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생활용품점에서 수납용 박스를 사들고 나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 근처라 늘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보도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님 한 분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계셨다.

'오늘도 나오셨네.'

할머니를 처음 본 건 몇 달 전이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생명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우중충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낡은 패딩 점퍼 차림으로 홍보용 전단을 나눠주는 노인의 모습을 본 순간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마음을 마구 휘젓는 것 같았다.

앙상한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를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귀가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큼 다가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하필 날까지 궂어서 그 순간은 더 스산하고 음울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후 그 길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으로 할머니를 좇고 있었다. 안 보이시는 날은 오늘은 일을 안 하시나, 어디가 아프신 건 아닌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건 그분의 연세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알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더욱더 전단지를 받지 않는 세상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단지 배부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그냥 종이만 나눠주면 되는 일이니 편하고 쉬워 보여서 대학 입학 전에 용돈벌이 겸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칼바람이 옷 속을 파고드는 날씨에 꽁꽁 언 발로 서서 몇 시간째 사람들의 손만 쳐다보며 광고지를 내밀고 거절당하는 일을 겪다 보니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아르바이트는 남의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었다.

요즘은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없고, 코로나로 인한 감염 우려도 있어서 예전보다 전단받는 걸 더 꺼리는 것 같다. 나부터도 버릴 데가 없어서 전단지를 주머니나 가방에 넣으려면 솔직히 찝찝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수많은 행인이 외면하며 지나치는 길에서 갈 곳 잃은 할머니의 손을 볼 때면 차마 모른척할 수 없어서 멈춰 서게 된다.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 밝혀두자면 나는 그리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니다. 막무가내식으로 전단을 들이미는 이들을 보면 괜히 심사가 뒤틀려 피해갈 때도 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이나 어린 학생들 앞에서는 굳게 채운 마음의 빗장을 열게 된다. 세상의 냉랭함과 까칠함으로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를 마음에 조금의 온기라도 전해지길 바라며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전단을 받는다.

그런데 오늘은 양손 가득 들린 짐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다.

'아, 어떡한다....'

박스를 한 손으로 옮겨 들고 전단지를 받을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그때, 눈앞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한 청년이 성큼 다가와 할머니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더니 두 손으로 광고지를 받아 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치는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 그의 존재로 인해 차가운 세상의 온도가 조금 올라간 것 같았다.

'뉘 집 자식인지 반듯하게 잘 컸네.'

얼굴도 모르는 청년의 부모에게 고마워하며 할머니의 손에서 전단을 건네받고 걸음을 옮기다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뀐 횡단보도의 신호와 함께 밀려오는 인파 속에서 노인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의외로 전단을 받아가는 이들이 많은 것이 아닌가. 문득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속 웨이먼드의 외침이 떠올랐다.

"The only thing I do know is that we have to be kind. Please, be kind.(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거야. 제발 친절하게 대해 줘.)"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강함보다는 친절함과 부드러움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 Be kind!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강함보다는 친절함과 부드러움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무표정으로 무장한 사람들 속에 뜻하지 않은 따뜻함이 숨어 있었다. 그들이 내민 손이 할머니에게 작은 위로가 되리라 믿는다.

굵은 나뭇가지는 폭설이 내리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지만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자연스레 휘어져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제 모양을 유지하며 살아남는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노자의 말처럼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강함보다는 친절함과 부드러움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오늘부터라도 꽉 채운 마음의 빗장을 살짝 풀고 주변의 가족, 친구, 동료에게 다정함을 나눠보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다정함, #도덕경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가는 이야기와 책 리뷰를 적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