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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세요
난 그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니까요
제발 아이가 있는 곳이 이곳보다 더 좋다고 말하지 마세요
아이는 지금 내 곁에 없으니까요
제발 아이가 고통받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마세요
난 우리 아이가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를 받아들인 적이 없으니까요
제발 내 슬픔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내가 슬픔에서 회복되기를 빈다고 말하지 마세요
사별은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니까요
...
- 리타 모란(Rita Moran), <제발(Please)> 중에서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4월, 5월은 트라우마의 기억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주 4.3 사건, 4.16 세월호 참사, 4.19 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역사의 흔적들은 지금도 그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을 그 시간과 공간에 갇힌 채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유가족과 생존자, 관계자들은 사회적인 관심이 멀어질수록 '집단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사건 속에서 매년 나오는 다양한 적대적인 망언과 망동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연쇄적인 트라우마를 재경험하고 있다.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두고 여야공방이 가열찬 가운데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시간은 멈춘 듯하다. 참사를 막겠다며 앞다투어 발의한 이태원 참사 관련법들은 국회 안에 갇혀있고 참사 발생 6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진실을 향한 발걸음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는 사람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여당 일부 의원들을 중심으로 유족에 대해 혐오적 표현을 남발하거나 이 사건의 정치적 이익에만 골몰할 뿐이다. 참사에 대한 원인 규명과 고인들과 유족들에 대한 사회적 애도에 진정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실제 관련 당국자들은 유족들의 시간이 자신들의 시간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 대처할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가 잊히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참사와 같은 죽음은 잊히라고 겁박한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당한 고인들의 가족들은 다만 눈앞에 '사라졌을' 뿐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애도할 수 없는 것이다. 애도 되지 않기에 쇼크와 분노 그리고 그저 기능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일상, 세 가지 정신상태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몸은 살아있지만, 마음과 정신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유족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사회적 치유로서 집단애도 필요

그런 맥락에서 수많은 참사와 집단 트라우마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선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치유가 필요하다. 공동체 전체의 공감과 집단적 애도를 통해 트라우마적 사건의 원인을 성찰하고 재구축할 때 그 사건이 그 당시 시간과 장소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시공간 속에서 함께 다뤄질 수 있다. 

실제 수많은 보고서들은 사회적 트라우마가 개인적 차원에서 대응 가능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유대가 강한 집단이 사회적 트라우마의 가장 강력한 해독제를 제공한다고 한다. 즉 사회적 트라우마를 개인적, 내적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말고 사회, 문화 차원의 치유 과정으로 보고 다룰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회적 트라우마를 다룰 때 개인적인 작업의 방식인 '사건-보상-의료적 치료'가 아닌 '사건-집단애도-사회문화적 치유'로 방법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지지하고 수용하는 마음으로

갑자기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유족의 시간은 '재난 사건 이전 시간'과 '그 이후 시간'으로 나누어진다. 사건 이후 유족은 이러한 분열 상태를 삶 속에 통합하기 어렵기에 일상적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 또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사회와 단절해 버릴 수도 있다. 실제 참사와 같은 재난은 우리의 현재이며 우리의 미래가 될 수 가능성이 있기에 참사를 당한 유족 앞에서는 그저 지지한다는 마음으로 수용하고 함께해야 한다.

참사와 같은 재난은 상실과 사별을 전제로 하기에 비탄과 슬픔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상실과 사별은 누구나 원치 않는 감정이고 수용할 수 없기에 애도는 고인과의 기억으로 인해 유발되는 심리적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하지만 애도의 고통은 심리적 문제만이 아니기에 외상적이고 비정상적 행위로 참사를 만들어낸 권력과 질서가 있음을 인식하게 될 때, 애도가 사회적인 차원의 투쟁으로 번지게 된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참사의 진상규명에 관심이 없고 사건을 은폐, 조작, 왜곡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진실 규명은 애도의 조건

유족들은 자신이 겪은 사별 경험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애도가 일어난다. 그 시간은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서 우리는 사회·문화적 애도로서 트라우마를 양산하는 구조적 모순을 극복한 경험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참사에 대한 사회적 애도가 권위주의적 정권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는 법 조항이나 2차 가해라는 언술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거나 겁박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유족들의 슬픔에 공감하며 그 개별적인 슬픔을 사회적인 슬픔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사회적 참사는 우리 사회를 바꾸고 변화해 나갈 고동이 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고인들은 자신의 길로 유족들은 애도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애도코뮤티타스 메인 이미지
▲ 애도코뮤티타스 메인 이미지 애도코뮤티타스 메인 이미지
ⓒ 치유협동조합마음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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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협동조합 마음애터는 사회적 재난과 참사로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유가족들과 함께 '고통의 연대'를 구축하고자 오는 6월, 7월 두 차례에 결쳐 집단치유 프로그램 <이별이 끝나도 애도는 계속 된다 : 사회적 애도와 돌봄을 향한 "애도 코뮤니타스 프로젝트" https://www.socialfunch.org/covid19mourn>를 진행한다. 이 과정을 통해 상실 유가족들이 희망과 회복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연대하려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양준석(마음치유 활동가)


태그:#이태원참사, #트라우마, #사회적애도, #애도코뮤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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