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반가운 손님
 
고전명작영화의 재개봉은 이제 국내 극장가에서 흔한 현상이 된지 오래다. 혹자는 신작 개봉 대신 안전제일주의를 택하는 극장가의 안일함을 한탄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로 창고에 가득 쌓인 채 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기회를 애타게 기다리는 신작들 대신에 크게 흥행을 기대하긴 힘들어도 상대적으로 검증되고 '안전 빵'으로 적당한 실적을 보장하는 추억의 영화들이 극장가를 수놓는 중이다. 의욕적으로 위기를 극복해보고자 안간힘을 쏟는 영화제작사 측에서 보면 안 그래도 좁은 문을 더욱 바늘귀로 만들 듯 얄밉고 답답한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천만 영화'를 꿈꾸는 흥행 대작들이 연달아 죽을 쑤는 2023년 상반기에 더욱 심화되는 중이다.
 
부정적인 우려를 먼저 열거하긴 했지만, 고전 명작영화의 재개봉 소식은 누군가에겐 오래된 미래처럼 만나야 할 작품과 대면 찬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독 이번에 소개하려는 영화의 재개봉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게 사실이다. 볼 사람은 다 봤지만, 요즘 극장가의 주력세대엔 생경하기 그지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디어 홍보에 유리하게 특별히 이슈가 될 코드도 딱히 보이지 않는 영화다. 굳이 홍보용 코드를 들자면, 갈수록 대다수 서민들의 삶이 팍팍하게 느껴지는 요즘 세태와 이 영화 속에 깃든 정서가 호환된다는 기시감 정도일 테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그래도 선전비용 들여가며 재개봉하는 데에 결정타가 되기엔 한참 미달이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개봉 소식이 더 반갑기도 하다.
 
<자전거 도둑>을 극장에서 정석적으로 목격한 이는 드물지만 다양한 경로로 이 영화를 경험한 이들은 적지 않다. 적어도 영화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대충 아는 정도까지 범위를 넓히자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대입수학능력시험 대비용으로 각광받는 문학작품 요약본을 본다고 해서 해당 작품을 온전히 소화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 어느덧 세상에 나온 지 75년이 된, 이 '박제가 되어버린' 고전의 진면목은 극장 스크린을 통해서 (다소간에 수동적으로 몰입을 유지해야)만 체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워낙에 세계구급 명성을 얻은 지 오래인 작품이다. 특히나 (영화 좀 본다는 이들이 한번쯤 듣지 않기도 힘들) '네오리얼리즘' 사조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히다 보니 독립예술영화 범주를 초월하는 대중 인지도를 확보했다. 그러한 고전-클래식 무비의 반열 중에서도 상위권 지명도를 인정받는다. 그래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해도 인지도와 반향은 웬만한 할리우드 명작에 버금간다. 게다가 은근히 세대를 초월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오히려 윗세대에겐 친숙하지만 현재 독립예술영화 주 향유 층에게는 제목만 들어본 적 있고 대강 내용은 알지만 제대로 소화해볼 기회는 드물었던 영화인 셈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했던 영화의 줄거리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줄거리는 무척 간단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지리멸렬한 패전국이 된 후, UN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전후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전쟁의 상흔이 역력한 황량한 로마 교외 변두리 어느 건물 앞,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무엇인가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건물에서 누군가 내려오자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둘러싸고 간절한 눈으로 응시한다. 직업소개소 중개인이다. 중개인을 둘러싼 모두는 전후 혼란 속에서 일자리를 찾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날 중개인의 입에서 나온 구인의뢰는 한두 곳에 불과하다. 그런데 희망 없이 주변을 배회하던 주인공을 누군가가 달려와 부른다. 그가 지망했던 일자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리치'라 불리는 그 남자는 일자리를 얻을 기대에 부푼다. 하지만 시내에 전단지를 붙이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전거 보유가 필수다. 그는 난색을 표하지만 중개인은 자전거를 구하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일자리를 넘겨야 한다고 딱 잘라 말한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남자는 반드시 자전거를 구하겠다고 다짐해 일자리를 사수한다. 하지만 당장 자전거가 뚝딱 튀어나올 리 만무하다. 근심에 빠진 남자는 아내와 의논하며 머리를 부여잡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보다 결단력이 강해 보인다. 단칸방에서 가장 값이 나가는 침대보를 몽땅 들어내 전당포로 향한 부부는 예전에 저당 잡힌 자전거를 되찾기 위해 이제는 침대 시트를 넘긴다. 그렇게 자전거를 되찾고 남자는 신이 나서 일을 시작한다.
 
겨우 일자리를 얻은 가족의 분위기는 마치 로또 복권에 당첨된 직후를 방불케 한다. 이제 이들 가족은 미래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전단지 작업 중에 남자는 그만 목숨 줄과도 같은 자전거를 도둑맞고 만다. 다행히 다음날은 휴일이다. 출근 전까지 어떻게든 자전거를 되찾아야만 한다. 어린 아들과 함께 남자는 자전거를 찾으러 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하지만 온갖 우여곡절 후에 끝내 실패하고 만다.
 
다른 방도를 내지 못하면 천신만고 끝에 찾은 일자리를 잃어버릴 절박한 상황에 남자는 점점 평정을 잃기 시작한다. 남자는 자신이 '자전거 도둑'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일부러 어린 아들을 보낸 뒤 광장 곳곳을 살피다 기회를 틈타 자전거를 훔친다. 하지만 주인에게 호응한 주변 시민들과 추격전을 벌이던 끝에 금방 허무하게 붙잡히고 만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으며 끌려가던 남자를 한달음에 달려온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가로막는다. 통곡 속에 사정하는 어린 아이를 본 자전거 주인은 부자를 측은히 여겨 용서해준다. 겨우 풀려난 남자와 아들은 풀이 죽은 채 집으로 향한다. 이게 이야기의 내용 전부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영화가 전하는 가난의 색깔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오랜만에 재회한 <자전거 도둑>은 그 간단한 줄거리와 빤한 결말에도 거대한 울림을 자아낸다. 대륙을 건너고 75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이 영화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머릿속을 먹먹하게 만들어 놓는다. 
 
다시 본 영화는 예전에 봤던 것과는 무척이나 다른 감도로 다가왔다. 똑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관객'의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수용되는 방식이나 감정이입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가변성을 띄게 마련이다. 그게 실은 당연한 진리인데 워낙에 영상물 홍수 속에서 예전처럼 한 작품을 몰입해서 볼 기회가 없다 보니 까먹고 있었다. 그렇게 피상적으로 영화를 대하다 보니 어느새 그 당연한 진실을 망각하고 대충 도식적으로 분류할 뿐이었다. <자전거 도둑>을 복습하는 과정은 그렇게 게을러진 자신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2023년 한국의 현실에서 이 영화를 다양한 이들이 함께 보고 대화를 나눈다면 과연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한 '울림'을 얻을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실로 위대한 이 영화에는 그동안 간과하거나 외면해왔던 세상의 어둡고 슬픈 단면이 녹아들어 있었다.
 
어쩌면 세상이 기대와 달리 자꾸만 나빠지면서 <자전거 도둑>의 함의가 재발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내내 화면 가득히 펼쳐지던 1948년 이탈리아의 비참한 상황은 마치 타임캡슐처럼 압축된 느낌이다(또 다른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대표작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 역시 같은 해인 1948년에 무대를 동병상련 처지였던 독일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예전에 볼 때는 그저 멀리 동떨어진 외국의 한 세기 전 역사로만 소화했던 영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 대신에 하루하루 막막한 절망에 휩싸인 2023년 바로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좌절감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때문일 테다.
 
이 영화는 우리를 짓누르는 엄혹한 현실이 그저 일시적 상황이 아니라는 합리적 의심을 확인시켜준다. 전쟁과 빈곤이 어떻게 사회를 파괴하고 개인을 모욕하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를 거듭해 반복되는 비참한 '현실'의 원형질을 고스란히 담아내 '고전'이라는 수식어에 모자람이 없는 통찰을 제공한다. 구체적인 배경은 상이할지언정, 영화 내내 일자리를 찾는 군중들의 아귀다툼 풍경은 '의자놀이'가 마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일상이 되고만 2023년 한국사회의 세태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현대자본주의 사회 속 노동과 실업 쟁점의 원형을 제시하다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일자리', 즉 '임금노동'이란 개념이 현대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에게 단순히 대가로 받는 임금을 초월해 어떻게 한 인간을 울리고 웃기게 만드는지를 영화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묘사로 풀어낸다. 예전에 볼 때는 간과하고 지나쳤던 체감이 확 느껴진다. 나날이 세상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봤을 때는 단지 클래식 영화였던 <자전거 도둑>은 '박제'가 되었던 고전에서 우리 시대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함의를 획득한 셈이다.
 
일자리 하나가 개인과 가족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거대한 변화를 불러오는지 주인공인 리치네 가족의 일희일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다. 그 어떤 석학들의 고담준론을 뛰어넘어 압도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는 위력이다. 굳이 글을 두 번 세 번 읽을 필요 없이 1시간 30분에 딱 맞춤형인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가 품은 압도적 실재는 요즘처럼 토론을 하려는 게 아니라 상대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확증편향을 인정받기 위한 무한 대립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공론장의 부재 상황에서 효용이 극대화될 법하다. 상대를 모욕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꼬투리 잡기에 치중하는 요즘 수많은 논객들의 현란하지만 공허한 주의주장은 영화에 담긴 진솔한 묘사 앞에서 순식간에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스치기만 했던 세밀한 묘사가 다시 보니 유독 돋보인다. 당장 급한 경비 염출을 위해 전당포에 살림을 저당을 잡히고, 다시 되찾기 위해 다른 살림을 맡겨야만 하는 빈곤의 악순환은 전당포 창고 안에 가득 쌓인 물건들로 시각화된다. 누군가에겐 자긍심이자 가보이지만 전당포 업자들에겐 그저 흔해빠진 몇 푼 안 되는 푼돈의 담보일 뿐이다. 그렇게 주인공이 어디어디 브랜드라며 소중하게 섬기다시피 하는 자전거와 아마 혼수로 장만했을 시트는 (다른 비슷한 사정을 품은 이들의 것처럼) 그저 특색을 잃은 채 거대한 산을 이룰 뿐이다.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아들에게 손찌검을 저지른 아버지가 자식과 화해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호기롭게 들어간 레스토랑에서도 식탁보가 깔린 고급 예약 좌석과 입구의 싸구려 테이블 사이의 격차는 종이 한 장 차이지만 넘어설 수 없는 벽이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기는 내팽개친 채 허겁지겁 빵을 먹던 아이와, 또래의 부잣집 소년이 섬세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다루는 모습의 교차는 '계급'이란 개념을 복잡한 설명 없이도 순식간에 인식하게 돕는다.
 
지금은 어렵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사람은 쉽게 타락하지 않는다. 주인공 가족이 아주 찰나에 보여주던 행복한 시간이 딱 이를 증명한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로 기대에 부푼 이들은 급여를 받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벌써부터 노동의 대가로 받게 될 임금을 계산해보는데 여념이 없다. 좋은 조건의 일자리라며 그들은 시간외수당과 휴일수당도 받고 구두나 작업복도 지원된다며 활짝 웃는다. 이제 피자 같은 건 언제든 먹을 수 있겠다며 열심히 새로운 생활설계에 환희를 느끼는 표정에서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순식간에 추락하는 절망의 풍경은 보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주인공 남자는 잃어버린 '내 것'을 되찾기 위해 거리를 누비며 점점 극단화되어간다. 그의 언행은 시간이 갈수록 거칠고 급박해진다. 단서가 될 노인을 겁박하고 예배 중인 성당 내에서 소란을 일으킨다. 물론 그가 모든 사정을 배려하기엔 짊어진 어깨의 짐이 너무나 무거운 게 사실이다. 예배당을 지나면서 추격전 와중에도 어린 아들은 성호를 긋지만 남자는 그럴 겨를이 없다. 그렇게 상징화된 주인공의 폭주는 끝내 위기와 파국으로 귀결된다. 결국 모든 걸 잃은 채로 부자간의 정만 겨우 간직한 남자와 아들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 풍경은 곧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로 거리를 방황하며 일을 찾는 수많은 이들의 뒷모습으로 구현된다. 결국 이 가족이 겪게 된 모든 개별적인 운명은 결국에는 사회와 세대 전체의 초상으로 통합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제의식을 구현하는 먹먹한 엔딩 장면이 예전에는 왜 각인되지 않았는지 놀라울 정도다.
 
시대를 초월해 가난의 상징이 된 제목과 그 한국적 변용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자전거 도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영화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언급된다. 시혜적 복지만으로 실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고 임금노동, 즉 일자리를 통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이 부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저 잔여적인 지원이 낳는 제도 의존의 문제는 중반부 교회에서 빈민들에게 미사 참여를 전제로 제공하던 급식과 서비스 지원으로 표현된다. 당장 생존은 할 수 있지만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하기 위한 새로운 의욕을 낳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즉 (1) 시민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참여와 자립생활 전제조건으로서의 '일자리', (2) 서로 보살피고 보호하기 위한 공동체적 연대의식, 이 두 가지가 함께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주인공을 가로막는 두 번의 상황이 후자를 상상하게 만든다. 도둑으로 의심되는 청년을 이웃으로 감싸는 동네 주민들과,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는 그를 붙들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요즘 한국사회에서 보기 힘들어진 풍경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것은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영화 장르가 가진 본질적 힘이다. 당시 이미 세계 영화흥행을 좌지우지하던 할리우드 대작들은 대개 메이저 스튜디오 세트장에서 제작되곤 했다. 대규모 물량에다 당대의 장인들이 솜씨를 발휘한 정교한 무대장치 대신에 이 영화의 카메라는 실제 삶의 풍경을 절망과 궁핍이 감도는 당대 로마의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리 '재현'하려 해도 '실체'를 초월할 순 없는 법이다. 거기에다 길거리에서 캐스팅한 (실제로 주인공처럼 실업자를 오가던 공장 노동자인)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삶 그대로인 연기가 화룡점정을 이룬다.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도 도달하기 힘든 압도적 '리얼리티'의 위력이 여실히 발휘된다.
 
이 압도적인 사실주의 접근법 덕분에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 제목은 시대를 초월해 어떤 특별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상징이 되었다. 빈곤이라는 환경에 종속당하는 개인의 초상과, 그럼에도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초상을 구현하는 데 이 영화의 이미지만큼 보편적인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영화가 뿜어내는 위력과 강렬한 이미지의 힘은 동일한 제목을 차용한 국내의 여러 사례들로 한층 더 증명된다.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박완서와 김소진의 단편소설들이 그 첫 번째 사례다. 김소진의 소설에선 극중 인물들이 실제로 <자전거 도둑>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만큼 영화가 한국사회 내에도 만만찮은 상징 개념으로 자리를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한국사회의 단면을 포착해내는 독립영화들 중에도 동명의 제목을 가진 작품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 <소울메이트>로 돌아온 민용근 감독의 2014년 단편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전거 안장을 훔쳐 파는 주인공이 자신을 용서하는 절도 피해자의 희생 앞에서 윤리적 가책을 느끼며 자신을 돌아보는 풍경을 가슴 저리게 담았다. 2020년 제작된 송현우 감독의 단편에서는 여자 친구의 임신중절 수술비용 마련을 위해 자전거를 훔치게 되는 주인공 소년이 겪게 되는 위기가 묘사된다. 사회의 관심과 지원에서 소외된 이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자전거 도둑과 그 과정에서 겪는 반전을 통한 딜레마라는 문제의식이 상통한다. 찾아보면 세계 각국에서 현지 버전의 <자전거 도둑>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이 고전영화는 후대에 풍부한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주었을 뿐더러 세기를 뛰어넘어 여전히 현실의 모순을 압축해 후대에 전하는 초상으로 생명력을 발산하는 중이다.
 
<작품정보>
 
자전거 도둑 The Bicycle Thief, Ladri di biciclette
1948|이탈리아|드라마
2023.04.26. 개봉|89분|12세 관람가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
주연 람베르토 마지오라니(안토니오 리치, 아버지 역),
       엔조 스타이올라(브르노 리치, 아들 역),
       리아넬라 카렐(마리아 리치, 어머니 역)
출연 지노 살타메렌다(바이오코 역), 비토리오 안토누치(도둑 역),
      줄리오 키아리(거지 역), 엘레나 알티에리(자비로운 숙녀 역),
      카를로 자키노(거지 역)
수입 및 배급 일미디어

1949 15회 뉴욕비평가협회 외국영화상
1949 4회 로카르노영화제 국제경쟁-심사위원특별상
1950 7회 골든글러브시상식 외국어영화상
1950 3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
1950 22회 미국아카데미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자전거 도둑 비토리오 데 시카 네오리얼리즘 람베르토 마지오라니 엔조 스타이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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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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