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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청 건물 외벽에 걸린 '근로자의 날'이라고 쓴 펼침막.
 경남도청 건물 외벽에 걸린 '근로자의 날'이라고 쓴 펼침막.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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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단체가 '근로(勤勞)'를 '노동(勞動)'으로 바꾸는 조례를 만들어 놨지만, 실제로 지켜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상남도와 창원특례시는 관련 조례를 제·개정해 '근로·근로자'를 '노동·노동자'로 바꾸기로 했지만, 여전히 이전대로 써오고 있었다. 

'근로'는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 '노동'은 "몸을 움직여 일함"이라는 뜻으로, 근로는 일제강점기 때 '근로정신대' 내지 '근로보국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와관련 한국노총은 28일 성명을 통해 "'근로'라는 말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 등을 미화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다"라며 "노동자의 자주성 주체성을 폄훼하고,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라고 명칭 변경을 촉구했다. 

'근로자의날' 표기는 "근로자의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제정)에 따른 것이다. 이 법률은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하고, 이 날을 근로기준법에 따른 유급휴일로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창원시의회는 2019년 7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근로 관련 용어 변경을 위한 감정노동자의 권리 보호 등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고, 경남도의회도 같은 해 12월 "조례 용어 일괄 정비를 위한 조례"를 의결했다.

경남도·창원시는 이 조례에 따라 조례나 공문서, 보도자료, 기관명에서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도록 했고, 이에 '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를 '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로 바꾸었다.

2019년에 제·개정된 이들 조례는 경남도·창원시(의회)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규정대로 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 경남도청과 창원시청 홈페이지에서 '근로'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2022년 하반기부터 최근까지 관련 용어를 쓴 문서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지난 28일 사천 한국경남태양유전을 방문한 내용을 다른 보도자료는 제대로 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는 '노동자'라거나 '노동현안'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경남도 자료에는 '근로(자)'라고 한 사례가 많았다. 김병규 경남도 경제부지사가 참석했던 한국노총 경남본부의 '세계노동절' 행사와 관련한 자료에는 '모범 근로자 표창'이거나 '근로자 격려'라고 되어 있다. 또 "외국인 근로자 지원 방안 논의"라는 제목의 자료에도 '외국인노동자' 내지 '이주노동자'가 아닌 '외국인 근로자'로 표기되어 있고, '근로자 지원 사업'이라고 되어 있다.

농업분야 '외국인 계절 노동자'라고 해야하는 관련 자료에도 '외국인 계절근로자' 내지 '외국인근로자 보험가입' 등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아울러 경남도청은 "외국인근로자, 고용센터로 고용허가신청하세요"라거나 "경남근로자건강센터 산업재해 예방" 등 관련 자료에도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라고 썼다. 경남도는 최근 건물 외벽에 "5.1 근로자의날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쓴 대형펼침막을 걸어 놓았다.

창원특례시청 홈페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자활근로사업', '공공근로사업', '희망근로', '근로소득', '근로계약서' 등 법률에 따라 붙여진 사업명칭에서 사용된 '근로'라는 단어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부 창원시 자체 사업에도 '근로' 내지 '근로자'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최근만 해도 창원시는 "일하는 중간계층 이하 청년 대상 '청년내일저축계좌' 모집"이란 자료를 내면서 '노동기준'이 아닌 '근로기준'이란 말을 썼고, "진해동부 인구대응 전담 TF 출범"이란 자료에서는 '노동자'라 하지 않고 '근로자'라고 적었다.

홍남표 창원특례시장은 올해 1월 9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주노동자 지원정책 관련한질의를 받고 답변하면서 처음에는 '외국인 근로자'라고 했다가 용어 관련 조례가 있다는 말을 들고는 '외국인 노동자'고 고쳐서 말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근로(자)'를 '노동(자)'으로 바꾸기로 한 조례를 지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류경완 경남도의원(더불어민주당)은 "조례의 취지를 살려서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도록 행정에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이우완 창원시의원은 "조례 제정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법률에 의거해 붙여진 사업명칭은 그대로 두더라도 창원시 자체 사업에는 용어를 바꾸기로 했던 것"이라며 "조례대로 해야 하고, 여러 자료나 홈페이지 내용을 살펴보고 바로 잡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조형래 민주노총 경남본부장은 "용어는 습관인데 근로라고 부르는 인습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고치기 위한 의식적인, 의도적인 노력이 꼭 필요하다"며 "자치단체의 행사에서나 단체장으로 부터 용어 습관을 교정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이병하 경남진보연합 대표는 "'세계노동절'이 '근로자의 날'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민정으로 이양하기 위한 체제 정비를 하는 가운데 이뤄졌다"며 "1963년 4월 17일 군사정권은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개정을 통해 노동 통제의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노동'과 '노동자'라는 개념 속에 내포된 계급의식을 희석하고자 '근로', '근로자'로 바꿨다.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 것도 이 시기다"고 설명했다.

그는 "'귀족노조', '교사가 공무원이 무슨 노동자냐' 등으로 보수언론들의 혐오 표현과 사회갈등을 조장한 원인도 적지 않지만, 아직도 노동자를 천대하는 안타까운 사회 풍조도 남아 있다. 큰 아픔이고 하루속히 청산해야 할 과제다"고 했다.

이병하 대표는 "법률에 '근로자의날'이라고 되어 있더라도 용어를 바꾸기로 한 조례가 있다면 그 취지를 살려 '세계노동절'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경남도청 관계자는 "근로·근로자를 노동·노동자로 바꾸는 용어 변경 조례는 아직 살아 있고, 적용이 되고 있다"며 "건물 외벽에 '근로자의 날'이라고 표기한 것은 조례보다 상위인 법률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 표기한 경남도청 보도자료.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 표기한 경남도청 보도자료.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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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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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계노동절, #근로,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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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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