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너머(Beyond This Place)
코리안시네마(Korean Cinema) 섹션
한국 / 2023 / 15분 / 컬러 / 
감독 : 이제경
출연 : 박가영, 유이든, 김진수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이곳 너머> 스틸컷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이곳 너머>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1.
오래전 자신의 땅을 작은 아빠 만식(김진수 분)에게 빌려줬던 영회(박가영 분)는 그의 시골집을 찾는다. 땅을 팔기 위해서는 도장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연락이 닿지 않는다. 철문까지 두드리며 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잠시 후 만식의 집 대문이 열리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건 작은 아빠가 아닌 그와 결혼한 이주 여성 마이(유이든 분)다. 한국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 같은 그녀는 되려 영회를 내쫓으려 하고, 반대로 영회는 어떻게든 만식을 만나 도장을 받아낼 참이다.

이제경 감독의 단편 영화 <이곳 너머>는 가정 폭력에 노출된 두 여성의 만남과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15분 정도의 짧은 러닝타임을 갖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주제들은 그리 가볍지 않다. 특히 극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면 아래에서 등허리만 언뜻 내보이는 이야기들로부터 얻게 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이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여러 서사를 붙들고 갈 수 없는 물리적 제한을 이겨내고자 하는 시도로도 볼 수 있지만, 이를 추측하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의 상상을 통해 덩치를 키워가는 폭력의 그림자로부터 두 사람의 연대를 더욱 짙게 그리고자 하는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었을 영회와 마이의 지나온 시간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가정 폭력은 장기간 점진적으로 높은 수위의 폭력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02.
"이제 어디로 가고 싶어요?"

영화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영회와 마이의 대사를 통해 두 사람의 연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음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감독은 두 사람이 처해있던 각각의 상황을 하나의 장면을 통해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이전 장면을 통해 벌써 시도하고 있다. 마이의 여권을 갈기갈기 찢는 만식과 이를 지켜보는 영회의 얼굴 뒤로 흐릿하게 들려오는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오는 장면이 바로 그 지점이다.

이주 여성인 마이의 여권이 눈앞에서 찢기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회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극의 초반부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걸려오는 남편의 전화가 (그녀의 오른쪽 뺨에 난 상처와 더불어) 어떤 의미인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두 사람의 연대는 이미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렇게 연결된 각각의 폭력은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어 이 문제가 단순히 개인이나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낸다.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이곳 너머> 스틸컷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이곳 너머>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3.
이제 그렇다면 물음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놓이게 되는 사건 이전과 이후, 그러니까 두 사람의 연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이전과 이후 달라지는 마이의 태도에 있다. 남편인 만식이라는 인물에게 가지는 심리에는 변화가 없지만, 이와는 다르게 그의 도장을 받으러 온 영회를 향한 태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대문을 두드리던 그녀를 배척하고 내쫓으려던 사람에서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함께 나아가는 사람으로의 변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집이라는 공간에 숨겨둔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기 위한 내부적 동인에 의한 것이 하나다. 마이가 공간(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야만 했던 행위는 적어도 자신이 목적하는 장소까지 벗어나는 도중에는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던 날, 만식을 찾아온 영회가 달가울 리 없는 이유다. 다른 말은 너무나 잘 알아들으면서도 도장을 찾는 이에게 장기알을 내미는 어리숙함을 (감독의 의도적인 해학이라 여겨진다) 연기해야만 했던 이유가 아닐까.

다른 하나는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된 까닭으로 외부인과 거리를 두도록 학습된 외부적 동인에 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정 폭력 피해자들은 여러 이유로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당하거나 자신의 의지로 멀어지고자 한다고 한다. 특히 주변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그 순응의 기간이 훨씬 더 짧아지다고 하는데 극 중 마이가 이주 여성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비밀을 떠나서 일단 외부인이라면 자신의 공간(만식의 폭력이 드러나는 공간)에 들이지 못하도록 강요당했을 경우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조카의 방문을 그렇게까지 막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 마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내러티브의 구조화를 성공적으로 완성해 낸다.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이곳 너머> 스틸컷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이곳 너머>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한편, 영화는 두 사람의 다른 모습을 그려내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른쪽 뺨에 난 영회의 상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이의 모습.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었으나 이후 혼자 남겨질 마이를 위해 손을 내미는 영회의 모습과 같은 장면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영화 속에 배치된 어떤 사건과 행위가 그들의 본성으로부터 행해진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일로 받아들여지게끔 길을 터낸다.

이는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짧은 시간 안에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작은 아빠인 만식을 통해 가족의 울타리 안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정황상 조금의 교류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도록 하는 시작점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것은 직접적인 폭력을 당하는 마이를 돕는 영회의 행동뿐이지만, 만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용기와 의지는 영회의 행동에도 구원의 도구로 작용한다). 자신이 아프면 다른 사람의 아픔도 다 보인다던 마이의 어눌한 대사도 이 자리에서 힘을 더한다.

이제 두 사람은 '이곳 너머'의 장소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 우리는 여전히 삼촌의 도장이 필요했던 영회가 어떤 이유로 땅을 팔고자 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결혼 후에 홀로 한국에서 지내게 된 마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느 정도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두 사람이 이 동행을 끝까지 함께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수많은 알 수 없는 일들 속에서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그곳'의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 하나가 영화의 마지막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소란하지 않은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이 이야기를 더욱 현실처럼 느끼게 만든다.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이곳너머 박가영 유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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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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