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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학교 어르신들의 수업장면
 마을학교 어르신들의 수업장면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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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마을에서 수업한다. 대개 '마을학교'는 교사가 '리' 단위 마을로 찾아가서 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같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한다. 그런데 이곳은 여러 면 소재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공부하는 학교다. '리' 단위 마을에 마을 학교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마을 학교가 있어도 동네 사람들에게 글 모른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 먼 곳으로 공부하러 오는 분들이 모인 학교다.

이번 수업은 '자기소개'를 배우는 단원이다. 수업하고 나서 제안했다.

"여러분도 자기소개를 해 볼까요?"

약 3분 정도 정적이 흘렀다.

"내 소개를 워떻게 말해야 할지 물러유. 선생님."
"그러면 칠팔십 연세에 공부하게 된 이유도 좋고요, 본인이 하고 싶은 아무 말이라도 해 보기로 할까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자기표현을 해 보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살면서 학교를 못 다닌 탓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표현을 못 하고 꾹꾹 참아왔던 분들이 아니던가.

잠시 후 한 학생이 용기를 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장사를 했는디 돈을 많이 벌었슈. 이제 장사 그만 뒀슈. 평생 글 물러 답답한 거 배우고 싶은 참에 우리 동네에 마을 학교가 생겼지 뭐유. 너무 좋았슈. 그런디 동네 사람들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한 줄 알거든유. 아무리 생각해두 우리 동네로 공부하러 뭇가겄더라구유. 뭇가쥬. 챙피허잖유. 그래서 알음알음 알아보니 이곳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한대유. 얼씨구나 하구 버스 두 번 갈아 타구 여기루 오는 거여유. 동네 사람이 워딜 그렇게 가냐고 물으면 취미생활 하러 간다고 둘러대유."

부리부리한 눈이 매력적인 김 학생이다. 버스 시간도 한 시간에 한 번씩밖에 없다 했다. 그것도 곧장 갈아탈 수 있는 게 아니라 30분 기다려야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어 학교에 오는 날은 하루시간을 다 사용한다고 했다. 이분 말을 듣더니 모두 말문이 터졌다.

"난 식당을 했슈. 반찬이 맛있다고 장사가 증말 잘 됐는디, 그땐 외상을 많이 했지유. 그런디 내가 글을 물러서 떼인 외상값을 가마니로 담으면 그 돈이 한 가마니는 될 거유. 외상값 갚으러 와두 글 물르는 거 알고 들 주고 그랬다니께유. 내가 글 알었어 봐유. 치부책에 다 적어놨겄쥬. 그러면 속여 먹었겄슈? 그래서 내가 지금이래두 글 배울라구 왔슈. 죽더라두 글 알구 죽을라구유."

얼굴이 희고 옷맵시가 좋은 멋쟁이 권 학생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부끄러워했다.

"난 울 어머니가 학교 보낼라구 책 사 왔는디 할머니가 지지배를 뭐 할라구 가르치냐구, 내 책을 글쎄 불 때는 아궁이에 쳐늫구 불 질러 버렸슈. 활활 잘두 타더라구유, 난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슈. 할머니가 얼마나 밉던지유. 워떻게 손녀 배울 책을 아궁이에 쳐 늫는대유. 그런디 엄니가 날 학교 보낼라구 할머니 몰래 또 책을 구해 왔거든유. 이번에도 여지없이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싸질러 버렸다니께유. '지지배는 집에서 일이나 가르쳐서 시집보내라. 시집보내면 남의 식구 되는걸 뭐 헐라구 돈 들여 가르쳐! 아들이라면 또 모르겄다!' 책을 아궁이에 태우며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슈. 난 공부해서 선생님 되구 싶었거든유."

선크림 안 바르고 맨얼굴로 농사지어 얼굴빛이 가무잡잡해 건강미 넘치는 최 학생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난 엄니 아버지가 여자라구 학교 못 보낸다구 안 보내 줘서 학교 뭇 댕겼슈. 살아보니 글 모르구 산다는 게 얼마나 답답헌지 나만 알어유. 이 속은 아무두 물류. 이제라도 공부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니 월마나 설레던지유. 학교 댕겨볼라구 몇 달 고민하구 결정했다니께유. 그러구 입학했쥬. 며칠 다녔는디 영감이 집에서 일이나 허라구 책을 갖다 버렸지 뭐여유.

나이 열일곱에 시집와서 칠십 다섯 되도록 일한 것도 많은디 일이나 허래유. 글쎄, 월매나 속이 터지던지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슈. 아무래도 공부는 허야 것더라구유. 벼르고 별러 날 잡았쥬. 가슴이 두방맹이질 하는디 작심허구 영감에게 말했슈. '공부 뭇허게 허면 나랑 이혼해유! 아주 오늘 담판을 져유.' 결국 내가 이겼슈. 그래서 여기 공부하러 온 거유. 남편에게 맨날 죽어 사는디 워디서 그런 오기가 생겼는지 말해놓구 나두 놀랬다니께유."


키 크고 날씬하며 얌전한 최 학생이 평소와 달리 씩씩하게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의 학생들은 버스로 오는 분이 3분의 2, 걸어오는 분이 3분의 1이다. 이분들이 거의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철이 되면 결석도 한다. 그렇지만 학구열이 높아 수업 시간의 집중도는 고3 수험생 못지않다.

그런데 학교라는 공동생활을 처음 해보기 때문에 더러 의견이 달라 다툴 때도 있다. 하지만 서로 나누고 베풀고 정이 많으시다. 모두 친형제지간처럼 아끼고 배려한다. 일반 학생들보다 우정이 끈끈하다. 아마도 같은 아픔(배우지 못한)을 겪었기 때문이다.
 
마을학교 어르신들의 수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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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배우고 직접 쓴 글

쉬는 시간이 지나고 두 번째 시간이다.

"이번 시간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짧게 써보기로 할 거예요."

모두 "뭇 써 유우" 하신다.

"글짓기를 직접 하기는 어려우신가요? 그럼, 우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말로 해 보기로 할게요. 좀 전 첫 번째 시간에 말씀을 잘하셨잖아요. 하실 수 있으시죠?"
 

"그럼 내가 먼저 말해 볼게 유."

십리 길 버스로 오는 오 학생이 먼저 입을 떼셨다.

"어제 영감님이 방아를 찧었슈. 요새는 맛있게 먹으려구 그때그때 집에서 먹을 것은 가정용 기계로 방아를 찧어유. 그런디 이번에도 방아를 찧어서 아들딸에게 부칠 거래유. 영감이 방아를 찧어서 자루에 담아 묶어 놓길래 내가 배운 걸 생각해서 글을 써 보기로 했슈. 꺼멓고 굵은 펜을 가져다 자루마다 이렇게 썼슈. '1 아들 찹쌀, 2 아들 찹쌀, 1 아들 멥쌀, 2 아들 멥쌀, 1 딸 찹쌀, 2 딸 찹쌀, 1 딸 멥쌀, 2 딸 멥쌀, 현미쌀' 이렇게 유.

아, 그랬더니 영감이 날 보구 뭐라고 했는지 아슈? 글쎄 날 보구 '밥값은 하는구먼! 공부하러 댕기더니 밥값 제대루 허네!' 이러지 뭐여유."

"우하하하 우하하하."


온 교실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참 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큰아들 하는 '큰' 자를 못 쓰겠어서 1아들, 둘째 아들의 '둘째'란 철자를 쓸 수가 없어 '2' 자를 붙여 쓰신 센스.

한바탕 웃음이 끝난 후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렇게 배워서 영감님 말씀대로 밥값 잘하는 오 학생에게 잘하셨다고 박수 쳐야겠죠? 박수."
"오늘부터 여러분도 밥값 잘하는 학생 되십시다."


교실은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오 학생은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쓰면 그게 글이 되는 거예요. 맞춤법은 틀려도 괜찮습니다. 내 표현을 누구라도 읽어서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차차 맞춤법은 배워 나가면 되니까 맞춤법 걱정하지 말고 써 보세요. 다른 학생들은 생각이 잘 안 나세요? 그럼, 아까 첫 시간에 여러분들이 이야기한 것, 그걸 쓰셔도 됩니다. 글쓰기 하실 수 있을 것 같죠? 자 그럼 지금부터 짧은 글쓰기 시작해 보십니다. 시~작!"

오늘도 한글학교 학생들은 팔십 넘은 연세에 한자 한자 한글을 배운다.

태그:#마을한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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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마을학교 성인문해교원입니다. 이밖에 웰다잉강의, 청소년 웰라이프 강의, 북텔링 수업, 우리동네 이야기 강의를 초,중학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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