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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몇 송이가 달린 거니. 난 해준 게 없건만, 다시 살아나줘서 고마워 장미.
▲ 오월의 장미 대체 몇 송이가 달린 거니. 난 해준 게 없건만, 다시 살아나줘서 고마워 장미.
ⓒ 박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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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애니시다가 거의 다 져버렸다. 4월 내내 나를 설레게 했던 노란 빛깔의 꽃들이 이제 누런 색으로 바래버렸다. 그래서 아쉽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또 내년에 만날 테니. 애니시다가 절정을 지날 무렵, 옆집 귤나무에서 귤꽃향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때가 왔다는 듯 자연스레 밀고 들어오는 요염한 향기라니. 

귤꽃은 세상 모든 꽃을 능가할 만큼 그윽하고 진한 향을 내뿜는다. 한 번 맡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향기랄까. 오월 제주에서 귤꽃향을 맡으면 자연스레 사랑에 빠진다던 어느 소설의 구절처럼, 귤꽃향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바람결을 따라 귤꽃향이 날아오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작된 곳을 바라보게 된다. 이토록 향기로운 꽃이 존재한다니.

지난주 며칠 세찬 비가 내리면서 귤꽃도 시들해졌다. 향도 이전만 못하다. 아쉬워지려는 찰나, 분홍빛 장미가 고개를 든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장미가 올해 갑자기 가지를 쭉쭉 뻗더니, 열 송이 넘게 꽃봉오리가 달렸다. 두 송이는 피어나기 시작했고, 나머지 열 송이쯤도 점점 꽃받침을 열고 분홍빛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오월의 장미라더니,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던 식물이 때를 알고 꽃을 피운다는 게 기적처럼 여겨진다.

장미 옆에는 지난해 심은 수국이 깻잎 같은 이파리를 잔뜩 피워내며 봄을 맞이한다. 며칠 전 자세히 살펴보니 이파리 중앙에 조그맣게 돋아나기 시작한 수국 꽃봉오리가 보인다. 수국은 작은 꽃이 마치 부캐처럼 동그랗게 모여 피어난다. 나무 전체도 마치 커다란 하나의 부캐 같아 보인다.

색깔은 분홍, 파랑, 보라, 하늘, 자주 등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 같은 나무에서도 다른 색깔 꽃이 피어나기도 한다. 앙증맞게 매달린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저 안에서 올해는 어떤 색깔의 꽃이 피어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꽃이 좋아지면, 그저 늙어가는 게 아니다 

꽃이 예쁘다. 꽃이 좋다. 꽃이 좋아지면 나이가 든 거라는데, 요즘 부쩍 그렇다. 시기마다 찾아오는 꽃이 너무나 반갑고 귀하다. 때마다 피는 꽃을 구경하러 휴일이면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 예전에는 꽃에 그리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정말 나이가 들어 그런 걸까. 나이가 들수록 꽃도 좋아지지만, 화려한 색감의 옷도 좋아하게 된다는데, 칙칙한 색깔의 옷들이 나열된 내 옷장에도 총천연색의 옷들이 가득해지는 날이 정말 찾아올까.

나만 이런 건 아닌 듯하다. 주변에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꽃 이야기를 하니, 다들 얼굴이 꽃처럼 밝게 피어난다. 나이차가 크지 않아 같은 세대라 볼 수도 있는 사람들인데, 저마다 꽃이 갈수록 좋아지는 스스로를 고백하며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일까. 꽃은 늘 그 자리에서 매년 피고 지는데, 우리는 왜 그 꽃을 이전보다 유난히 더 예뻐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나이와 꽃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한참 고민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꽃을 예뻐하게 된 게 아니라, 이 나이가 됐기에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게 아닐까. 여유 없이 달리기만 했던 지난날을 지나, 나 자신과 주변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꽃에도 시선을 오래 두게 된 게 아닐까. 흔히 마흔을 넘어가면 사춘기처럼 앓는다고들 한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문득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나 돌아보게 되는 기점이 마흔이라는 것.

꽃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도 이 시점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쩌면 나이가 들어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제야 꽃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게 아닐까. 그러다 보니 새삼 이 꽃이 일 년에 딱 한 번만 피고 지고, 이 꽃과 마주할 날이 사실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저물어가는 내 인생을 바라보듯 꽃을 바라보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꽃을 예뻐하게 된 나의 모습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잘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르니까. 시야가 넓어지고 더 많은 세상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여유가 비로소 내 안에 생긴 건지도 모르니까.
 
이파리 중앙에 좁쌀처럼 작게 옹기종기 돋아난 수국 꽃봉오리. 수국의 계절인 유월이 기대된다.?
▲ 유월은 수국의 달 이파리 중앙에 좁쌀처럼 작게 옹기종기 돋아난 수국 꽃봉오리. 수국의 계절인 유월이 기대된다.?
ⓒ 박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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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색감의 옷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타인의 시선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에 더 집중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더는 이런 나를 자책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이전보다 더 많은 꽃의 이름을 알게 되었음에, 매년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들의 소중함을 깨달음에, 감사하다. 

진화적으로는 인간이 꽃을 길들이는 게 아니라, 꽃이 아름다움으로 인간을 길들이는 거라고 한다. 마치 꽃이 벌과 나비를 길들여 수분을 돕게 만들었듯, 인간을 길들여 예쁜 꽃들을 더 널리 심게 하는 거라고. 함께 하는 이유가 내게 있든, 꽃인 네게 있든, 매년 한 자리에서 피고 지며 묵묵히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꽃을 보며 묘한 위로를 받는다. 

너처럼 나도 당장 크게 도드라져 보이지 않아도, 올해 꽃을 좀 적게 피워냈더라도, 매년 조금 더 깊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조금 더 풍성하게 가지를 뻗고 잎을 돋고 있으니 내년에는 내후년에는 더 많은 꽃을 피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더해가다 보면 나도 마침내 아름드리 한 나무가 될 거라고. 꽃을 보며 나를 본다. 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게 된 내 나이가 반갑다. 나의 늙어감이 꽃으로 찬란해진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합니다.


태그:#나이, #꽃, #봄,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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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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