았던 고통이나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창원 곳곳에 보면 '⃝'⃝마을 옛터'라는 표지석이 많다. 그만큼 공단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공단과 관련해 빠져 있었던 '사람'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원주민 1세대 기억 담아내... 창원기계공고 졸업생 이야기도

책은 공단 건설 과정에서 이주하게 된 원주민 1세대의 기억을 채록해 담았다. 땅이 공단 용지에 수용되면서 원주민들이 반강제로 겪었던 고통을 파헤쳐놓았다. 이들은 1974년 산업기지개발구역 지정 고시 이후 창원대로(기지대로)가 깔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고향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원대로는 왕복 8차선 도로로, 당시 동양 최장 길이로 알려졌다.

몇몇 기억을 들어 보면, 지금 창원 도심의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다.

"창원(창원군)은 30~40개 농촌마을만 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아스팔트 대로와 거대한 쇳덩이들이 들어섰다. 산업단지라는 국가의 '인위'는 이곳 주민의 삶과 기억에도 크고 작은 발자취를 남기며 지역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창원에서 현재를 사는 이들 대부분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상남역이 있던 곳은 면소재지로 붐볐다. 역 남쪽으로 우체국, 파출소, 양복집, 가구점에다 상남초등학교도 있었고, 상남극장이라는 극장도 있는 곳이었다. 홍등가도 있었던 기억이 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딱 우리집 복판에 말뚝을 받더니 ... 왜 그러는지 자세히 가르쳐 주지도 않아요. 너희는 알 필요 없다고 ... 제일 좋은 논도 평당 1300원, 밭은 200~300원, 그냥 강제수용이에요'."

"농사짓던 사람들이 논밭만 내주고 재산을 잃었을까.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대원동으로 이사 가고 나서도 한동안 연덕 남은 땅에서 배추를 키워 리어카에 싣고 왔어요. 그러던 어느날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셨고, 가세가 기울었어요.'"


웅남·창원·상남면의 3개 지역 원주민들은 '삼원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관련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상남동에 삼원회관을 운영하고 있다. 박흥실 삼원회 이사장은 "초기 이주 대상자들은 사실상 강제수용을 당한 거다. 평당 몇 백원 보상이 다였지만 저항이라 할 것도 없었고, 대개 '나라가 하는 일인데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고 했다.

창원기계공고 졸업생들 이야기도 있다. 책에는 "학교 동기 900여 명 중 함께 입사한 사람만 120명이다. 이는 당시 삼성중공업(현 HSD엔진 등)이 창원기계공고와 결연하고 유능한 학생을 미리 선점했기 때문이었다. 실습 장비를 대주거나 졸업 전에 일본어 교육을 하는 등 신경을 쏟다가, 우수한 학생들을 우선 추천 받았다"는 대목도 있다.

"월급 많지 숙소 있지, 처음엔 너무 좋았는데 어느 순간 안 되겠는 거야, 하나둘 공부를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동기 80명 중 60명 이상이 대학에 갔어요. 회사에서 난리가 났죠, 저녁에 잔업을 좀 시켜야 하는데 말이야, 공장장이 학교 보내지 마라고 하게 되죠, 그래도 매주 토요일 되면 '과장님 조퇴 좀 시켜주세요' 하고 안해주면 월담을 하는 거죠, 그렇게 다음 주 월요일 시말서 쓰고. 저는 한 40장 쯤 썼을 거예요."

"백지로 비어 있던 역사에 생생한 내용 더해"

창원은 개발 과정에서 이주단지가 생겨나고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이사도 잦았다는 것이다.

"집들이 선물 받은 화장지를 다 쓰면 떠난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이사를 자주 했는데, 첫 입주 2년 뒤 17평으로 옮길 때만큼 감동적이었던 적이 없지요. 처음에는 '누가 저길 들어가나' 하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형편 어려운 사람 처지에서는 반송아파트 말고 딱히 갈 곳도 없었죠. 타지에서 창원에 와 정착한 사람 중 절반은 다 반송아파트를 거쳐 갔다고 봐도 될 겁니다."

"이주단지로 쫓겨간 창원 원주민들과의 이질성은 더욱 짙어졌다. 생업을 잃고 기술도 없었던 원주민 대부분은 아파트가 늘어나도 겨우 지어 올린 이주단지 주택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용도 제한으로 묶여 상업 활동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들이 떠올린 창원공단, 그리고 신도시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성이었다."


이창우·강찬구 기자는 "5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공단이 만들어질 때 풋풋한 노동자로 공장에 들어섰던 이들은 대부분 70대에 턱걸이를 하고 있다. 집과 논밭을 내어주고 이주했던 원주민들은 그 노동자들보다 연배가 높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남기고 역사로 갈무리할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그동안 백지로 비어 있던 부분을 채워 창원공단의 역사가 좀 더 입체적으로 구성될 수 있게 되었다. 무미건조한 역사에 생생하게 실감되는 내용을 조금이나마 더하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며 "이 책이 앞으로 좀 더 다채롭고 풍부한 서사를 찾아내는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책 <창원공단의 기억> 표지.
 책 <창원공단의 기억> 표지.
ⓒ 도서출판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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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공단의 기억 - 뿌리뽑힌 사람들, 뿌리내린 사람들

이창우, 강찬구 (지은이), 피플파워(2023)


태그:#창원공단, #삼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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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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