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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모아 태산'. 작은 것이라도 쌓이면 큰 덩어리가 된다. 여기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폐지 수거 노인들이다. 폐지를 모아 수십 kg에 달하는 작은 산을 만들어 리어카에 싣고 길을 오른다. 순환자원정보센터에서 조사한 2023년 4월 폐지 시세는 골판지 1kg에 78원. 이틀을 일해 100kg을 모아 1만 원을 못 받는다. 산을 만들지만 보상은 다시 '티끌'이다.​
 
수레에 수북이 쌓인 폐지 더미.
 수레에 수북이 쌓인 폐지 더미.
ⓒ 크라우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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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 '러블리페이퍼'는 폐지 수거 노인들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치르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Lovely(러블리)'가 아니라 Love 'RE'(러브 리) 페이퍼. 노인들로부터 시세의 6배로 매입한 폐지를 활용해 다양한 공작품을 만든다. 재생지로 만든 캔버스에 그린 그림, 종이 가죽으로 만든 카드 지갑, 노트북 가방 등을 판다. 판매 수익금으로 노인들을 정직원으로 고용한다. '폐지 수거 노인들의 처우와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일한다'는 이들을 지난 5월 2일 만났다.

빈곤 노인이 아닌 '자원재생활동가'

오후 5시 러블리페이퍼 사무실, 노인 직원 6명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폐지를 캔버스로 만들기 전에 수분을 제거 하는 작업이다. 모두 러블리페이퍼가 직접 고용한 노인이다. 완성된 캔버스는 작가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그림이나 캘리그라피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작품은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판매된다. 월 1만~3만 원인 정기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면 주기적으로 원하는 작품을 배송 받을 수 있다. 현재 정기구독자는 400명이 넘는다.

러블리페이퍼는 폐지 수거 노인을 '자원재생활동가'라고 부른다. 재활용 분리수거장이 있는 아파트 단지와 달리 골목길은 자원 순환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자원재생활동가들은 이런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폐지를 수집한다. 자원 순환의 시작점에 있는 사회 필수 노동이다.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는 "'폐지 줍는 노인'은 우리 사회에서 빈곤한, 도움이 필요할뿐인 사람들로 낙인 찍혔다"며 이런 인식을 바꾸고자 자원재생활동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한다.

러블리페이퍼는 자원재생활동가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기업 임직원들과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페이퍼캔버스 만들기 활동과 환경 교육 등이 그것이다. 기업이 친환경 사업을 위한 제품을 의뢰하면, 재생지로 에코백 등을 맞춤 제작하기도 한다. 이런 B2B 사업도 러블리페이퍼의 주요 수입원이다. 기우진 대표는 "모든 제품이 어르신들이 만든 것이라는 대전제를 두고, 이것이 친환경적이라는 점을 잘 설명해 어필한다"며 "궁극적으로 자원재생활동가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폐지로 만든 캔버스 위에 명화를 인쇄하거나 재능기부 작가들이 그림을 그린다. 출처 러블리페이퍼 홈페이지.
▲ 러블리페이퍼가 판매하는 예술작품 폐지로 만든 캔버스 위에 명화를 인쇄하거나 재능기부 작가들이 그림을 그린다. 출처 러블리페이퍼 홈페이지.
ⓒ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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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기록 활동부터 NGO, 법인 설립까지

러블리페이퍼는 주변 자원재생활동가를 향한 작은 관심에서 시작됐다.

"사회적 경제 아카데미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 '지역의 사회 문제를 찾고 이를 비즈니스로 해결하는 게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더군요. 영리 목적이 아닌 기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그 후 주변의 사회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가장 먼저 눈에 띈 게 폐지를 수집하시는 어르신들이었어요."

자원재생활동가 '노인'을 '이웃'으로 보면서서, 평범한 대안학교 교사였던 기 대표의 삶도 변했다. 자원재생활동가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활동부터 시작해 서서히 문제에 몰입했다.

"어느 날 운전하다가 폐지를 수거하시는 어르신을 만났어요. 그분이 폐지 뭉치를 머리에 이고 3차선 도로를 걸어 올라가고 있었어요. 습관대로 사진을 찍었고,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면서 성찰하게 됐어요. '이분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일 해야 하는가?' 이제 사진은 그만 찍고 어르신들에게 한번 다가가 보자."

2013년 NGO 활동부터 시작했다. '종이나눔운동본부'를 만들어 청소년, 청년들과 함께 자원재생활동가들을 지원했다. 학교, 관공서 등에서 기부 받은 종이를 판매한 수익금으로 혹한기·혹서기 물품을 구매해 자원재생활동가들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이런 활동이 그들에게 일시적인 도움은 됐지만, 본질적인 문제 해결엔 도움이 안 된다는 것. 날이 갈수록 폐지 가격이 떨어져 폐지를 판 돈도 줄어들었다. 자원재생활동가들이 받는 대가도 감소했다. 기 대표는 "어르신들은 안전한 일자리, 정당한 소득 등이 필요한데 NGO 활동만으론 부족함을 느꼈다"며 기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최우선 과제는 '폐지를 가치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 것'. 최소 수익을 확보할 아이템이 필요했다. 그들은 '업사이클링'에 주목했다. 업사이클(새활용)은 폐기물을 단순 재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자인 등을 가미하고 다른 용도를 개발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개념이다. 재활용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한 예술작품이 그렇게 탄생했다.

"7년 전에 재능기부 작가들을 모으는 소셜미디어 카드뉴스를 만들어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4시간 만에 150명이 모였죠. 처음에는 시험삼아 3개월짜리 프로젝트로 기획했는데, 그게 잘 돼서 1년짜리 프로젝트가 됐어요. 결국 법인 설립으로 이어졌죠."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가 종이가죽으로 만든 랩탑 가방을 들어보인다.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가 종이가죽으로 만든 랩탑 가방을 들어보인다.
ⓒ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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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외로운 노인에게 정서적 위로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901만8000명, 고령자 1인 가구 수는 166만1000가구다. 노인 자살률은 10만 명당 26.5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다. 많은 노인이 생활고와 외로움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내려놓는다. 러블리페이퍼의 활동은 노인 고독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노인 고독 문제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저희끼리 쓰는 용어는 그냥 '정 고픔'이에요. 빈곤 노인의 유형도 다양하잖아요? 경제적 빈곤도 있지만 정서적 빈곤도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 주변 사람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고, 인간관계는 서서히 단절돼요.

청년 세대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노년층은 아직도 공동체 성향이 강한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이 개인화될 때 패닉을 느끼죠. 정서적 고통을 덜기 위해 밖으로 나오고,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폐지를 모으는 분들도 있어요."


노인의 빈곤을 경제적 잣대로만 판단하고 접근해선 안 된다는 진단이다. 정서적 어려움과 마주한 노인에게도 러블리페이퍼의 문은 열려 있다. 고독한 노인을 고용해 공간과 일거리를 제공하는 한편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해준다.

"직원 및 자원재생활동가 어르신들과 1년에 한 번씩 광명동굴, 가평 등으로 여행을 가요. 청년들도 함께합니다. 이런 정서적 지원도 필수라고 생각해요."

"멋지게 망하고 싶습니다"

'전국에 계신 폐지수집어르신들의 삶이 바뀌는 그날 러블리페이퍼는 망하겠습니다.' 러블리페이퍼의 홈페이지 상단엔 눈에 확 띄는 문구가 적혀 있다. 어쩌다 망하기 위해 활동하는 기업이 됐을까.

"사회적기업과 NGO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인 만큼 그 목적이 달성되면 조직이 없어져야죠. 당연한 수순인데 사회 문제가 커지면서 조직도 계속 커 가는 게 문제예요."

기 대표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기업이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본다.​
 
재생 캔버스를 만들고 있다.
▲ 러블리페이퍼에서 직접 고용한 노인 근로자들 재생 캔버스를 만들고 있다.
ⓒ 러블리페이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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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페이퍼는 여전히 망하기는 커녕 성업 중이다. 폐지 수거 노인 이슈가 공론화 될 수록 회사의 존재감은 커진다. 포털사이트에서 폐지 수거 노인, 자원재생활동가 등을 검색하면 러블리페이퍼 관련 게시물이 하나 이상은 노출된다. 이젠 다른 기업이나 기관들도 자원재생활동가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한다. 공익재단과 공익법인들은 크라우드 펀딩과 캠페인을 실시한다.

"자원재생활동가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던 시기에 비하면 고무적이긴 하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선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 합니다. 폐지 수거 노인을 사회 필수 노동이자 '자원재생활동가'라는 '직업'으로 규정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제화 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해요."

자원재생활동가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법 제정은 난항을 겪고 있다. 2019년 발의 된 '재활용품수거노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에는 재활용품을 수거해 판매한 금액에 비례해 수거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명시됐다. 이 법안은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현재 시행 중인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에는 '폐지·고철 등을 수집·운반하는 자와 영세한 자원순환시설의 수집 환경 및 시설 개선 등을 위한 사업'에 재정적·경제적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자원재생가들은 여전히 최저임금조차 받기 힘들다.

"자원재생활동가들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필요해요. 그러면 이분들이 하는 활동에 대한 환경적 재평가가 이뤄져, 탄소 절감, 폐기물 절감 등에 유의미한 도움이 된다는 공적인 데이터를 확실하게 도출할 수 있어요.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노동에 대헤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제도와 시스템을 위한 설득력을 갖추는 거죠."

얼마 전 러블리페이퍼는 브라이언임팩트와 다음세대재단이 함께하는 비영리스타트업 상시 발굴 및 성장 지원 사업에 최종 선정됐다. 100세 시대, 고령화로 더 많은 자원재생활동가들이 거리로 나온다. 멋지게 망하겠다는 러블리페이퍼의 목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새로운 시도를 한다. 러블리페이퍼는 오늘도 '멋지게 망하는' 꿈을 꾼다.

태그:#노인 복지, #자원 재생, #새활용, #사회적 기업, #폐지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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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주간지 이코노믹리뷰에서 산업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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